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시절을 1990년대에 보내신 분들 중에서는 아마 '해적판의 로망' 을 경험해본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나도 그랬고.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만화에 대한 소위 '정식 한국어판' 이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볼 만한 것들은 해적판을 통해 처음 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오! 나의 여신님' 과 '바람의 검심' 이 그랬고, 나중에 정발이 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마이너 계통의 작품인 '반짝반짝 빛나는 향기(좀 BL 경향이 있음. 나중에 포스팅할 예정)' 같은 작품들을 아우르는 것이 당시 해적판들의 놀라운 스펙트럼이었다.
물론 해적판이라는 한계상, 종이의 질이나 인쇄 상태의 조악함이라던가 번역의 서투름 등은 두고두고 지적 대상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해적판이라는 존재가 소위 '상도' 를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정사' 에서는 소외되거나 비판의 대상이 될 것이 뻔하다.
그러나 '야사' 의 힘은 나름대로 대단하다. 초등학교 시절에 소위 '불량식품' 에 탐닉하지 않았던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렇게 해적판으로 소개되었던 작품들이 아직까지도 정발되지 않는 것이라면야,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많은 해적판 업계들 중에서 '우일' 이라는 업계는 내게 '바람의 검심' 을 처음으로 선사해준 곳이었다. 물론 히무라 켄신을 '바람' 이라고 칭한 엄청난 센스라던가, 잔혹한 장면을 화이트질과 잉크질로 어설프게 땜빵한 것 때문에 그다지 기억에 좋게 남은 판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한 약점이 그대로 노출됨에도 여전히 내게 큰 가치를 부여하게 하는 물건도 있었다.
바로 아모이 준(あもい潤)이라는 작가의 '레겐다(Leggenda)' 라는 작품이었는데, 원제는 '레겐데-제 3의 비둘기(レーゲンデ<第3の鳩>)' 였고 1992년에 카도카와 쇼텐에서 발매된 것이었다.
아모이 준(厦門潤)은 일본 위키피디아를 찾아보니 1963년에 고치현에서 태어난 여성 작가이고, 1984년에 '마인드스코프' 라는 작품으로 첫 상업지 데뷰를 했다고 한다. 1년 뒤 하쿠센샤의 '하나토유메' 여름판에서는 '아토 준코(亜藤潤子)' 라는 필명으로 등장했는데, 그 뒤로도 자신의 성인 '아모이' 를 히라가나로 풀어서 쓴 필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레겐데...' 가 이 필명으로 발표된 작품임)
아모이 준이 이렇게 다양한 필명을 쓴 것은 아마 자신의 작품 성향에 따라 구분짓기 위함인 것 같은데, 얼핏 보면 남자같이 보이는 자신의 본명은 소년지용으로 썼고 '아토 준코' 는 순정만화 계통 작품에 사용했다고 한다. 거기에 추가로 '오카노 아히루(陸乃家鴨)' 라는 필명을 더했는데, 이는 18금 작품의 연재 때 사용하는 필명이라고 한다.
아마 그의 작품으로 국내에까지 알려진 것은 '유성기 가쿠세이버' 정도 뿐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작품은 1993년에 OVA로도 제작되었고, 그다지 큰 인기를 모으지는 못했지만 국내 판권이 정식으로 등록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는 아직까지 그 가치를 잃지는 않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포함해서, 아모이 준의 작품은 국내에서 정발이던 해적판이건 지금까지 살아남아 유통되는 것이 전무한 실정이다.
이 '레겐데...' 도 마찬가지인데, 내가 아는 한 우일의 해적판이 국내에 소개된 유일한 버전인 것 같다. 1994년 10월 말에 발행되었으며, 가격은 권당 2000원이었다. (물론 제값에 사지는 않았다. 헌책방을 전전하면서 구한 것이고, 그나마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1-2권이 전부다.)
만화의 주인공은 '스바루' 라는 미소녀인데, '에셀' 이라고 불리는 올빼미를 기르는 나오 짝퉁같은 설정인 에게해의 작은 섬나라 공주다. 그런데 왜 이름이 일본식이냐고 물으시면...흠. 어쨌든 공주이자 아테나 여신을 섬기는 무녀인데, 열여섯 살이 막 되기 직전에 로마로 정략결혼을 가는 신세가 된다. 그녀를 맞기 위해 섬에 온 작자는 '리키우스' 라는 녀석인데, 로마에 있는 신랑의 가신이다. (꽤 재수없게 생겨서 '악역' 티가 확나는 인물)
사실 스바루는 열세살 때부터 좋아하던 남자가 따로 있었는데, '테렌티우스' 라고 하는 남자였다. 하지만 그는 얼마 있지 않아 로마로 가게 되었고, 그녀는 줄곧 독수공방만 때리고 있다가 갑자기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결혼을 해야 되는 캐안습 상황이 된 것이다.
에셀도 그냥 올빼미는 아닌데, 무녀가 기르는 동물 답게 예지력이라던가 텔레파시 같은 능력도 지니고 있는 영물로 나온다. 그 에셀이 폭풍우가 몰아치는 어느 날 밤에 표류하는 가무잡잡한 놈팽이를 발견하는데, 이 놈팽이가 이 이야기의 중요한 조역(인지 아니면 제 2의 주인공인지는 모르겠다)인 '시리우스' 라는 녀석이다. 출신 성분이 해적에다가, 말투도 껄렁하고 난봉꾼틱한 인물이지만 어쨌든 스바루와 함께 이야기의 중심에 서게 된다.
어쨌든 결혼을 위해 출항하는 날, 결국 스바루는 원치 않는 결혼을 거부하며 도망치게 된다. 하지만 도망을 거들어주던 남동생 아이아스가 리키우스가 쏜 화살에 맞아 쓰러지게 되고, 도망갈 곳이 없던 스바루는 결국 자신이 섬기는 아테나 여신의 가호를 바라며 바다로 뛰어든다.
때마침 섬에서 배를 훔쳐 돌아가던 시리우스가 그녀를 구해내고, 자신이 속한 해적단의 거점으로 데려간다. 섬에는 시리우스의 소꿉친구 겸 약혼녀인 아데라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시리우스는 스바루를 '공물' 처럼 취급하며 섬에 잡혀있는 인질들과 살게 한다. 그 인질들 중에는 니코데모(아마 성서에 나오는 니고데모인 듯)라는 현자풍 인물도 있는데, 그는 스바루가 섬기는 신 이야기를 듣고는 로마로 가야 한다고 충고한다.
여기까지가 1권의 2/3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무대로 하는 작품 답게 뭔가 스케일 큰 작품이겠지...라고 생각은 했는데, 일본에서도 불과 네 권의 단행본으로 끝맺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일본의 독자평도 '뭔가 시작하려는 찰나에 끝내서 섭섭하다' 라던가, '스토리의 골격 자체는 재미있는데 독자에게 쉽게 읽혀지지는 않는 작품' 이라는 평도 있었다.
하지만 픽션임에도 불구하고 '폼페이 최후의 날' 이라던가 플리니우스, 티투스 베스파시아누스 같은 역사상의 실제 사건이나 인물들도 집어넣고 있어서 흥미롭다. 그리고 그리스를 무대로 한 작품답게 신과 인간의 관계라던가, 신의 존재는 무엇인가 같은 철학적인 분위기가 전체에 감돌고 있어서 이채롭다.
그림은 그렇게 깔끔한 편은 아니고, 해적판이라는 핸디캡도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좀 거칠게 느껴진다. 하지만 스크린톤에 많이 의지하는 요즘 작풍과는 달리 세밀한 펜 묘사가 많아서 전체적으로 고급스러운 수공예품 같은 이미지를 많이 풍긴다. '서사시적 작품' 에 딱맞는 그림체라고 할까.
물론 이것은 컴퓨터 CG가 그다지 발달하지 않았던 때의 이야기고, 요즘에는 꽤 깔끔한 그림체로 변모한 것 같다. 홈페이지에 있는 여러 동인지 표지들-개중에는 '엄마는 4학년' 이나 '샤먼킹' 같은 작품의 패러디도 있음-을 보면 그 차이를 확실히 느낄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100% 몰입작' 반열에 들지 못했어도, 그래도 나름대로 정발하면 보는 재미가 쏠쏠할 것 같은 작품으로 평가하고 싶다. 4권으로 단명한 연재작이라도, 꽤 스케일이 커서 요즘같이 템포가 빠른 코믹 작품과는 다른 맛을 느낄 수 있고, 그림에 힘이 있어서 마음에 드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