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은 교향곡의 도시다' 라고 단언한 작곡가가 바로 오스트리아 출신의 작곡가인 에른스트 크셰네크-참고로 말러 교향곡 10번의 1악장을 보필한 사람-였다.
실제로 독일 출신인 베토벤과 브람스도 빈에 도착한 뒤 눌러 살면서 서양 음악사에 남고 있는 불멸의 곡들을 썼고, 모차르트와 하이든도 오스트리아인임을 생각하면 그리 편파적인 말은 아닌 것 같다. 물론 핀란드에는 시벨리우스가, 러시아에는 차이코프스키와 보로딘이, 체코에는 드보르작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 나라는 지금도 교향곡 명곡의 생산 국가로 쭉 이름을 남기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에는 좀 복잡하다. 물론 프랑스가 교향곡 전문 작곡 국가라고 하는 사람은 없지만, 독일/오스트리아계 교향곡이 유럽을 지배하던 와중에도 소량이기는 하지만 끊임없는 창작 활동이 계속되어 온 나라이기도 하다. 베를리오즈, 생상, 댕디, 구노, 랄로, 쇼송과 (벨기에 출신이기는 하지만) 프랑크, 근대의 루셀, 미요와 (역시 스위스 출신이지만) 오네게르, 현대의 메시앙까지 명곡 해설집에서 나름대로 위치를 차지하는 나라가 프랑스다.
생전에 피아니스트로 일했어도 성공했을 사람이 바로 조르주 비제(Georges Bizet, 1838-1875)였다. 하지만 리스트 앞에서도 전혀 주눅들지 않았던 이 소년은 작곡가로 입신할 뜻을 굳혔고, 그 길로 들어서면서 수많은 혹평에 노출되었다. 오페라로 성공하려던 그의 꿈은 무참히 부서져 버렸고, 결국 생전에는 작곡가로서 인정받지도 못한 채로 40대도 안되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나마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된 오페라 '카르멘' 이 타향인 빈에서 공연되면서 갑자기 그의 명성이 확립되었고, 이제는 멀고 먼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도 야외 운동장을 빌려서 공연할 정도가 되었을 정도면 달리 말이 필요 없을 것 같다. 그 외에 몇 곡이 태교 음악으로도 쓰이고, 색소폰이 클래식에도 사용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가장 대표적인 곡인 '아를의 여인' 모음곡도 명곡 소리를 듣고 있다.
하지만 비제가 교향곡을 작곡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아직 파리 음악원에 재학하고 있던 10대 시절에 첫 교향곡을 작곡한 뒤로 생전에 세 곡을 남겼는데, 그 중 2번과 3번은 비제 스스로가 원고를 태워 없애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들을 수 있는 곡은 1번 한 곡 뿐이다.
게다가 그 1번마저도 명곡 해설집의 교향곡편에 등장하는 일이 거의 없다. 지금 가지고 있는 일신서적의 문고판 '교향곡 명곡 해설' 이 내가 본 유일한 예인데, 그 책의 일본인 필자는 이 곡이 소년 시절의 미숙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매력을 느낀 것 같다. 게다가 이 곡을 프로코피에프의 첫 교향곡이 된 '고전 교향곡' 과 비교하고 있기도 하다.
태워 없앤 곡을 비롯해 비제의 교향곡은 작곡자 생전에 출판은 커녕, 연주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후 60년 가까이 잊혀져 있었다. 지휘자인 펠릭스 바인가르트너가 이 곡을 발견하고 스위스의 바젤에서 초연한 것이 1935년의 일이었는데, 2차대전 후부터 각국의 관현악단 연주회에 종종 포함되었다. 하지만 이 곡이 유명해지게 된 계기는 안무가 조지 발란신에 의해서였다. 그가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연출한 '수정궁' 이라는 발레에서 이 곡을 사용한 뒤 '프랑스 교향곡의 사랑스러운 가작' 이라는 평가를 얻게 되었다.
이 곡을 처음 듣게 된 것은 장 마르티농 지휘의 프랑스 국립방송 관현악단 연주(도이체 그라모폰)였다. 부모님이 한 지인으로부터 결혼 기념 선물로 이 레코드를 받으셨는데, 불행히도 어렸던 내가 판을 가지고 장난을 치며 다 긁어놓아 들을 기회도 없었다. CD로 다시 듣게 된 것이 1990년대 후반이었고, 결혼 기념으로 적당한 음반을 선물한 사람의 안목에 감탄했다.
하지만 지금 주로 듣고 있는 것은 마르티농의 것이 아니라, 프랑스 음악과 별로 매칭이 안될 것 같은 영국 지휘자 토머스 비첨의 음반(EMI)이다. 하지만 마르티농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국립방송 관현악단을 지휘했고, 거기에 비첨 자신의 좀 허풍스러우면서도 밝은 유머 감각이 더해져 있다.
ⓟ 2000 EMI Records Ltd.
게다가 비첨이 이 곡을 면밀히 연구한 흔적도 눈에 띄는데, 시골풍 악상으로 진행되는 3악장 트리오(중간부)에서 목관이 연주하는 대선율(2:04~2:09 외)에서 볼 수 있다. 마르티농은 이 대선율을 F장조로 처리했지만, 악보에는 F장조의 유일한 플랫(b)음이 되는 '시' 음에 아무 것도 붙어있지 않다. 비제는 이 선율을 장/단조가 확립되기 이전에 쓰였던 선법(mode)으로 만든 것이었다-'시' 가 플랫이 아니므로 리디아(lydian) 선법으로 볼 수 있다. 세르주 첼리비다케 지휘의 베를린 필 연주(아를레키노 해적반)에서도 리디아 선법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 참고 악보 (빨간 동그라미로 표기한 것이 문제의 '시' 음)
위의 일본인 필자 말마따나, 작곡 기교나 완성도를 따지는 사람들이 패배할 때가 바로 비제의 교향곡 같은 작품들에 직면했을 때가 아닌가 싶다. 이 곡이 음악사의 중요한 페이지를 장식하기는 커녕, 교향곡 명곡의 대열에 들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음악사의 서술과 관계없이 라흐마니노프는 20세기 최후의 낭만주의자로서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고, 비제의 저 곡도 마찬가지다. 대다수 애호가들에게 음악은 학문이 아닌 경험이므로, 특별히 '먹물' 들의 학구적인 대화에 얽매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