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지만 슈트라우스가 교향곡 같은 '구시대 형식' 의 곡을 아예 못쓰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비록 '이탈리아에서' 나 '돈 환' 같은 초기 교향시의 유명세와 중요성에 가려서 거의 찬밥 신세지만, 슈트라우스가 고전적 형식 논리에 입각해서 쓴 교향곡도 두 곡이 존재하고 있다.
슈트라우스는 여섯 살 때 최초로 작곡한 '재단사 폴카' 이래로 계속 작곡 수업을 받으면서 창작도 병행했다. 물론 그 대부분이 공적인 무대에서 발표할 목적으로 쓴 곡은 아니었고, 지금도 거의 연주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 목록들을 쭉 살펴보면, 슈트라우스가 고전 형식에 대해 꽤 세밀한 연구를 하고 그것을 수많은 습작으로 남겨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1873년경부터 1874년까지 쓴 피아노 소나타 (혹은 소나티네)에서 그러한 형식 탐구가 나타나고 있고, 1877년에 최초의 '완성된' 관현악 작품인 세레나데를 내놓기 전에도 이런저런 오페라를 계획하면서 그 서곡도 남겨놓고 있었다.
슈트라우스 집안에서는 아버지 프란츠부터가 바그너나 리스트 류의 후기 낭만주의 사조에 강력한 반대를 표명하고 있었고, 그의 음악 선생들도 대부분 보수적인 예술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학습기에는 기껏해야 초기 낭만주의의 예풍 정도까지를 습득하는 차원이었다. 그러한 까닭에, 이 시기에 만들어진 슈트라우스의 초기작들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FM' 을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렇게 이것저것 손을 대던 소년 시절의 슈트라우스가 처음으로 '교향곡' 이라는 영역에 손을 댄 것이 1880년의 일이었다. '교향곡 (제 1번) D단조' 라는 매우 적절한 김대기풍(???) 타이틀의 곡이었고, 이 곡은 이듬해에 당대 유명 지휘자 중 한 사람이었던 헤르만 레비(Hermann Levi)의 지휘로 뮌헨에서 초연되어 '풋사과 작곡가' 로서는 예상 외로 호평을 받았다.
느린 서주붙은 빠른 소나타 형식의 1악장, 느리고 서정적인 2악장, 빠른 스케르초의 3악장, 론도 형식의 4악장 피날레까지 고전 형식을 거의 완벽히 준수하고 있는 곡인데, 그 때까지 슈트라우스가 받은 영향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대체로 멘델스존이나 슈만 등 초기 낭만주의 작곡가들의 어법을 따르고 있는데, 작곡자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들려준다면 아마 작곡 연대를 19세기 중반이라고 얘기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될 정도다.
아직은 자신의 개성 보다는 충실한 학습 진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했던 첫 교향곡을 쓴 뒤, 슈트라우스는 1882년에 뮌헨 대학에 입학해 철학과 미학, 예술사를 수강하면서 계속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작품을 발표하고 있었다. 그 중 '13개의 관악기를 위한 세레나데' 의 초연 소식이 당대 최고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지휘자 한스 폰 뷜로의 귀에 들어갔고, 뷜로는 그 후속작인 '13개의 관악기를 위한 모음곡' 의 작곡을 권유하면서 슈트라우스의 재능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스무 살도 되지 않았던 '청소년' 슈트라우스로서는, 뷜로라는 대가의 눈에 들었다는 것 만으로도 엄청나게 '땡잡았다는' 것을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뷜로 역시 슈트라우스의 아버지나 작곡 스승이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마이어처럼 고전주의 형식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인물이었고, 슈트라우스도 자신의 창작 성향을 여전히 그 쪽으로 고정시키고 있었다.
1883년부터 쓰기 시작했던 두 번째 교향곡도 뷜로의 영향권에 들어간 시기의 곡인데, 이 곡은 슈트라우스가 딱 스무 살을 찍은 이듬해인 1884년에 완성되었다. 이 곡은 그 해 12월에 바다 건너 미국에서 뉴욕 필하모닉 협회(현 뉴욕 필하모닉)의 연주로 초연되었는데, 당시 유럽-특히 독일-에서만 국지적인 활동을 하고 있던 슈트라우스로서는 '신대륙' 에서 자신의 이름을 알릴 수 있던 좋은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이 '교향곡 제 2번 F단조' 는 전작보다 더 규모가 커졌는데, 스케르초와 안단테 악장이 예전 곡과는 순서가 뒤바뀌어 있는 것도 특징이다. 1악장 첫머리의 하강 동기는 훗날 '알프스 교향곡' 의 첫머리에 나오는 것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는데, 아직 형식에 있어서는 고전 교향곡의 틀을 크게 벗어나고 있지 않지만 악상의 성숙도는 예전 것보다 높은 편이다.
특히 3악장 안단테에서는 훗날 슈트라우스가 즐겨 사용하게 되는 화성 진행 같은 면모가 조금씩 얼굴을 내밀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가장 인상이 괜찮았던 대목이었다. 그러나 2악장 스케르초의 경우 전작의 멘델스존풍 전개를 거의 그대로 답습하고 있고, 1악장 첫머리의 하강 동기를 후반부에서 내놓아 일종의 '순환 형식' 을 이루는 4악장에서도 대위법 기교를 좀 지나치게 과시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슈트라우스는 1885년에 마이닝엔 궁정악단에서 뷜로의 부지휘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알렉산더 리터가 소개해준 베를리오즈와 바그너, 리스트의 음악에 강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세 작곡가 모두 뷜로가 거의 안티였던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슈트라우스는 뷜로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차원에서 조심스럽게 작품을 연구하고 창작에 반영했다.
이후 (아직 뷜로의 영향권 안에 있기는 했지만) 첫 교향시로 '이탈리아에서' 를 1886년에 내놓았고, 이어 '돈 환' 과 '죽음과 변용', '맥베스' 등을 후속작으로 차례차례 내놓으면서는 이제 더 이상 뷜로의 후광을 입지 않아도 될 만큼 자신의 입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또 그 동안 '숨어서' 좋아하던 바그너나 리스트 등의 음악도 공개적으로 거론하게 되었고, 두 작곡가의 작품도 연주회 무대에서 지휘할 수 있게 되었다.
슈트라우스의 '번호 붙은' 교향곡들은 두 곡 모두 연주 빈도가 무척 적은데, 음반도 찾아보기 아주 힘든 실정이다. CD 초창기에 이 '채산성 드럽게 없는' 레퍼토리들의 녹음에 용감하게 달겨든 것이 낙소스 산하 레이블 마르코 폴로였는데, 우선 1985년 3월 31일부터 4월 3일까지 나흘에 걸쳐 케네스 셔머혼(Kenneth Schermerhorn)이 지휘하는 홍콩 필하모닉 오케스트라(Hong Kong Philharmonic Orchestra)의 연주로 교향곡 (제 1번)이 녹음되었다.

3개월 반 뒤인 7월 21일에는 브라티슬라바에서 미허엘 헐라시(Michael Halász) 지휘의 슬로바키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Slovak Philharmonic Orchestra)가 교향곡 제 2번을 녹음했고, 두 녹음 모두 같은 해에 CD와 LP로 출반되었다(제품 번호는 CD 기준으로 각기 8.220323/8.220358). 그러나 20여 년 전의 일이었던 만큼, 지금은 두 가지 모두 폐반 상태고. lllOTL

그나마 중고품이나 공인 CD-R반이 아마존 등지에서 거래되고 있는데, 인터넷으로 중고품을 구입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운에 맡겨야 하는 일인지라 좀 주저하고 있는 상태다. 차라리 본진인 낙소스에서 재발매를 해주는 것이 나을 것 같지만, 낙소스의 요즘 행보는 구반의 재발매 보다는 신보의 확충에 주력하는 것 같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고.
어쨌든 다행히 두 녹음 모두 낙소스 뮤직라이브러리에서 들어볼 수 있는데, 다만 다른 음원들처럼 라이너 노트 같은 상세 정보는 제공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와는 별도로 독일의 코흐 슈반에서 칼 안톤 리켄바허(Karl Anton Rickenbacher) 지휘로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1번)과 베를린 방송 교향악단(2번) 두 곡을 한 장에 담은 CD도 1999년에 나왔는데, 이것 역시 절판 혹은 폐반 상태다. 리켄바허는 이 두 곡 외에도 슈트라우스의 잘 알려지지 않은 관현악 작품을 작곡 시기를 막론하고 골고루 녹음한 바 있는데, 연초에 신나라레코드 용산점에서 목격한 뒤로는 찾아볼 수 없었다.
2번의 경우는 그래도 음반이 몇 종류는 더 나왔는데, 일본의 덴온에서 와카스기 히로시 지휘의 도쿄도 교향악단이 1994년에 내놓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샨도스에서도 같은 해 네메 예르비 지휘의 로열 스코티시 내셔널 오케스트라가 녹음한 것도 나온 적이 있었고. 하지만 이 두 가지도 한국 음반 시장에서 구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아무튼 음반도 잘 안나오는 레퍼토리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데, 슈트라우스의 교향시나 오페라 작품만이 뜻이요 진리요 길이라는 사람에게는 추천할 아무 이유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고전 FM' 슈트라우스라는 초짜 시절의 이색적인 모습을 관찰하고 싶은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귀중한 레어템일 것이겠고.
*참고로 슈트라우스 작품은 작품 번호(opus/op.) 붙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범벅이 되어 있는 상태인데, 가장 최근인 1999년에 음악학자 프란츠 트레너가 연대 순으로 차곡차곡 정리해 놓은 새로운 목록 체계인 트레너 목록(Trenner-Verzeichnis/TrV)이 가장 신뢰성 있는 분류법으로 각광받고 있다. 마르코 폴로의 교향곡 (제 1번) 음반에 곁다리로 끼워져 나온 곡들까지 포함한 트레너 목록 번호는 다음과 같다;
교향곡 (제 1번) D단조 (Sinfonie (Nr.1) d-moll): TrV 94 (구 분류 AV 69)
간주곡 (Interludio): TrV 262 제 2번 (구 분류 AV 117)
→ 모차르트의 오페라 '이도메네오' 를 1931년에 새로이 '편곡해' 내놓은 공연에 쓰기 위해 슈트라우스가 3막 시작 전 삽입시킨 곡. 하지만 모차르트의 냄새는 거의 없음.
전투와 승리 (Kampf und Sieg): TrV 167 (구 분류 AV 89)
→ 1892년에 바이마르에서 상연된 연극의 부수음악 '생생한 풍경(Lebende Bilder)' 에서 슈트라우스가 훗날 편곡한 관현악 작품. '핀란드 기병대 행진곡' 이 거의 통째로 인용되어 나오고 있으며, 제목 그대로의 상황을 묘사한 기회 음악.
교향곡 제 2번 F단조 (Sinfonie Nr.2 f-moll): TrV 126 (구 분류 op.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