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개월 가까이 군인으로 있으면서 나는 꽤 많은 것을 잃었다. (물론 살은 거의 그대로지만 ;W;+++) 특히 내가 스스로도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인간성의 상실' 이었다.
같은 하늘 아래, 그리고 부모님의 사랑으로 태어난 다른 인간에 대해 그토록 잔인해질 수가 없었던 것이 바로 군대 생활이었다. 그래, 소위 '갈굼' 말이다. 당한 만큼 되갚아 준다는 말 때문이었을까. 나는 내 자신이 그토록 사악하고 못되먹은 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도 엄청나게 놀랐다.
그래서일까. 요즘에는 뭔가 '치유' 를 받고 싶어지는 마음이 간절하다. 음악도 무거운 내용의 것을 자주 듣게 되고, 책 같은 경우에도 '창가의 토토' 류의 잔잔한 감동이 있는 회고록 류를 보게 된다. 그리고 애니메이션의 경우에는 이 작품이 나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바로 '사랑해 베이비(국내판: 베이브 마이 러브)' 였다.
신작 위주로 보는 내게 나온 지도 2년 가량이 지난 이 작품이 어떻게 먹혔을까? 다름 아닌 군대에 있던 스카이라이프 때문이었다. (그나마 이것이 군대가 우리 집보다 나은 몇 가지 장점이었음) 우연히 돌린 채널에서 나오던 만화가 '전형적인 초딩물' 이라고 생각하고 돌리려고 했는데, 그만...
...그래, 나 로리제국 공군총사령관 허름한괴링이었지...
하여튼 20대 후반이라는 나이에 칠칠맞게 나의 열혈 로리콘 근성이 다시 들끓기 시작했고, 결국 말년 휴가를 나와서 저 작품을 제대로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결론은 이랬다;
킷페이 궤쎅히...;W;+++
그 증거물들은 요랬다;
치마만 둘렀으면 좌껄떡 우껄떡을 반복하던 카사노바 고딩 카타쿠라 킷페이는 어느날 갑자기 로리콘 끼가 발동하더니, 아직 초딩도 안된 다섯 살짜리 이종사촌 동생 사카시타 유즈유에게 접근한다. 선물로 환심을 사놓고 므흣한 표정을 짓는 킷페이.
결국 유즈유를 범하고 만 킷페이. 눈물 범벅이 된 유즈유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결국 이 작품의 노선 자체를 하렘물에서 육아물로 바꾸는 엄청난 개혁을 단행하고 만다. 그는 강도는 훨씬 약하지만, 속내는 더 음흉한 방법으로 유즈유를 사로잡고자 한다.
첫날 밤에 너무나 경황 없이 덮쳤던 것을 후회하며, '이마에 키스' 부터 시작하는 킷페이. 물론 그 효과는...
귀축 모드의 킷페이와는 다른 로맨틱 무드 조성에 넘어가고 마는 유즈유. 그녀는 과연 키운 뒤 섭취하겠다는 킷페이의 진심을 알 수 있을까. 다음 편에 계속.
...물론 믿으실 분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하여튼 이 작품, 전형적인 순정물이고 또 성장물이다. 하지만 아빠는 사고로 비명횡사, 엄마는 그 충격으로 애 덜렁 남겨 놓고 도주한 황당한 시추에이션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유즈유와 달리 가족 구성원이 모두 갖춰져 있는 킷페이네 집에서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사람으로 지목된 것은 킷페이 자신이었다.
기센 누님 레이코 때문에 사실상 반강제적으로 육아를 책임지게 된 킷페이도 그렇게 착한 놈은 아닌데, 위에 쓴 대로 화려한 여성 편력에 학업 성적도 별로인 '쌩날라리' 로 제멋대로 사는 인물이라는 점에서는 '미도리의 나날' 의 세이지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세이지가 가끔씩 야성미(???)를 보여주며 원래 성깔을 종종 드러내는데 반해, 킷페이는 유즈유를 맡아 키우게 되면서부터 그러한 면모를 갑작스러울 정도로 팍팍 줄여 나간다. 물론 그런다고는 해도, 육아에 엄청나게 서투른 탓에 초반부 에피소드는 실수하기-울려놓기-위로하기 순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대다수다.
이러한 점 때문에 킷페이와 유즈유의 관계는 상호 보완적인데, 킷페이는 유즈유를 기르게 되면서 자신에 대한 책임감도 느끼게 되고 점차 건실한 소년으로 성장하게 된다. 유즈유는 킷페이의 보살핌으로 어두운 성격의 외톨이에서 벗어나 또래 친구들처럼 발랄한 여자아이로 거듭나게 되는데, 이 애니메이션은 그 과정을 주축으로 하고 있다.
물론 킷페이에게 속으로 마음을 두고 있던 동급생인 토쿠나가 코코로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다. 킷페이 주위에서 맴돌 듯이 나타나던 코코로는 중반부에서부터 킷페이에게 직접 호감을 드러내게 되는데, 이 때문에 킷페이와 유즈유 사이에는 갑자기 '갈등 요소' 가 생성된다.
얼핏 보면 '괴상한 삼각 관계' 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코코로는 어렸을 적에 유즈유와 마찬가지로 외톨이였기 때문에 킷페이에게 일종의 '부성애' 를 느낀 것이었다. 유즈유 입장에서는 킷페이가 코코로와 가까워지면서 오히려 자신이 방해가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결국 또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그렇지만 이들 갈등 요소는 아주 쉽게, 그리고 가장 모범 답안인 요소로 봉합된다. 바로 '사랑'. 아직까지 '애는 때리면서 키워야 된다' 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한국이지만, 여기서는 픽션 답게 킷페이가 유즈유를 때리거나 윽박지르는 일은 없다. 오히려 유즈유에게 더욱 많은 애정을 쏟아 붓는데, 동시에 유즈유를 매개로 코코로와의 관계도 사랑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보면 이 작품의 전형적인 가족 드라마 양식을 어렵잖게 파악할 수 있다.
현재 애니맥스 방영분은 은영선(유즈유), 최원형(킷페이), 김지혜(코코로) 등의 성우가 더빙해서 방영하고 있는데, 일본 원판의 경우에는 아주 이례적인 성우 기용으로 유명했다. 전체 성우진 자체도 결코 화려한 캐스팅은 아니었는데, 기껏해야 킷페이의 동생인 사츠키 역의 스즈키 마사미 정도가 눈에 띌 뿐이다.
무엇보다 유즈유 역의 성우 기용이 화제가 되었는데, 당시 10살이었던 아역 배우 츠즈라하라 미유(黒葛原未有)가 캐스팅 되었다. 단순히 아이 목소리가 아닌 아이들의 생각과 사고 방식까지도 담아내겠다는 제작진의 일념이 담긴 대목인데, 그 결과물은 매우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에서 하쿠 역의 성우에 당시 10대였던 이리노 미유를 캐스팅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너무나 안전한 노선만을 골라서 가는 까닭에 그 순진함이 때로는 부담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 작품처럼 '치유되는' 효과를 내는 작품이 무척 적은 현실에서는 오히려 이색적인 존재로 보여진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향의 것으로는 비교적 최근 작품인 '사신의 발라드' 는 어떨까? 내심 그 내용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