개인적으로는 음악 콩쿨이라는 것에 대해 유디 메뉴인과 비슷한 입장인데, 주관적이고 추상적이며 개성적인 축에 속하는 음악이라는 예술에 등수 매기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콩쿨이 완전 쓰잘데기 없는 뻘짓이라고 매도하고 싶지도 않고. 어쨌든.
여타 장르와 마찬가지로 성악 콩쿨 같은 경우에는 유명한 본좌급 성악가들의 이름을 내걸고 개최하는 콩쿨이 많은데, 소위 '쓰리 테너' 들도 자신들의 이름을 건 콩쿨이나 마스터클래스 등을 진행한 바 있다. 이번에 끄적일 뻘글은 도밍고의 이름을 걸고 파리에서 개최하고 있는 콩쿨이고.
이 콩쿨이 시작된 것이 1993년이었는데, 도밍고라는 이름이 가진 파급 효과 때문에 전세계 성악도들이 앞다투어 파리로 집결했을 정도였다. (사실 이탈리아 오페라 외에는 플래그를 별로 꽂지 못한 파바로티나, 백혈병으로 인해 활동 영역이 축소된 카레라스와 비교하면 도밍고는 일단 레퍼토리의 폭이나 놀라운 스태미너 때문에 예술적으로 좋은 점수를 받을 수밖에 없는 듯.)
여느 콩쿨들과 마찬가지로 예선, 본선과 결선을 거쳐 총 네 사람의 성악가들이 최종 입상했는데, 순위에 대해서는 확인하지 못했다. (주의: 아래 순서도 결코 순위가 아님)
1. 아인호아 아르테타 (Aïnhoa Arteta. 1964년생, 에스파냐 바스크 지방, 소프라노)
2. 인바 물라-차코 (Inva Mula-Tchako. 1963년생, 알바니아 티라나, 소프라노)
3. 니나 스템메 (Nina Stemme. 1963년생, 스웨덴 스톡홀름, 소프라노)
4. 연광철 (Kwangchul Youn. 1965년생, 대한민국 충주, 베이스)
아무튼 저 입상자들과 도밍고가 기념으로 11월 20-21일 이틀 동안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극장(현 파리 국립오페라극장)에서 합동 콘서트를 열었는데, 이 실황이 소니 클래시컬을 통해 CD로 출반되었다. 반주는 도밍고와 주로 EMI에서 작업한 지휘자 유진 콘(Eugene Kohn) 지휘의 바스티유 오페라극장 관현악단이 맡았고.
입상자 대부분이 20대 후반~30대 초반인 점이 특징이었는데, 도밍고가 콩쿨 심사에 얼마나 관여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젊음의 혈기나 열정 보다는 안정되고 탄탄한 가창력을 보유한 성악도들을 뽑고자 한 것 같다. (그리고 오페라 쪽에서 두각을 나타낼 만한 인재 양성도 목표로 한 것 같고)
제목을 완전히 아는 곡들도 몇 곡 있지만,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 에스파냐어 실력이 딸리기 때문에 원문 그대로 프로그램을 옮겨 보면;
1. Giacomo Meyerbeer: Ô paradis (from L'Africaine. Plácido Domingo)
2. Vincenzo Bellini: Qui la voce sua soave (from I Puritani. Inva Mula-Tchako)
3. Alfredo Catalani: Ebben? Ne andrò lontana (from La Wally. Nina Stemme)
4. Charles Gounod: Mais ce Dieu...À moi les plaisirs (from Faust. Plácido Domingo & Kwangchul Youn)
5. Jules Massenet: Je marche sur tous les chemins (from Manon. Aïnhoa Arteta)
6. Gaetano Donizetti: Caro elisir, sei mio...Esulti pur la barbara (from L'elisir d'amore. Plácido Domingo & Inva Mula-Tchako)
7. Giuseppe Verdi: Già nella notte densa (from Otello. Plácido Domingo & Nina Stemme)
8. Giuseppe Verdi: Io muoio...Non imprecare, umiliati (from La forza del destino. Plácido Domingo, Nina Stemme & Kwangchul Youn)
9. Manuel Penella: ¿Me llamabas, Rafaeliyo? (from El gato montés. Aïnhoa Arteta & Plácido Domingo)
Encores:
1. Pablo Sorozabal: ¡No puede ser! (from La tabernera del puerto. Plácido Domingo)
2. Wolfgang Amadeus Mozart: Là ci darem la mano (from Don Giovanni. Kwangchul Youn & Inva Mula-Tchako)
3. Giacomo Puccini: O soave fanciulla (from La Bohème. Plácido Domingo & Aïnhoa Arteta)
4. Wolfgang Amadeus Mozart: Sull'aria...Che soave zeffiretto (from Le nozze di Figaro. Aïnhoa Arteta & Nina Stemme)
5. Giuseppe Verdi: Libiamo, ne' lieti calici (from La traviata. Plácido Domingo, Inva Mula-Tchako, Nina Stemme, Aïnhoa Arteta & Kwangchul Youn)
오페라의 본고장인 이탈리아 외에도 파리에서 열린 콩쿨인 만큼 마이어베어와 구노, 마스네의 프랑스어 아리아들도 선곡됐고, 에스파냐 출신인 아르테타는 마누엘 페네야라는 작곡가의 사르수엘라(zarzuela. 에스파냐 민속 오페라) '산고양이' 에서 듀엣곡을 선곡했다. 그리고 연광철이 선곡한 구노의 '파우스트' 에 나오는 파우스트 vs 메피스토펠레스 듀엣은 콩쿨 후 도밍고의 서울 공연 때 한 번 더 같은 라인업으로 불렸던 적도 있었다.
다만 불만인 것은, 여성 입상자들인 아르테타와 물라-차코(지금은 차코라는 남편 성을 빼고 그냥 '인바 물라' 라고 표기하고 있음), 스템메는 독창 아리아를 한 곡씩 불렀지만 연광철은 듀엣이나 트리오 빼면 독창곡이 하나도 없다는 거였다. 부를 베이스 아리아가 마땅치 않았는지, 아니면 불렀어도 CD 수록 시간때문에 짤렸는지 몰라도 아쉬운 대목이다. (다만 CD 러닝 타임이 74분이라 수록 시간 부족 때문은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도밍고 서울 공연 때 불렀던 짤막하지만 신랄한 '금송아지의 노래' 라도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앵콜곡을 연주하기 전에 도밍고가 프랑스어로 관객들에게 간단한 축사와 앵콜곡들을 설명하는 트랙이 첨부되어 있는데, HP가 무한에 가까운 철인이라는 능력치 외에도 다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스킬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도밍고가 할 수 있는 말은 모국어인 에스파냐어 외에 영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가 있다고 함. 독일어는 오페라 레퍼토리가 있기는 한데, 일상 회화까지 가능한 지는 미확인)
소프라노 셋은 각각 리리코 콜로라투라(아르테타), 리리코(물라), 리리코 스핀토(스템메)라는 색깔을 확실히 정립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이 콩쿨 이후 각 가수들이 주요 레퍼토리로 삼는 작품들도 각각 저런 계열을 중심으로 가지치기하는 식으로 확장되고 있다. 특히 스템메의 경우에는 스핀토의 범주를 넘어서는 드라마티코까지 소화하고 있는데, '아이다' 의 타이틀 롤이나 '트리스탄과 이졸데' 의 이졸데 역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상한 인물들이라 나름대로 기본 실력도 탄탄하고, 콩쿨 경쟁의 부담이 없어진 만큼 그렇게 크게 긴장하는 모습도 없어서 비교적 편하게 들을 수 있었다. 다만 앵콜로 부른 모차르트 오페라의 듀엣 두 곡은 좀 심심하다는 인상도 있었고, 라 보엠 듀엣의 마지막 악구인 'amor' 는 도밍고가 고음 악구 처리에 난조를 겪는 이유 때문에 음을 바꿔 부르고 있다.
마지막 곡인 '축배의 노래' 는 출연한 가수들 모두 부르고 있다고 크레딧에 나와 있는데, 연광철의 목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중간의 관현악 간주에서는 마치 빈 신년음악회의 라데츠키 행진곡 연주 때처럼 청중들이 박수를 치며 박자를 맞추는데, 심지어 허밍까지 하고 있다. (원래 오페라에서는 합창단이 관현악과 함께 노래하는 대목임) 이런 프랑스 관객들의 센스를 기대하고 도밍고도 서울 공연 때 시도하긴 했는데, 박수는 우렁차게 나와도 노래 선율이 들리지 않아 좀 실망했다고도 하고.
이 입상자 콘서트 이후에도 도밍고가 개인적으로 가수들을 챙겨준 사례를 찾아볼 수 있는데, 아르테타는 조르다노의 오페라 '페도라' 에서 같이 출연한 바 있다(DG의 DVD로 나와 있음). 그리고 스템메는 EMI의 마지막 오페라 스튜디오 녹음이라고 해서 화제가 되었던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를 역시 같이 녹음했고.
물라나 연광철은 착실히 자립해 나가고 있는 케이스인데, 물라는 영화 '제 5원소' 에서 도니체티의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에 나오는 유명한 '광란의 아리아' 를 불러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연광철은 이미 국내 찌라시들이 나불댔고, 씨부리고 있으니 더 이상 말이 必要韓紙?
도밍고 콩쿨은 이후에도 계속 파리를 거점으로 개최되고 있는데, 1회에서 연광철이 입상한 것이 나름 강한 인상을 주었는지는 몰라도 그 이후에도 한국 성악가들이 여럿 입상하고 있다. 내가 아는 사례로 바리톤 강형규(2001. 2위)와 테너 김우경(2004. 1위), 바리톤 양태중(2007. 1위)이 입상한 경력이 있고, 그 외에도 도밍고의 후계자로 점쳐지고 있는 테너 롤란도 비야손도 1999년에 2위로 입상한 바 있다.
다만 저 콩쿨이 도밍고가 은퇴 혹은 타계한 후에도 계속 진행될 지가 문제인데, 유명 음악인들의 이름을 내걸고 개최되는 콩쿨의 경우에는 해당 음악인의 타계와 함께 공중분해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카라얀 지휘 콩쿨이 있음) 그리고 저 CD도 2000년대 초반까지는 음반 가게들에서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절판되었는지 찾기 힘든 상태다.
개인적으로는 1993년 이후에도 콩쿨이 진행된 만큼, 그 실황도 음반화가 됐으면 하는 생각도 있긴 하다. 하지만 한국 뿐 아니라 전세계 클래식 음반 시장이 불황인 탓에 메이저 음반사들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 같고. 아무튼 콩쿨 자체는 별 무리없이 진행되고 있으므로, 많은 신진 성악도들의 양성소로 제 기능을 앞으로도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