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잡설
다케미츠/이시이: 관현악 작품 두 곡.
머나먼정글
2008. 1. 31. 18:32
일본 작곡가들 중 해외에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또 해외 작곡가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끼친 인물을 꼽으라면 아마 첫 번째로 언급될 인물이 다케미츠 도루(武満徹, 1930-1996)일 것이다. 도이체 그라모폰(DG)의 현대음악 전문 시리즈인 '20/21' 에서 음반이 몇 장씩이나 재발매되고 있고, 그 외에도 필립스나 낙소스 등지에서 신녹음도 계속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케미츠가 더 무서운(???) 것은, 음대나 음악원 등에서 정규 교육을 받지도 못했고 레슨 몇 번과 독학만이 음악 학력의 전부였음에도 자신만의 세계를 일찌감치 구축해 놓았다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는 드뷔시나 메시앙, 존 케이지 같은 선대 혹은 동시대 대가들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그 기반에는 항상 일본 전통 음악 특유의 '마(ma. 음과 음 사이의 간격)' 같은 사상이 굳건하게 버티고 있기 때문에 '일본적인 현대 음악' 이라는 면에 있어서 다케미츠가 남긴 업적이 대단하다고들 하는 것일테고.
게다가 현대음악 작곡가로 활동하면서도 영화나 텔레비전을 위한 '대중적인' 작업이나 가가쿠 등 전통음악 방면에서도 작품을 남기는 등 전방위적인 활동 영역을 보유했던 것도 중요한데, 특히 영화음악이나 방송음악 같은 경우에도 그냥 상업적인 면에만 의탁하지 않고 현대적인 음향 효과를 치밀하게 계산해서 써넣는 수고스러움을 고집했다. 이 때문에 영화 '란' 에 음악을 붙일 때는 감독이었던 구로자와 아키라와 대판 싸우기도 했다고 할 정도였다.
다케미츠가 해외에 알려지게 된것은 약관 20대 후반 부터였는데, 1959년에 스트라빈스키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다케미츠의 작품인 '현을 위한 레퀴엠' 을 듣고 극찬하면서 부터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967년에는 뉴욕 필의 음악 감독을 맡고 있던 레너드 번스타인이 악단 창립 125주년 기념작으로 의뢰한 '노벰버 스텝스' 로 서구 세계에 확실한 발판을 마련했고, 일찌감치 유럽과 미국에서 활동하던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가 다케미츠 관현악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공연한 것도 꽤 든든한 응원군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오자와가 고국인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지휘 활동을 시작한 것이 대략 1960년대 초반 부터였는데, 일본 최고라고 일컬어지는 NHK 교향악단의 객원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악단의 고참 단원들 입장에서는 아직 '애송이' 인 지휘자가 복잡하고 어려운 현대 작품을 프로그램으로 넣는 호기나 미국 스타일로 진행되는 리허설 방식 등이 마음에 안들었는지, 겨우 네 달만에 객원 계약이 취소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 메시앙의 '튀랑갈릴라 교향곡' 일본 초연 등 굵직한 업적은 확실히 남김. 참고로 튀랑갈릴라의 한국 초연은 올해 3월에 정명훈 지휘의 서울시향 공연으로 예정되어 있음)
일본 악단계의 보수적이고 파벌 위주의 폐쇄적인 분위기에 실망한 오자와는 다시 해외로 나가서 캐나다의 토론토 교향악단 음악 감독으로 활동하다가 1968년에 다시 일본으로 들어왔는데, 이번의 파트너는 일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였다. 오자와는 수석 지휘자로 근무하면서 N향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양한 신작들을 적극적으로 다루었는데, 다만 이번에는 악단이 재정난으로 흔들리다가 1972년에 공중분해되는 바람에 오리알이 돼버렸다.
그 때 단원들 중 1/3 가량이 오자와를 중심으로 새로운 관현악단을 만들기로 하고 빠져나갔는데, 그렇게 해서 결성된 악단이 바로 신일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다. 기존의 일본 필은 자주 운영 체제를 내세우고 힘겹게 재출발한 끝에 결국 살아났는데, 오자와는 일본 필과의 관계가 불편했는지 신일본 필의 육성에 집중하다가 1975년에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오자와가 일본 필 수석 지휘자 시절 말기인 1971년에 그 당시로는 이례적으로 자신이 직접 악단을 지휘해 세계 초연한 '따끈따끈한' 신곡 두 작품을 도시바에 재빨리 녹음했는데, 그 두 곡이 바로 다케미츠의 '카시오페이아' 와 이시이 마키(石井眞木, 1936-2003)의 '소구(조우) II' 였다. 녹음 장소는 지금도 일본 필이 연습장 겸 상주 공연장으로 쓰는 도쿄 스기나미구의 공회당이었다(1971.6.22/24).
하지만 다케미츠가 더 무서운(???) 것은, 음대나 음악원 등에서 정규 교육을 받지도 못했고 레슨 몇 번과 독학만이 음악 학력의 전부였음에도 자신만의 세계를 일찌감치 구축해 놓았다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는 드뷔시나 메시앙, 존 케이지 같은 선대 혹은 동시대 대가들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그 기반에는 항상 일본 전통 음악 특유의 '마(ma. 음과 음 사이의 간격)' 같은 사상이 굳건하게 버티고 있기 때문에 '일본적인 현대 음악' 이라는 면에 있어서 다케미츠가 남긴 업적이 대단하다고들 하는 것일테고.
게다가 현대음악 작곡가로 활동하면서도 영화나 텔레비전을 위한 '대중적인' 작업이나 가가쿠 등 전통음악 방면에서도 작품을 남기는 등 전방위적인 활동 영역을 보유했던 것도 중요한데, 특히 영화음악이나 방송음악 같은 경우에도 그냥 상업적인 면에만 의탁하지 않고 현대적인 음향 효과를 치밀하게 계산해서 써넣는 수고스러움을 고집했다. 이 때문에 영화 '란' 에 음악을 붙일 때는 감독이었던 구로자와 아키라와 대판 싸우기도 했다고 할 정도였다.
다케미츠가 해외에 알려지게 된것은 약관 20대 후반 부터였는데, 1959년에 스트라빈스키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다케미츠의 작품인 '현을 위한 레퀴엠' 을 듣고 극찬하면서 부터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967년에는 뉴욕 필의 음악 감독을 맡고 있던 레너드 번스타인이 악단 창립 125주년 기념작으로 의뢰한 '노벰버 스텝스' 로 서구 세계에 확실한 발판을 마련했고, 일찌감치 유럽과 미국에서 활동하던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가 다케미츠 관현악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공연한 것도 꽤 든든한 응원군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오자와가 고국인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지휘 활동을 시작한 것이 대략 1960년대 초반 부터였는데, 일본 최고라고 일컬어지는 NHK 교향악단의 객원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악단의 고참 단원들 입장에서는 아직 '애송이' 인 지휘자가 복잡하고 어려운 현대 작품을 프로그램으로 넣는 호기나 미국 스타일로 진행되는 리허설 방식 등이 마음에 안들었는지, 겨우 네 달만에 객원 계약이 취소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 메시앙의 '튀랑갈릴라 교향곡' 일본 초연 등 굵직한 업적은 확실히 남김. 참고로 튀랑갈릴라의 한국 초연은 올해 3월에 정명훈 지휘의 서울시향 공연으로 예정되어 있음)
일본 악단계의 보수적이고 파벌 위주의 폐쇄적인 분위기에 실망한 오자와는 다시 해외로 나가서 캐나다의 토론토 교향악단 음악 감독으로 활동하다가 1968년에 다시 일본으로 들어왔는데, 이번의 파트너는 일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였다. 오자와는 수석 지휘자로 근무하면서 N향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양한 신작들을 적극적으로 다루었는데, 다만 이번에는 악단이 재정난으로 흔들리다가 1972년에 공중분해되는 바람에 오리알이 돼버렸다.
그 때 단원들 중 1/3 가량이 오자와를 중심으로 새로운 관현악단을 만들기로 하고 빠져나갔는데, 그렇게 해서 결성된 악단이 바로 신일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다. 기존의 일본 필은 자주 운영 체제를 내세우고 힘겹게 재출발한 끝에 결국 살아났는데, 오자와는 일본 필과의 관계가 불편했는지 신일본 필의 육성에 집중하다가 1975년에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오자와가 일본 필 수석 지휘자 시절 말기인 1971년에 그 당시로는 이례적으로 자신이 직접 악단을 지휘해 세계 초연한 '따끈따끈한' 신곡 두 작품을 도시바에 재빨리 녹음했는데, 그 두 곡이 바로 다케미츠의 '카시오페이아' 와 이시이 마키(石井眞木, 1936-2003)의 '소구(조우) II' 였다. 녹음 장소는 지금도 일본 필이 연습장 겸 상주 공연장으로 쓰는 도쿄 스기나미구의 공회당이었다(1971.6.2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