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파 작곡가들 가운데 가장 '낭만적인' 커플을 따지자면 아마 슈만 부부가 아닐까 싶다. 로베르트 슈만의 피아노 선생이었던 프리드리히 비크의 딸 클라라와의 연애 스토리는 소설이나 영화로 만들어도 남을 정도로 재미있는데, 특히 클라라를 놓고 슈만과 프리드리히 비크가 벌인 대결 구도는 일품(???)이다. (실제로 클라라를 주연으로 한 '더 유러피언즈' 라는 영화가 나온 적이 있다.)
물론 이렇게 어렵사리 결혼에 골인한 두 커플이었지만, 결혼 후에는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로베르트의 정신 질환이었는데, 결국 그 병이 화근이 되어 불과 46세에 사망하면서 클라라는 40도 안된 나이에 미망인이 되어 버렸다. 물론 로베르트가 인정한 신진 음악인이었던 브람스와의 우정어린 스토리가 있기는 하지만, 재혼도 하지 않은 채 '클라라 슈만(Clara Schumann, 1819-1896)' 이라는 이름을 묘비에 남겼다.
이렇게 로베르트와 클라라 슈만은 서양 음악사에서 부부가 동시에 올라와 있는 드문 케이스지만, 그 동안 각광을 받고 높이 평가받은 사람은 남편 로베르트였다. 클라라는 기껏해야 '작곡을 취미삼아 즐겼던 피아니스트' 정도로 서술되었고, 그나마 그 '취미삼아 했다는' 작품들은 거의 무시되기 일쑤였다.
물론 그렇게 무시되는 데에는 서양 사회의 '남성 우월주의' 라는 사회학 해석도 있겠지만, 둘의 작품을 놓고 보면 그 공적과 기여도에 있어 로베르트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는 주장에는 동의하는 바이다. 그리고 그 둘의 작품을 동시에 담은, 대단히 이색적인 기획의 음반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현재 헨레,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 페터스 등 독일 출판사에서 다시금 출판되고 있는 클라라 슈만의 작품은 대부분 피아노곡과 피아노 반주의 가곡 등이 차지하고 있다. 클라라가 주로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다는 점이 반영되었던 것인데, 불과 열네 살 때 작곡에 착수했다는 피아노 협주곡이 최근 화제를 모으고 있다.
클라라의 협주곡은 이미 피아니스트들의 단골 레퍼토리가 된 남편 로베르트의 것과 많은 점에서 닮았는데, 우선 시작 단계에서 두 곡 모두 단악장의 콘체르트슈튀크(클라라) 혹은 환상곡(로베르트)으로 기획되었다가 3악장의 고전적인 형식으로 확대되었음을 들 수 있다. 조성(key)도 두 곡 모두 A단조다.
또 두 곡 모두 2악장에서 첼로가 피아노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클라라의 작품에서 로베르트가 벤치마킹한 것으로 파악된다. 물론 클라라는 첼로를 독주(솔로)로, 로베르트는 총주(투티)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지만.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의 3악장에서 나오는 첼로 독주도 이에 기인한 것일 지도 모른다. (여담으로, 클라라의 협주곡 3악장은 로베르트가 관현악 편곡을 해주었다.)
하지만 곡 자체의 성격은 굉장히 다르다. 로베르트의 곡에서는 로베르트 자신의 주장이 강하게 피력되어 그의 여타 피아노곡들처럼 다루기 까다로운 거장풍의 것이 된 데 비해, 클라라의 것은 누군가가 지적했듯 초기 쇼팽의 스타일에 더 가깝다. 그리고 슈베르트의 피아노곡에서 받은 영향도 있고, 당대의 '이국 취미' 중 하나였던 폴로네즈가 3악장에서 쓰인 것도 그녀의 개성 보다는 당대의 관습과 취미 등 외부 요인에서 기인한 요소들로 보여진다.
난폭하게 정리하자면, 클라라의 작품은 (아마 당대에 연주되었다면) 로베르트의 것 보다는 청중들과 연주자들 모두에게 더 인기가 있었을 유형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당대에 인기가 있었던 작품들 중 지금까지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은 드문데, 청중들의 취향이 후기 낭만과 현대로 오면서 한결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클라라의 곡은 시대상을 충실히 반영했지만, 그녀의 개성과 혁신이라는 면모가 부족하다는 점에서 그 '잊혀짐' 의 원인을 찾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겨진다.
물론 사람이라는 동물은 여러 가지 가십과 소문에 솔깃해져 그런 것들을 구해 듣는 본성이 자리잡고 있는데, 내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이 곡을 처음 접한 것은 음반이 아니라 악보였는데, 대한음악사 예술의 전당점에 브루크너 교향곡 5번 악보를 사러 갔다가 미니어처 악보가 꽂혀 있는 곳에서 처음 접했다. 하지만 최근의 개정판이라 그런지 미니어처라도 22000원 이상의 고가라서 사오지는 못했다.
그리고 오늘 사들고 온 음반이 바로 클라라와 로베르트 부부의 피아노 협주곡을 한 장에 담은 CD였다. 마르가리타 회엔리더의 독주와 요하네스 빌트너 지휘의 베스트팔렌 신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였는데, 국내에 들어온 클라라의 협주곡 음반으로는 현재 유일한 것이다.
사실 회엔리더 보다는 빌트너의 이름이 사는 데 영향을 미쳤다. 나는 빌트너를 중학교 시절 3000원짜리 초염가 레이블 '도나우' 의 지휘자로서 처음 접했고, 그 때 슈베르트의 교향곡 9번 '그레이트 마징가' 를 비롯한 곡들을 마찬가지로 처음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빌트너의 이름은 여전히 내 머릿 속에서 '값싼 레이블의 2류 연주가' 정도로 치부되고 있었다.
하지만 빌트너가 어느 덧 중견 지휘자가 되고, 낙소스에서 게오르크 틴트너가 이루지 못한 브루크너 사이클의 남은 부분들-9번의 4악장 완성판과 3번의 1877/1889 두 버전-을 땜빵할 정도가 되면서 과거의 평가가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 앨범이 메이저 업계인 RCA 레이블로 나온 것도 구매욕을 자극했다.
앨범에는 재평가를 바라는 듯 클라라의 곡이 먼저 실려 있었다. 20분 남짓한 클라라의 협주곡은 위에 쓴 대로 '역사적인 가치는 없을' 지언정, 들어서 따분하고 졸릴 작품은 아니었다. 물론 들으면서 스포찌라시 식의 경망스러운 감정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음악 자체로 따져 봤을 때도 꽤 재미있었다. 'maestoso(장엄하게)' 라는 표정 기호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아기자기한 맛이 주종인 1악장도 괜찮았고, 끝까지 가벼운 느낌을 유지하면서 원조로 밀고 나가는 것도 비극적이기 보다는 새침하고 산뜻한 맛이었다.
클라라가 남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장 작곡가는 되지 못할 지언정,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 을 발굴하고 듣는 기쁨까지 앗아가지는 못한 셈이다. 더불어 그녀가 계속 작곡을 했더라면 이것 보다는 더 질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었을 것이라는 덧없는 추측도 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이 수록된 로베르트의 것은 이미 수많은 명연과 명반이 자리잡고 있고, 그러한 음반들의 카리스마에는 밀리는 구석이 있어도 꽤 믿을 만한 수연이라는 것도 강조하고 싶다. 힘과 스케일 보다는 또랑또랑한 소리와 터치를 구사하는 회엔리더와, 바이올리니스트 출신인 빌트너가 스트링의 표현력을 중심으로 풀어내는 연주는 클라라의 곡에서 보여준 명쾌한 맛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어서, 발터 기제킹+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류의 히스테리컬한 연주와 극점에 있는 것도 흥미로웠다.
*또 덧붙일 것이 있는데, 이 앨범을 구매하면 '독일 뇌졸중 구호 재단(Stiftung Deutsche Schlaganfall Hilfe)' 에 판매 수익의 일부가 기부된다고 적혀 있다. 돕고 싶은 사람은 구매해도 무방할 듯. 아니, 음악을 듣고 싶으면 음반을 사는 기본적인 문화부터 이 땅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라도 웬만하면 살 것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