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5인조' 라는 집단은 그 구성원들이 모두 음악과는 별 관련이 없는 것같은 삶을 살았지만, 그 어떤 전업 작곡가들보다도 음악사에 끼친 영향력이 막강했다. 특히 림스키-코르사코프나 보로딘, 그리고 무소르그스키(Modest Mussorgsky, 1839-1881) 세 사람의 경우가 그렇고.
물론 '아마추어' 로 시작한 만큼 어느 정도의 핸디캡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는데, 무소르그스키 같은 경우가 그랬다. 무소르그스키는 오페라나 관현악 장르에 도전하고 싶은 열망은 강했지만, 막상 그 열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관현악법이나 악기론 같은 것에서 물을 많이 먹은 듯하다.
그래서 동료였던 림스키-코르사코프가 무소르그스키 사후에 미완성 스케치나, 완성되었어도 뭔가 불완전한 느낌의 작품들을 나름대로의 주관으로 편집한 악보들이 출판되었다. 물론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선의로 행한 편집이었지만, 그 작업이 무소르그스키 음악 특유의 신랄함이나 어두움을 오히려 약화시켰다는 지적도 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소련 성립 후 파벨 람(Pavel Lamm)이라는 음악학자가 가능한한 무소르그스키의 원전에 충실한 편집으로 신전집을 출간했는데, 이와는 별도로 쇼스타코비치도 림스키-코르사코프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보리스 고두노프' 나 '호반쉬나(호반시치나)' 같은 오페라의 관현악 재편곡과 '죽음의 노래와 춤' 의 관현악 편곡 등을 행한 바 있다.
하지만 람의 편집으로 간행된 악보는 소위 '서방 자유진영' 에서 입수하기 힘든 것들이었고, 그래서 한동안 림스키-코르사코프 편집의 악보들이 상용될 수밖에 없었다. 무소르그스키의 피아노곡 중 가장 유명한 '전람회의 그림(Pictures at an Exhibition)' 도 마찬가지였는데, 이 곡은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손을 본 버전이라도 피아노곡이라기 보다는 관현악곡에 가깝다고 여겨질 정도로 색감이 강렬한 것이 특징이었다.
그래서인지 무소르그스키 사후 10년도 채 안된 1886년 경 미하일 투슈말로프가 첫 관현악 편곡을 발표했는데, 그림 사이에 있던 모든 프롬나드를 비롯해 상당히 많은 대목이 생략된 채였다. 1915년에는 영국의 지휘자였던 헨리 우드가 관현악 편곡을 내놓았으나, 우드도 네 곡의 프롬나드를 생략한 채로 편곡했다.
'전람회의 그림' 관현악 편곡이 일종의 전환점을 맞게 된 것이 1922년이었는데, 이 해에만 세 편의 편곡판이 선을 보였다. 바로 모리스 라벨과 레오 푼텍(Leo Funtek, 1885-1965)의 정규 관현악용 편곡과 주세페 베체의 살롱 오케스트라용 편곡이었다.
셋 중 가장 많은 인기를 얻었고 지금도 압도적으로 많이 쓰이는 것이 바로 라벨의 편곡판인데, 라벨은 자신의 관현악 작품에서도 보여준 화려한 색채와 효과적인 관현악법을 이 편곡에서도 활용해 초연 때부터 큰 호평을 받았다.
물론 1922년 이후에도 계속 여러 작곡가들이나 지휘자들이 자신들만의 편곡판을 계속 만들었는데,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의 경우에도 프롬나드 한 곡과 그림 두 곡을 삭제한 자신만의 편곡을 만들어 녹음하기도 했다. 이 스토코프스키 편곡판은 후대 지휘자들인 올리버 크누센이나 호세 세레브리에르 등이 계속 리바이벌하고 있다. 그 외에도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도 자신만의 편곡판을 만들어 데카에 녹음한 바 있었다.
1922년에 나온 나머지 편곡판 두 개는 라벨의 것에 가려 한동안 잊혀져 있었는데, 베체의 편곡은 살롱 문화가 퇴보하면서 거의 자연적으로 존재 가치가 없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푼텍의 편곡이 왜 잊혀졌는지는 아직 의문이다.
푼텍은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 태생으로, 18세 때 라이프치히에 유학해 바이올린을 배우고 핀란드로 건너간 뒤 그 곳에 눌러앉아 활동했던 인물이다. 바이올리니스트 활동 외에도 작/편곡이나 지휘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는데, 파보 베르글룬드나 요르마 파눌라, 그리고 베이스 가수로 유명한 킴 보리도 푼텍에게 작곡 혹은 지휘를 배운 바 있다.
하지만 핀란드에 머문 뒤로는 그 곳에서만 활동하다시피 했기 때문인지 활동 영역도 자연적으로 핀란드 국내로 좁아졌는데, 푼텍의 편곡이 '전람회의 그림' 이건 다른 편곡물이건 핀란드 밖에서 들을 수 있는 기회가 극히 적은 이유가 그러한 국지적 활동상에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나마 푼텍의 편곡이 핀란드 밖에서 알려지게 된 것은 푼텍 사후 10년도 더 지나서였는데, 핀란드 방송 교향악단이 해외 공연을 가지면서 푼텍 편곡의 '전람회의 그림' 을 메인 레퍼토리로 과감히 선택한 것이었다.
1986년에는 스웨덴 음반사 비스(BIS)에서 세계 최초로 푼텍판이 녹음되었는데, 라이프 제거스탐(Leif Segerstam) 지휘의 핀란드 방송 교향악단 연주였다. 4년 뒤인 1990년에는 핀란드의 파제르 뮤직(Fazer Music)이라는 출판사에서 처음으로 공식 출판되었는데, 아직 국내에서 입수하기는 상당히 어렵다고 한다.
푼텍 편곡을 알게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관현악기법 시간에 스터디 과제로 주어진 곡 중 '전람회의 그림' 의 라벨판 편곡과 푼텍판 편곡 비교 감상이 있었다. 교수님은 그 때 거의 '신성 불가침 영역' 이었던 라벨판의 맹점을 조목조목 따지면서, 얼핏 들으면 수수하고 투박해 보이는 푼텍판의 장점을 집어내는 형식의 강의를 하셨다.
물론 과목이 과목인 만큼 라벨의 편곡 실력 자체는 확실히 인정하고 계셨지만, '난장이(Gnomus)' 의 스트링 하행 포르타멘토나 특수 악기 사용-'옛 성(Il vecchio castello)' 의 알토 색소폰 사용과 '비들로(Bydlo)' 의 테너 튜바-, '리모주(Limoges)' 의 금관악기 용법 등 비효율적인 대목들에 관해서도 역시 확실히 비판하는 것을 빼놓지 않으셨다.
*푼텍의 경우에는 '난장이' 의 해당 악구를 일반적인 반음 하행으로 처리했고, '옛 성' 과 '비들로' 의 해당 파트에 각각 코랑글레와 베이스 클라리넷을 사용했음. 그리고 '리모주' 에서는 좀 더 기민한 현악기와 목관악기 위주로 편곡함.
그 때 예의 푼텍판 비스 녹음을 처음 들었는데, 낙소스 뮤직 라이브러리에도 있는 것을 알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어봤다. 전체적으로 라벨판에 비하면 '효과' 가 떨어지는 것이 확실했는데, 무소르그스키의 원전이 주는 묵직하고 어두운 느낌의 묘사는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올해(2008년) 1월에는 강변 테크노마트에서 SKC 라이센스로 나왔던 CD를 간신히 찾아내 4000원에 구입하기도 했고.
ⓟ 1988 BIS Records AB/SKC, Ltd.
CD에는 푼텍판 편곡 외에도 '민둥산의 하룻밤' 의 림스키-코르사코프 편곡판과 '죽음의 노래와 춤' 의 칼레비 아호 편곡판이 같이 들어 있었다. 세 편곡판 중 '죽음의...' 를 편곡한 아호가 내지 해설을 직접 집필했는데, 아호 역시 라벨판과 푼텍판을 비교하는 형식으로 해설을 하고 있었다.
아호는 두 편곡자의 관현악법 능력 보다는 무소르그스키의 진의를 어느 쪽이 더 잘 잡아냈느냐에 촛점을 맞추었는데, 물론 라벨의 편곡 실력은 인정하고 있지만 푼텍이 진의 잡아내기에는 훨씬 근접했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저 음반이 핀란드의 '푼텍판 세계화' 라는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출반됐기 때문에 일종의 '내셔널리즘' 이 해설에 들어갔을 수도 있겠지만.
무소르그스키의 의도 표현 외에도 푼텍판이 가진 장점은, (비록 림스키-코르사코프 편집판에 따랐기 때문에 무소르그스키 원전판과는 좀 상이하긴 해도) 최초로 모든 곡을 다 살려서 편곡했다는 것이다. 라벨의 경우에는 '사무엘 골덴베르크와 슈밀레(Samuel Goldenberg and Schmuyle)' 와 '리모주' 사이에 들어 있던 프롬나드를 삭제했는데, 그 프롬나드가 전에 나왔던 다른 프롬나드들의 '동어반복' 성격이 짙다는 의미에서 삭제한 것으로 파악된다.
세계 최초 녹음이고, 지금도 푼텍판의 다른 녹음이 나왔다는 소식이 없기 때문에 비교 대상은 없는 상태다. 그리고 악단도 나름대로 자부심과 자발성을 가지고 녹음한 듯한데, SKC 라이센스반은 이미 폐반된지 한참이고 비스 원판의 수입도 이뤄지지 않고 있어서 없는 사람들은 아쉬운대로 낙소스 뮤직라이브러리에 의존해야 할 듯 하다. (CD 번호: BIS-CD-325)
부록으로 시기순대로 모아본 '전람회의 그림' 관현악용 편곡판 목록;
미하일 투슈말로프(Mikhail Tushmalov): 1886년경. 스승 림스키-코르사코프와 공동 편곡했다는 설이 있음. '난장이' 와 '튈르리', '비들로', 프롬나드 네 곡 제외.
헨리 우드(Henry Wood): 1915년. 프롬나드 네 곡 제외.
레오 푼텍(Leo Funtek): 1922년. 최초로 전곡 무삭제 편곡.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 1922년. 가장 보편적 편곡. 프롬나드 한 곡 제외.
주세페 베체(Giuseppe Becce): 1922년. 살롱 오케스트라용 편곡.
레오니다스 레오나르디(Leonidas Leonardi): 1924년.
뤼시앙 카이예(Lucien Cailliet): 1937년.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Leopold Stokowski): 1938년. 이후 여러 차례 개작해 1971년 출판함. '튈르리', '리모주' 와 프롬나드 한 곡 제외.
발터 괴르(Walter Goehr): 1942년. 피아노를 편성에 포함시킴.
세르게이 고르차코프(Sergei Gorchakov): 1954년.
다니엘 월터(또는 다니엘 발터. Daniel Walter): 1959년.
헬무트 브란덴부르크(Helmut Brandenburg): 1970년경.
에밀 나우모프(Emile Naoumoff): 1974년경. 피아노 독주와 관현악용 편곡.
즈데넥 마칼(Zdeněk Mácal): 1977년경.
로렌스 레너드(Lawrence Leonard): 1977년. 피아노 독주와 관현악용 편곡.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Vladimir Ashkenazy): 1982년.
풍 슈원(Siu-Wen Pung): 1983년경. 중국 민족 관현악단용 편곡.
토마스 빌브란트(Thomas Wilbrandt): 1992년.
비르웩 엘리슨(Byrwec Ellison): 1995년.
메콩 델타(Mekong Delta. 독일 메탈 밴드): 1997년. 락 밴드와 관현악용 편곡.
칼 심슨(Carl Simpson): 1997년.
한스페터 그뮈어(Hanspeter Gmür): 2000년.
줄리언 유(Julian Yu): 2002년. 실내 관현악용 편곡.
마이클 앨런(Michael Allen): 2007년.
그 외 연도 미상 판본들;
고노에 히데마로(近衛秀麿)
기타즈메 미사오(北爪道夫)
토미타 이사오(冨田勲): 데즈카 오사무의 애니메이션 '숲의 정령' 을 위한 편곡.
*이외에도 레너드 슬래트킨 같은 지휘자는 여러 관현악 편곡판 중 몇 곡씩을 골라 일종의 컴필레이션 식으로 채워 연주하기도 하는데, 일부 목록에서 슬래트킨 편곡판이라고 되어 있는 것은 이러한 시도를 하나의 편곡이라고 잘못 이해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