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폐간된 '레코드리뷰' 라는 잡지에는 러시아 국영 음반사 멜로디아(Melodiya)가 90년대 초반 발매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2차대전 시기 녹음(1942-45)의 CD에 대한 흥미로운 기사가 실려 있다. CD에 대한 평 외에는 독일 제국 방송국(RRG)이 테이프를 실황 공연 녹음에 쓰게 된 경위, 푸르트벵글러와 나치 사이의 관계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물론 지금 봐서는 저 기사가 너무 '푸르트벵글러 감싸안기' 라고 보여지고 있는데, '이 CD들은 푸르트벵글러가 나치에 협력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라는 대목에서는 정말로 실소가 터져나올 정도였다. 필자가 누군지도 밝히지 않은 그 기사는, 한국 (혹은 일본일 수도 있다)의 그 지겹도록 되풀이되는 '순수음악가는 잘못이 없어' 라는 헛소리를 활자화한 정도밖에 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나치의 국영 방송국에 의해 녹음된 푸르트벵글러의 전시 녹음들이 지금도 많은 사람들-나도 포함-의 혼을 빼놓고 있음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발생하는 엄청난 긴장감과 긴박감이 AM 라디오 수준의 음질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수많은 재발매 CD를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푸르트벵글러 사후 50주년이 되는 2004년이 저물어 가고 있는 시기에, 또 하나의 '센세이션' 이 될 만한 녹음이 처음으로 소개될 예정이라고 한다. (물론 푸르트벵글러가 상당 수의 '수상쩍은' 녹음을 보유하고 있는 아티스트라는 점을 보면, 철저한 검토가 필요함은 물론이다.)
1942년 히틀러 생일 전야제 때 연주된 베토벤 교향곡 9번의 실황. 그 동안 어떤 미발매 녹음 리스트에도 없던 것이 갑자기 튀어나와서 어리둥절한데, EMI/IMG의 '20세기의 위대한 지휘자' 시리즈에서 첫 선을 보였던 베토벤 교향곡 3번과 마찬가지로 '대략 정신이 멍해지는' 상황이다.
지금까지 발매된 푸르트벵글러의 교향곡 9번 녹음은 모두 열 종류로, 이 중 위의 '전시 녹음' 에 포함되는 것은 두 번째 녹음인 1942년 3월 22-24일의 실황이다. 이 연주회는 합창을 맡은 브루노 키텔 합창단의 창단 40주년 기념 공연이었는데, 4악장에서 베이스 독창자가 선창하는 부분 직전에 갑자기 다른 테이프를 이어붙인 듯한 부분이 있어서 지금도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일본의 많은 푸르트벵글러 애호가들은 4악장 전반부가 3월의 녹음이고, 후반부가 문제의 '히틀러 생일 전야제' 의 녹음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어떤 사람들은 녹음 전체가 모두 4월의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기도 하다. 일단 대세는 3월의 것이라는 주장이 많고, 독창자들의 목소리도 3월 공연의 것이 확실한 것 같다. (특히 테너 독창자 페터 안더스의 금속성 목소리는 확실히 3월의 것임을 입증한다고 본다.)
문제의 '히틀러 생일 전야제' 는 3월 연주 후인 4월 19일의 연주회인데, 푸르트벵글러는 이 연주회를 지휘하면 그야말로 전세계에 '나치의 나팔수' 임을 표방하게 되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몸이 아프다는둥, 다른 곳의 연주회 스케줄이 잡혀 있다는둥 하면서 이 연주회의 지휘를 피하고자 했지만, 결국 지휘대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이 연주회는 당시 독일 점령지와 동맹국의 모든 방송국에서 실황으로 중계되었으며, 미국이나 영국 등의 반나치 성향 음악인들은 이로서 '푸르트벵글러=나치' 라는 공식을 만들게 되었다. 하지만 이 실황이 과연 녹음으로 남겨져 있는가 하는 문제는 지금까지 수수께끼로 남아 있던 터였다.
전야제의 녹음은 이런저런 사이트들을 참조해 보니, 독일 제국 방송국의 당시 실황을 누군가가 사적인 목적으로 녹음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 테이프 레코더는 무게가 무려 200kg이나 되었고, 값도 무척 비싸서 방송용 등 공적인 목적으로만 쓰였다. 이 시기 동안의 '사적인 녹음' 은 대부분 소형 아세테이트반 녹음기를 라디오 스피커에 갖다대고 녹음한 것이다.
당연히 이러한 녹음들은 음질도 무척 안좋고, 아세테이트반도 기껏해야 한 면당 4분밖에 녹음할 수 없었으므로 새 아세테이트를 갈아 끼우는 동안의 방송은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대표적으로 1941년의 브루크너 교향곡 4번과 7번 단편들-. 하지만 이 녹음은 사적인 녹음인데도 불구하고 교향곡 전곡은 물론이고, 방송 후반부의 아나운서 멘트까지 빠짐없이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녹음에 쓰인 아세테이트반은 모두 일곱 장(14면)으로, 이 아세테이트반들을 복각한 CD가 Archipel이라는 음반사에서 10월 11일에 나온다는 것이다.
일단 일본의 몇몇 푸르트벵글러 애호가들이 '시작반' 을 입수해 들은 결과, 3월의 녹음과는 다른 것이며 아세테이트반 특유의 지글거리는 잡음이 들린다고 한다. 물론 음반사의 복각 능력과 원반의 상태 등으로 일부 대목에서 3월 녹음이 땜빵될 가능성은 여전히 있다.
만약 이번에 발매될 CD가 정말 히틀러 생일 전야제의 녹음이라면,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또 하나의 '역사의 기록' 이 될 것 같다. 또 '푸르트벵글러는 친나치였는가, 반나치였는가' 라는 해묵은 논쟁도 다시 고개를 들고, '음악가는 정치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라는 문제가 다시금 이슈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