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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잡설록 (공지 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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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 HNH International Ltd.

나치 집권 후 독일을 떠나야 했던 많은 유태계 음악가들이 망명지로 택한 곳은 바로 미국이었다. 당시 재즈 등을 빼면 그다지 별 볼일 없던 미국 음악계는 이러한 대규모 망명 대열 때문에 말 그대로 '땡잡은' 것이었다. 국외자인 이들이 미국 땅에서 벌인 활동 덕에 2차대전 후 미국인 음악가들이 모든 장르에서 득세하게 되었다고 해도 빈말이 아니다.

하지만 모두가 미국으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애매하게 프랑스나 체코, 네덜란드 등을 망명지로 정했다가 이들 나라가 독일군에 점령된 뒤 강제수용소에서 죽거나 쇠약해진 사람들도 있고, 음악의 변방지 국가로 갔다가 평생 동안 '2류' 라는 딱지를 달고 살아야 했던 사람들도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에는 게오르크 틴트너(Georg Tintner, 1917-1999)를 빼놓을 수 없다. 지금도 음악의 도시라는 긍지를 지닌 오스트리아 빈 출신이었고, 빈 소년 합창단 단원으로 음악 생활을 시작한 인물이다. 게다가 천부적인 재능도 있어서 불과 19세 때 빈 국민오페라단(Volksoper)의 부지휘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1938년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강제로 합방하면서 유태계였던 틴트너는 하루 아침에 일자리를 잃었고, 동시에 목숨까지 위태롭게 되었다. 합방 뒤의 오스트리아에서는 유태인들을 거리로 내몰아 맨손으로 길바닥을 쓸게 하는 등 온갖 모욕이 자행되고 있었고, 틴트너는 망명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망명지로 택한 곳은 멀고도 먼 뉴질랜드였다.

지금도 뉴질랜드는 관광지나 휴양지 등으로 유명하지, 음악 부국이라고는 부를 수 없는 형편인 곳이다. 비단 뉴질랜드가 아니더라도, 틴트너가 주로 활동한 곳이 남아프리카공화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등지였으므로 그가 국제적 명성을 쌓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것으로 만족하고 끝까지 그 길을 걸었고, 그 결실은 만년에 낙소스라는 음반사와의 만남으로 절정에 달했다.

낙소스 사장인 클라우스 하이만은 틴트너에게 '브루크너 교향곡과 종교 음악의 모든 판본을 녹음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라는, 지금까지 어느 메이저 업계에서도 시도하지 못한 프로젝트를 제안했었다. 이 프로젝트는 일단 한 곡당 판본 하나 씩 해서 11곡의 전곡 녹음(+4번과 3번의 단악장 하나씩 추가)으로 그쳤지만,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숨어있던 브루크너를 찾았다' 라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었다.

틴트너가 악성 종양과 투병하다가 1999년 캐나다 노바 스코샤의 아파트에서 자살하면서 저 프로젝트도 끝났고, 동시에 그는 신화가 되었다. 그리고 낙소스는 자신들의 프로젝트와 별도로 틴트너 생전에 다른 음반사에서 남긴 녹음들과 실황 녹음들을 모아 12장의 '틴트너 메모리얼 에디션' 을 기획했고, 현재 모두 열 종류가 출반되어 있다.

하지만 저 시리즈의 발매는 틴트너의 활동 무대였거나, 그에게 비상한 관심을 보였던 나라들인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일본, 뉴질랜드와 미국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국내에 들어올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낙소스가 예전에 홈페이지에서 제공했던 저용량 wm 파일로만 들었을 때에도 나는 저 에디션이 단순히 값어치로 따지기는 힘들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가 연주회 직전 청중들에게 연주곡을 설명하는 트랙과, 첨삭을 예삿일로 여기던 옛날 부터의 관행을 일체 배제하는 타협 없는 자세가 그대로 들어 있는 것 만으로도 이 에디션의 가치는 큰 것이었다.

놀랍게도 그 에디션 중 한 장이 국내에 정식 수입되었다. 시리즈 번호로 6집에 속하며, 베토벤 교향곡 3번과 시벨리우스 교향곡 7번이 들어 있다. 시간 관계상 그 동안 포함되어 왔던 해설 트랙은 없었고, 그가 말년을 함께 보낸 심포니 노바 스코샤가 연주한 것이었다. 시벨리우스의 경우에는 그가 타계하기 9개월 전의 녹음이라 그의 '유언' 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번에도 틴트너는 그가 쭉 고수해 왔던 관현악 배치법을 보여주었고-그는 일종의 스테레오 효과를 살리기 위해 바이올린 두 그룹을 각각 왼쪽과 오른쪽에 배치하는 옛 스타일을 고집했음-, 특히 베토벤의 경우 한스 폰 뷜로 이래 거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진 1악장 마지막의 트럼펫 첨삭을 완전히 배제해 버렸다.

트럼펫 첨삭이 배제된 녹음은 그리 많지 않은데, 내가 직접 들어본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물론 곡에 따라서는 첨삭이나 개작도 나쁠 것 없다고 생각하는 터라, 마지막에 터져 나오는 영웅적인 주제가 갑자기 주저앉아 버린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이것도 그 나름대로의 상징성-나폴레옹에게 헌정되려 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엿먹이기성 의도도 있었을 듯 하다-을 부여해 보면 수긍이 가기도 한다.

문제는 관현악. 틴트너는 낙소스와 계약한 뒤에도 음반사의 저예산 정책 때문에 메이저 악단을 지휘해 녹음할 기회가 없었다. 위의 브루크너 교향곡 전집만 해도 로열 스코티시 내셔널 오케스트라, 뉴질랜드 교향악단, 아일랜드 국립 교향악단과 녹음되었고, 이들 악단은 브루크너 연주 경험이 아예 또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곳곳에서 헛점을 보이기도 했던 것이었다. 지휘자는 일류였을지 몰라도, 관현악단이 받쳐주지 못해 '최고의 명반' 에서는 항상 떨어져 버린 것도 사실이었다.

핼리팩스는 대서양에 면한 비교적 소규모의 캐나다 도시로, 이 도시의 관현악단인 심포니 노바 스코샤도 정단원은 40여 명에 불과하다. 이 적은 인원 만으로 연주회를 열어야 했으니, 말러나 브루크너 같은 경우에는 매우 연주가 뜸했을 것이다. 에디션에 사용된 심포니 노바 스코샤의 연주곡들이 대부분 2관 편성에 그치는 것은 그 증거다.

틴트너가 몬트리올이나 토론토의 교향악단 지휘자였다면 하는 후회가 끊임없이 남는데, 대규모 레퍼토리의 경우에는 차후에 캐나다 국립 청소년 관현악단과 연주한 실황이 두 종류 발매된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부족함은 어쩔 수 없는데, 가끔 영국에서 객원 지휘도 했다는 이력을 보면 BBC 등에도 녹음이 있을 것으로 추측은 된다.

낙소스 외의 다른 음반사들은 아직까지 틴트너의 '부활 의식' 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 같은데, 한 음반사만이 매달리기에 그의 존재는 너무도 위대하다. 나 자신도 틴트너를 '4인방(푸르트벵글러-바비롤리-아벤트로트-콘드라신)' 의 일원에 편입시키지는 못하더라도, 오이겐 요훔과 함께 매우 선호하는 지휘자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나마 이 메모리얼 에디션의 일부가 정식 수입된 것에 기대를 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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