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뒤면 이제 3학년 2학기 복학이다. 슬슬 학점 관리의 압박이 강렬해지고, 졸업 후의 진로에 대해서도 머리를 싸매야 할 고난의 시간. 그리고 만화가들의 마감에 버금가는 포스를 자랑하는 중간고사/기말고사용 곡 제출의 수난도 더해지고.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는 3학년 2학기 중간고사용 창작곡 장르가 '목관 5중주(플루트-오보에-클라리넷-호른-바순)' 다. 물론 다른 장르의 곡도 쓰기가 결코 만만치는 않지만, 저 장르의 경우에는 엄청난 난관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현악 4중주나 피아노 3중주와 달리 저 장르의 곡들이 그다지 많지 않은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니다. (심지어 모차르트나 베토벤, 브람스도 저 5중주로 남긴 작품은 없으니)
각 악기들이 비교적 균일한 금관 5중주와 달리, 목관 5중주에는 금관악기인 호른도 섞여 있고 리드 악기가 아닌 플루트도 들어 있다. 그 만큼 주어진 악기들에 고른 균형을 맞춰 주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교수님들은 '차라리 금관 5중주를 중간고사용으로, 목관 5중주를 기말고사용으로 내주는게 낫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하고 계시고.
아무튼 리게티 등이 남겼다는 목관 5중주 곡들을 찾다가, 그 곁가지로 꽤 색다른 편성의 곡을 하나 더 찾아냈다. 바로 라인베르거(Joseph Rheinberger, 1839-1901)의 마지막 작품인 6중주(op.191b).
일반적인 목관 5중주 편성에 피아노를 더한 곡인데, 이런 편성의 곡으로는 처음 들어봤다. 그리고 라인베르거의 작품으로도 제일 처음 들었던 곡이었고.
라인베르거는 리히텐슈타인의 파두츠에서 태어났고, 불과 일곱 살 때 고향 교구의 성당에서 오르가니스트로 데뷰했을 정도로 재능이 있었던 인물이었다. 1년 후에는 자신의 첫 작품인 미사곡을 발표했고, 1851년에는 뮌헨 음악원에서 오르간과 작곡, 음악 이론 등을 배웠다.
1867년에는 모교의 오르간과 작곡 교수로 임명됐고, 1877년에는 뮌헨의 궁정악장이 되어 주로 종교음악이나 오르간 음악의 창작과 연주에 주력했다. 특히 20곡의 오르간 소나타와 두 곡의 오르간 협주곡 등은 독일 오르간 음악의 부흥기에 나온 걸작으로 뒤늦게 인정받고 있으며, 12곡의 미사와 레퀴엠, 스타바트 마테르 등의 종교음악 창작에 대한 공로로 교황에게 상을 받기도 했다.
물론 라인베르거의 작품 중에는 소위 '세속 음악' 장르에 포함되는 곡들도 많은데, 오페라 '일곱 마리 까마귀' 와 어린이용 징슈필(음악극) '불쌍한 하인리히', 두 곡의 현악 4중주, 네 곡의 피아노 3중주, 피아노 4중주, 피아노 5중주, 목관과 현을 위한 9중주, 두 곡의 바이올린 소나타, 첼로 소나타, 호른 소나타, 두 곡의 교향곡, 피아노 협주곡 등 상당히 다양한 장르에 걸쳐 있다.
라인베르거는 교육자로도 많은 제자를 길러냈는데, 아내의 영향으로 영어에도 능통했던 이유인지 미국인 제자도 많이 받았다. 그 중에는 조지 채드윅과 호레이쇼 파커(찰스 아이브스의 스승), 헨리 홀든 허스 등 이후 미국에서 작곡과 교육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도 있었고. 그리고 '헨젤과 그레텔' 로 유명한 엥겔베르트 훔퍼딩크와 '성모의 보석' 으로 유명한 에르만노 볼프-페라리(이 시리즈의 맨 첫 번째를 장식함), 그리고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도 라인베르거의 제자였다.
6중주는 1899년에 쓰여졌는데, 엄밀히 말해 완전한 창작은 아니고 1년 전에 썼던 피아노 3중주 제 4번(op.191)을 확대 편곡한 것이다. 라인베르거는 평생 동안 꼬장꼬장한 보수적 성향을 계속 견지해 왔는데, 이 곡도 마찬가지로 고전주의 시기의 형식을 고수하고 있다. 심지어 소나타 형식인 1악장은 주제 제시부가 반복되는 것까지 지키고 있고, 3악장에서는 미뉴에트를 부활시켜 놓았다. (물론 미뉴에트라고는 해도, 시골풍의 해학적인 스케르초 성격이 짙다)
형식 외에 내용은 멘델스존이나 슈만 등 초기 낭만주의 작곡가들의 강한 영향을 받고 있으며, 교육자로 오랫동안 활동한 탓인지 일탈이나 파격 보다는 안정과 균형을 추구하고 있다. 하지만 2악장에서는 이전의 라인베르거답지 않은 드라마틱한 면모도 엿볼 수 있는데, 장단조를 자유로이 오가면서 교묘한 긴장이완 효과를 노리고 있다.
상당히 다루기 힘든 목관 5중주라는 편성에 피아노까지 더했음에도 각 악기 간의 역할 배분은 놀라울 정도로 효과적인데, 바순이나 호른 같이 비교적 홀대받는 악기들에도 매력적인 솔로와 합주 악구를 부여하고 있다. (특히 1악장 첫머리에 나오는 서정적인 바순 솔로에 주목)
라인베르거의 작품은 사후 빠른 속도로 잊혀졌지만, 최근에 다시 부활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낙소스에서는 오르간 소나타집을 중심으로 여러 장의 음반이 발매되고 있으며, 그 외에도 MD+G, 훙가로톤, 아르테 노바 등 마이너 레이블을 중심으로 리바이벌되고 있다.
6중주의 음반은 내가 아는 것으로 훙가로톤에서 나온 것(9중주 커플링)과 독일 음반사인 토로폰(Thorofon)에서 나온 것 두 종류가 있는데, 그 중 CD로 가지고 있는 것은 후자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관현악 교육 단체인 오케스트라 아카데미(Orchester-Akademie der Berliner Philharmoniker) 학생들의 연주인데, 피아노는 당시 아카데미 전속 반주자 겸 합주 지도 강사였던 호르스트 괴벨(Horst Göbel)이 맡고 있다.
ⓟ 1989 Thorofon Records GmbH
(나머지 연주자들은 베티나 빌트(플루트), 모니카 카라스코(오보에), 시노헤 세이키(클라리넷), 만프레드 리들(호른), 알레한드로 빌라(바순). 이 중 시노헤 세이키는 일본인으로, 카메라타에서 출반된 '윤이상 최후의 작품집' 중 클라리넷 5중주 제 2번의 녹음에 참가하기도 했음)
토로폰의 CD에는 이 6중주와 볼프-페라리의 '초짜' 시절 작품인 실내 교향곡이 같이 수록되어 있는데, 스승의 마지막 작품과 제자의 학창 시절 작품을 비교하면서 들을 수 있는 이색적인 커플링이다. (다만 볼프-페라리의 연주는 예전에 소개한 MiNensemblet의 연주보다는 좀 처지는 느낌이다.)
*라인베르거의 작품들은 슈투트가르트에 본사를 둔 음악 출판사인 카루스 출판사(Carus-Verlag)에서 전집이 출간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