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나먼정글 잡설록

블로그 이미지
말 그대로 잡설록 (공지 필독!!!)
by 머나먼정글
  • Total hit
  • Today hit
  • Yesterday hit


ⓟ 2003 HNH International Ltd.

지금은 사라져 버렸지만, 일신서적 문고판에는 (일본인이 쓴 것을 숨기려고 노력했지만 곳곳에서 뽀록났던) 네 권의 '명곡 해설집' 이 있었다. 교향곡-관현악(피아노 외의 협주곡 포함)-피아노-바로크로 분류되어 있었고, 소개되어 있는 음반들이 모두 LP였음에도 불구하고 꽤 오랫동안 내 음반 수집의 지침서 역할을 했다.

교향곡 편은 하이든의 교향곡 45번 '고별' 로 시작해 메시앙의 '투랑갈릴라 교향곡' 으로 끝났는데, 물론 큰 줄기는 독일/오스트리아 작곡가들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교향곡의 프로페셔널이 아닌 사람들의 작품도 소개되어 있는데, 비제가 그 대표적인 케이스였다. 하지만 너무 무리해서 집어넣은 선곡도 있기는 있었다.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 하면 흔히 피아니스트들이 두려워 하는 작곡가들 중 한 사람이다. 물론 당대의 최고 기교파였던 리스트처럼 음표가 정신없을 정도로 쏟아지는 타입은 아니지만, 슈만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슈만 특유의 미묘한 정서 파악이 요구된다는 점에서다. 무명지를 다칠 정도로 연습에 몰두한 일화도 있는, 당시 피아노로 표현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영역을 탐구한 작곡가다운 난관인 셈이다.

문제는, 슈만이 다른 장르의 곡들도 종종 피아노곡을 다루듯이 써냈다는 점이다. 특히 교향곡 영역의 경우에는 지금까지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피아노라면 잘 훈련된 한 손만으로 가능한 아르페지오(펼침화음)를 바이올린 뿐 아니라 모든 스트링 파트에 요구하기도 했고, 피아노로는 잘 울리는 화음이지만 관현악으로 울렸을 때 빈 소리가 나는 오케스트레이션이 항상 문제가 되고 있다.

위의 책에서는 슈만의 교향곡 전곡(네 곡)을 다루었지만, 실제로 오늘날 연주회장에서 슈만 교향곡을 듣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만약 한다고 해도 스트링 주자들은 연습 때마다 볼멘소리를 늘어놓을 것이고, 지휘자는 관현악 상의 결함을 카리스마와 열정 등 모든 정력을 동원해서 은폐시켜야 한다. 지휘자 겸 작곡가였던 말러는 아예 슈만 교향곡 전곡을 새롭게 관현악 편곡하기까지 했고, 이렇게 편곡된 1번 '봄' 의 경우 지난번 알도 체카토의 지휘로 KBS 교향악단이 연주하기도 했다.

슈만의 네 교향곡 중 가장 인기가 없는 곡을 꼽으라면 단연 2번이 앞선다. 신혼의 기쁨이 넘쳐나는 1번, 베토벤이 세 번째 교향곡에 쓴 이래로 '영웅 조성' 이 되어 버린 E플랫장조의 3번 '라인', 전곡이 환상적으로 묶여 있는 4번에 비하면 2번은 이렇다할 개성이 없어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2번의 경우에는 위의 해설집에 있는 표현을 빌리자면 '고뇌와 투쟁의 겨울 교향곡' 이라고 하고 있다. 실제로 이 곡을 쓸 무렵 슈만은 죽을 때까지 자신을 괴롭힐 정신병의 징후를 나타내고 있었고, 스스로도 베토벤 스타일의 '투쟁과 승리' 도식의 대규모 작품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이 곡은 슈만의 교향곡들 중 가장 에너지가 넘치는 작품이 되었지만, 곡이 에너지 만으로 굴러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2번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의 공통분모로 '멜로디가 귀에 잘 받지 않는다' 라는 불만이 있다. 비슷한 성격의 4번 교향곡에서는 조금씩이라도 나타나는 '성악풍 선율' 이 이 곡에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인데, 노래를 좋아한다는 한국 사람들의 일반적 정서에 미치지 못함은 사실인 것 같다. 특히 스케르초인 2악장은 전곡에서 가장 피아노 스타일에 걸맞게 써낸 탓에, 아르페지오를 계속 연주해야 하는 바이올린 파트 주자들에게는 상당히 짜증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때문에 이 곡은 내게 지나칠 수 없는 곡이 되었다. 성악적 선율이 부족하다고 하면, 그 말은 반대로 '전곡이 기악에 걸맞는 구상과 재료로 되어 있다' 고도 할 수 있다. 흥얼거릴 만한 대목은 없지만, 기악적인 악상들이 맞부딪히거나 얽혀가면서 나타나는 묘미를 맛볼 수 있다면 듣는 재미가 나름대로 쏠쏠하다. 물론 글라주노프가 간단하게 지적했던 오케스트레이션 등의 결함은 이 곡에서도 영원한 과제가 되기는 했지만.

이 곡을 처음 들었던 것은 주세페 시노폴리가 빈 필을 지휘한 음반(DG)이었다. 카세트 테이프로 가지고 있었는데, 시노폴리가 남긴 슈만 교향곡 녹음 중 가장 뛰어났다고 평가되는 것이다. 하지만 1998년 도이체 그라모폰 창립 100주년 기념 세트에 한 번 끼워져 나온 뒤로는 감감무소식이었고, 테이프는 동기에게 그냥 줘버려서 대용품이라도 찾아야 할 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고 있던 '틴트너 메모리얼 에디션' 이 국내에 풀리기 시작했고, 3집에 이 곡이 들어 있었다. 음원 자체는 이미 저용량 wm파일로 듣고 있었는데, 시노폴리만큼 불타오르는 맛은 덜했지만 균형 감각은 한 수 위였다. 게다가 흐름을 표현하기가 참 미묘한 3악장은 오히려 틴트너의 승리였다. 그리고 적재적소에 찔러주는 강약 대비도 좋았고, 거기에 연주 시작 전의 해설까지 들어 있었다. (물론 영어라서 아직도 뜻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틴트너의 것을 연주 대 가격비(비싸봤자 6500원) 등의 강력한 메리트도 있고 해서 추천하고 싶다. 물론 보편적인 레퍼런스가 되어 있는 볼프강 자발리슈와 드레스덴 국립 관현악단의 전곡 녹음(EMI)의 가치도 아직 유효하다고 하는데,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슈만의 작품은 기교가 뒷받침되어 있다고 해도 거기에 숨은 내면의 목소리를 찾기는 대단히 어려운데, 이를 극복할 만한 대가들이 요즘은 별로 없는 것 같아서 아쉬울 따름이다.
AND

ARTICLE CATEGORY

분류 전체보기 (862)
[필독] 공지사항 (1)
음악잡설 (414)
만화잡설 (103)
사회잡설 (47)
식충잡설 (202)
그외잡설 (94)

RECENT ARTICLE

RECENT COMMENT

RECENT TRACKBACK

CALENDAR

«   2025/06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