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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3국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정명훈이 일본의 왕세자 나루히토와 협연했다는 기사를 지하철 아침신문에서 보았다. 신문의 사진에는 좀 긴장된 표정으로 비올라를 켜고 있는 나루히토와, 대조적으로 편안하게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정명훈의 모습이 클로즈업 되어 있었다.

물론 일본의 왕제는 영국 등과 마찬가지로 명목상의 지위에 불과하지만, 2차대전 후 일본을 점령했던 미군정도 그 왕제의 신비와 경외감을 완전히 깨뜨리지는 못했다. 게다가 한때 식민지 신세도 겪은 한반도의 사람들은 그 왕제의 존재 자체를 위협적이라고 느낄 때도 있는 것 같다. 히로히토의 사망 때만 해도 부정적인 여론이 대단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어쨌든 참여하는 사람도 사람이라서 왕세자라는 직함과 신분이라는 것을 파악하게 해준 연주회였는데, 웬만한 개런티는 줘야 초빙할 수 있는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가 참여했다는 것 만으로도 놀랐다. 거기에 정명훈이 특별 예술 고문으로 있는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악장 아라이 에이치가 참여한 것도 그랬고.

하지만 나루히토 왕세자가 이렇게 대가들 사이에서 실내악의 비올라 파트를 연주할 수 있었다는 사실 만으로도, 일본이라는 나라의 음악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다시금 짐작했다. 한 나라의 왕족이라는 특수한 신분도 있겠지만, 교양 수준으로 배운 악기 실력이 이 정도라면 확실히 호기심이 가는 것이다.

물론 아주 예전에 쓴 포스트에 보면 덴마크 국왕이었던 프레데릭 9세가 종종 덴마크 왕립 관현악단과 방송 교향악단을 지휘해 베토벤이나 바그너 같은 본격적인 관현악 작품들을 다룬 예도 있고, 서독 수상이었던 헬무트 슈미트가 크리스토프 에셴바흐, 유스투스 프란츠, 게르하르트 오피츠 등 독일의 내노라하는 피아니스트들과 함께 바흐와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을 녹음한 예도 있다.

한국에도 이러한 예가 물론 있었던 것으로 안다. 전라북도 지사를 지냈던 유종근이 KBS 교향악단을 지휘했고-곡목은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 서곡-, 서울 바로크 합주단과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의 2악장-영화 '엘비라 마디간' 에 쓰여서 유명함-을 무대에서 연주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름이 기억 안나는 어느 정치인도 KBS 교향악단을 지휘해 차이코프스키의 슬라브 행진곡을 선보인 적도 있었다.

물론 호사가들은 이러한 이벤트를 '직권남용', '이미지 관리' 등의 부정적인 시각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화 인프라가 부족한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이러한 예가 자주 나와 주어야 한다는 것이 내 개인적인 견해다. 긍정적인 의미의 '아마추어 정신' 이 배어 있다면 그것이 '거짓말쟁이' 정치인이건 초등학생의 연주건 간에 일단 교양인으로서의 자질을 입증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독일 같은 나라가 음악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몇몇 '스타 플레이어' 들의 활약 때문만은 아니다.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음악이 그들의 생활에 자연스레 녹아들어 있고, 노동자들이라도 합창 모임이나 아마추어 기악 그룹 등에서 자신들의 취미를 즐길 수 있는 여건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다는 것도 중요하다.

한국의 클래식 시장이 위기라고들 하는데, 그것도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다. 음악을 즐길 준비도 되지 않은 학생들을 '과제' 라는 명목 아래 억지로 음악회장에 끌어내고, '다른 애들도 다 배우니까' 라는 이유로 피아노 교습을 시키는 현실에서 대체 무엇을 더 바랄까? 한국에서 음악은 단지 '이해' 아니면 '지식' 일 뿐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국내에도 '매니아' 층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매니아와 초심자 사이의 완충 작용을 하는 일반 감상자나 아마추어 연주자의 존재가 매우 희박한 것이 심각한 문제다. 초심자는 매니아의 엄청난 정보량에 처음부터 기가 죽어버리고, 매니아는 매니아대로 그 틀을 깨지 못하고 자신들만의 세계에 틀어박히는 것에서 이미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나루히토 왕세자의 이번 깜짝 이벤트가 '자기 과시용' 이었다 해도, 이번 연주회 자체가 주는 파동은 '무늬만 전공자' 인 내게도 대단한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어느 정치인이, 어느 경제인이 저런 예술가들과 어울려 기교의 우위 등에 상관없이 멋진 아마추어 정신이 깃든 연주를 해줄 지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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