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은 딱 아홉 곡의 교향곡을 완성시킨 뒤 세상을 떠났다. 이 때부터 100년도 넘게 서양 음악계에서는 하나의 '징크스' 가 되었는데, 실제로 그의 후배들인 슈베르트, 멘델스존, 슈만, 브루크너, 브람스, 차이코프스키, 드보르작, 그리고 말러도 저 '9' 라는 숫자를 깨지 못한 채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었다. 저 징크스가 깨진 것은 스탈린 사후인 1953년, 쇼스타코비치가 교향곡 10번을 발표하면서였다.
특히 말러(Gustav Mahler, 1860-1911)의 경우는 저 징크스를 깰만한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작곡가였다. 그는 연주 인원이 1000명에 육박해 '천인 교향곡' 이라는 별명도 있는 8번까지를 완성하고 후속 교향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는데, 9번의 징크스를 어떻게든 피해 보려고 아홉 번째 교향곡에는 '대지의 노래(Das Lied von der Erde)' 라는 제목만을 붙였다.
하지만 말러의 의도와는 달리, 저 '대지의 노래' 는 현재 교향곡 보다는 관현악 반주가 붙은 가곡 시리즈라는 인식이 많다. 그리고 열 번째로 착수한 교향곡에는 9번을 붙여 베토벤과 타이 기록을 이루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말러의 건강은 이미 심하게 악화되어 있었고, 열한 번째로 작곡하기 시작한 10번 교향곡은 결국 관현악 편곡까지 완료된 1악장과 3악장 일부를 제외하고는 스케치만이 남은 채로 중단되었다. 그리고 말러는 1911년 생을 마감하고 말았는데, 죽기 전에 부인인 알마에게 스케치를 없애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하지만 알마는 말러가 죽은 뒤에도 그 스케치들을 계속 보관하고 있다가, 사후 10여년이 지난 뒤 작곡가인 에른스트 크셰네크(Ernst Křenek)에게 완성을 의뢰했다. 크셰네크가 보완한 1악장과 3악장-'연옥(Purgatorio)' 이라는 제목이 있음-은 1924년 빈에서 프란츠 샬크의 지휘로 초연되었는데, 오히려 지휘자 브루노 발터, 음악학자/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 음악학자 에어빈 라츠 등에 의해 비판을 받았다.
알마가 말러의 유언과 달리 스케치를 파기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불완전한 자료에 타인의 손을 빌어 완성시킨다는 행위는 '원작 침해' 에 해당한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알마는 그러한 비판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던 듯하고, 이어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와 아르놀트 쇤베르크 등 다른 작곡가들에게도 계속 완성을 의뢰했다. (하지만 두 작곡가에게는 보기좋게 거절당했다.)
하지만 2차대전 뒤 10번의 완성 작업이 곳곳에서 시도되기 시작했고, 미국의 클린턴 카펜터(Clinton Carpenter, 1949년 초판 완성), 영국의 조셉 휠러(Joseph Wheeler, 1955년 초판 완성)와 데릭 쿡(Deryck Cooke, 1964년 초판 완성), 독일의 한스 볼슐레거(Hans Wollschläger) 등이 각각 그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알마는 또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렇게 열성을 보였던 10번의 보완 작업에 반대하고 나섰다.
또 알마의 변심 이전에도 줄곧 10번의 완성 작업에 비판적이었던 브루노 발터, 야샤 호렌슈타인, 존 바비롤리, 라파엘 쿠벨릭, 레너드 번스타인, 게오르그 솔티,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클라우디오 아바도 등의 지휘자들도 반대 혹은 무시라는 입장을 표명했고, 또 표명하고 있다.
알마를 설득하는 일은 위의 인물들 중 데릭 쿡에게 맡겨졌고, 쿡은 로버트 심슨 등의 권유에 힘입어 알마가 공개한 최소한의 자료들만으로 10번의 초벌 그림을 그린 뒤, 1960년 베르톨트 골드슈미트가 지휘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BBC에서 방송했다. 방송을 들은 알마는 쿡의 보완 작업에 필요한 스케치 전부를 지원해 주기로 또다시 마음을 바꾸었고, 쿡은 그 첫 성과물인 '연주회용 판본' 을 1964년에 역시 골드슈미트 지휘의 런던 교향악단 연주로 공개했다.
쿡의 첫 판본은 유진 오먼디 지휘의 필라델피아 관현악단이 녹음(CBS/소니)하는 등 음악계에서 여론을 불러 일으키는데 성공했다. 또 1964년에 알마의 사망에 힘입어(???) 쿡 외의 '비공인 완성자' 들이었던 휠러와 카펜터의 판본도 이듬해부터 초연과 완성, 출판을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휠러, 카펜터와 마찬가지로 쿡도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었고, 콜린/데이비드 매튜스 형제의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들은 쿡의 관현악 편곡 작업에서 말러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간 대목이 많다고 지적했고, 쿡은 이들을 개정 작업에 참여시켜 두 번째 연주회용 판본을 1972년에 선보였다. 두 번째 판본은 초연자들인 윈 모리스 지휘의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에 의해 녹음(필립스)되었고, 볼슐레거는 쿡의 연구 성과를 인정하며 자신의 개정 작업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위의 세 명 외에 다른 사람들까지도 완성 작업에 가담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상태였던 미국의 음악학자 레모 마체티 2세(Remo Mazzetti, Jr.)는 쿡, 휠러와 카펜터의 판본들을 검토하면서 자신만의 연주회용 판본을 만들었다. 2001년에는 또 러시아 출신 지휘자 루돌프 바르샤이(Rudolf Barshai)가 만든 바르샤이 판본과 이탈리아 음악학자/작곡가인 니콜라 사말레(Nicola Samale)+주세페 마추카(Giuseppe Mazzuca)가 만든 사말레-마추카 판본이 각각 선보였다.
작곡자 말러는 몇십년 전에, 그리고 미망인 말러도 마찬가지로 수십년 전에 타계한 데다가 국제 말러 협회와 개정에 반대한 사람들의 태클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음악학자들의 열정 때문인지 저마다 완성한 판본은 계속 다채로워지고 있다. 물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리고 위의 판본들도 각 연구자의 노력 여부와 관계 없이 '짝퉁' 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완성에 참가한 음악학자들은 빠져나갈 구멍을 하나 만들어 놓았고, 그것이 지금도 저 완성본에 손을 대는 지휘자나 관현악단의 변명 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적어도 그들은 자신이 작품을 '완성한' 것이 아니라, 단지 '연주가 가능한' 판본을 만든 것 뿐이라는 것이다. 선택은 결국 청중들에게 맡겨지는 것이다.
하지만 말러의 경우에는, 다른 미완성 작품들과는 좀 사정이 다르다는 것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말러는 조잡한 뼈대나마 모두 완성을 시키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완성 작업을 시도한 사람들이 다른 작품보다는 훨씬 많은 힌트를 제공받았다는 점이다. 말러의 10번 교향곡 스케치는 4단의 축약보에 다섯 개 악장 모두 기보되어 있었고, 음악학자들은 거기에 관현악 편곡이라는 살붙이기 작업을 하는 것으로 역할이 고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느 누구도 10번 교향곡과 관련된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는 없다. 그리고 나도 나름대로의 생각을 얻기 위해 얼마 전 돈을 들여서 윈 모리스 지휘의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연주로 쿡 2판의 첫 녹음이 담긴 CD를 샀다. 필립스가 CD화를 포기했는지 Scribendum이라는 마이너 레이블에서 나왔는데, 8번 교향곡과 같이 담긴 CD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이 세 장짜리 세트인 줄은 몰랐다.
결국 "5만원 넘는데, 사시겠어요?" 라는 비장한 질문(???)까지 받고서야 부들부들 떨면서 돈을 지불할 수 있었다. 솔직히 쿡 판본이라면 쿠르트 잔데를링과 사이먼 래틀, 리카르도 샤이 등이 연주한 한 장짜리 CD를 사는 것이 경제성이나 연주의 완성도에서는 훨씬 유리했다. 하지만 굳이 저 옛날 연주를 고집한 것은, 예전에 중고 LP로 접하고 사려 했다가 누군가가 집어가는 바람에 놓쳤던 것과 '쿡 2판의 최초 녹음' 이라는 역사적 사실 때문이었다.
그리고 들어본 결과...
말러의 스케치에 누군가의 손이 가해진 것은 내심 못마땅하기는 하지만, 말러의 의도 자체는 그다지 훼손되지 않았다는 것에 잠정 결론이 내려졌다. 물론 100% 인정이라는 것은 애당초부터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억지 수치상으로 따져 본다면 70% 쯤은 인정해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음반으로서는 꽤 돈이 많이 들고, 위에 쓴 대로 연주도 래틀이나 샤이의 것보다 떨어진다는 중평이 있기 때문에 권하기는 좀 그렇다는 것도 솔직한 심정이다. 그냥 10번만 2 for 1으로 발매했다면 좋았으련만. ;w;
*10번 교향곡 완성본들에 대한 더 자세한 자료. 하지만 영어와 PDF의 장렬한 압박.
http://mahlerarchives.net/archives/chewM10.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