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많은 악상 기호-pp, ff, cresc., non troppo 등등-들은 이탈리아어를 기초로 하고 있다. 베토벤도 후기 작품의 몇몇 예외를 빼면 항상 이탈리아어로 된 악상 기호를 붙였고, 브람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빠르기나 표현 등을 나타내는 단어들-예로 알레그로 콘 브리오(힘차고 빠르게)나 아다지오 칸타빌레(느리게 노래하듯이)-을 자국어로 쓰는 것이 대략 슈만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로베르트 슈만의 교향곡 중 1번과 2번의 빠르기와 표정 기호는 이탈리아어로 쓰여져 있지만, 3번부터는 Lebhaft(활기차게)라고 씌여 있는 1악장을 보게 된다.
사회학과 연계한 연구 자료가 있으면 좋겠는데, 개인적으로도 저러한 흐름은 민족주의와 어느 정도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자문화에 관해 대단히 자존심이 높은 프랑스에서도 19세기 중엽부터 마찬가지로 빠르기나 감정 표현 기호를 자국어로 쓰기 시작했다.
물론 자국어로 쓰는 것이 해당 국가의 작곡가나 연주자들에게는 훨씬 쉽겠지만, 한국같이 몇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나라의 음악인들이라면 읽는 데서부터 좀 난감한 경우가 많다. 따로 프랑스어나 독일어를 배워야 하는 형편이니. 개인적으로도 안톤 브루크너나 구스타프 말러의 악보들을 보면서 머리에 쥐가 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하지만 언어가 같은 나라라도 충분히 '대박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나치의 유태인 탄압 덕분에 10년도 넘게 악보를 열람하는 것 조차 금지되었던 말러의 작품이 독일에서 연주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시행 착오가 뒤따라야 했다.
세계 최강의 관현악단 중 하나인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Berliner Philharmoniker)가 2차대전 후 처음 말러 교향곡을 연주하게 된 것은 자국인의 지휘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오스트리아인 음악 감독 카라얀의 지휘도 아니었다. 영국 지휘자 존 바비롤리(John Barbirolli)가 1960년대 중반부터 베를린 필을 객원으로 지휘하기 시작했을 때에야 말러 교향곡이 프로그램에 오르기 시작했다.
바비롤리는 해마다 말러 교향곡을 꼭 객원 프로그램에 포함시켰고, 그 중 9번의 경우에는 베를린 필 단원들이 만장일치로 녹음을 하자고 해서 EMI를 통해 음반이 만들어져서 유명하다. 그 외에도 2, 3, 6번 등의 다른 교향곡들이 연주회를 통해 소개되었고, 이 실황들은 영국의 복각 전문업체 테스타먼트(Testament)에서 CD로 나오고 있다.
하지만 베를린 필이라고 늘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처음 연주하는 곡이라면 또 문제가 달라진다. 3번 교향곡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기량이 처지던 영국 지방 관현악단인 할레 관현악단의 것보다도 연주가 좋지 않다고 하며, 지금부터 본론으로 들어갈 6번 교향곡에서는 거의 '코미디' 가 연출되어 버렸다고 한다.
6번 교향곡은 흔히 '비극적(Tragische Sinfonie)' 이라고 불리는데, 실제로 말러의 교향곡들 중 가장 처절하고 기복이 심한 곡인 데다가, 마지막 4악장에서는 망치가 (최소한 두 번) 클라이맥스에서 내려쳐지는 등 그 효과가 대단한 곡이다. 망치는 곡에서 희망을 부숴버리면서 비극적인 결말로 치닫게 하기 때문에, 예전부터 말러 자신의 복잡한 가정 사정과 인생관이 반영된 게 아니냐는 해석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저 교향곡을 연주할 때면 항상 '망치' 가 이슈가 되곤 한다. 말러는 망치 하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쇠망치를 쓰지 말라고(nicht metallischem Charakter) 악보에 지시해 놓았다. (보통 떡칠 때 쓰는 거대한 나무 망치를 특별히 준비한 나무 판자에 힘껏 내려친다.) 그러면 바비롤리와 베를린 필의 6번 연주에서는?
독일어에 서툰 영국인 바비롤리가 악보를 잘못 읽었는지, 아니면 베를린 필의 타악기 주자가 건성으로 읽었는지는 모르지만 4악장 클라이맥스에서 큰 소리로 울린 것은 다름아닌 '쇠망치' 였다. 악극 '지크프리트' 에서 타이틀 롤에게 쇠망치를 두드리면서 노래하라고 지시한 바그너라면 좋아했겠지만, 말러는 아마 특유의 신경질을 부리며 욕을 해댔을 것이었다.
베를린 필이 6번 교향곡을 자신들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연주한 것이 1966년이었고, 바비롤리가 정식으로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것(EMI)이 1년 뒤인 1967년이었다. EMI의 녹음은 아직도 그 느린 템포 때문에 호불호가 갈리는 논쟁반이지만, 그래도 1966년 베를린 필 연주의 모호함과 어색함에서는 확실히 탈피했음이 틀림 없다.
바비롤리는 다행히 1년 뒤의 스튜디오 세션에서는 나무 망치를 사용했는데, 테스타먼트가 '쇠망치의 코미디' 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필 실황을 내놓은 것은 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될 지 모르겠다. 설마 '희극적(Komische Sinfonie)' 이라고 새로 부제를 붙이고 싶어서?
어쨌든 개인적으로는, 테스타먼트가 발매하는 바비롤리/베를린 필 콤비의 말러 라이브 중에서 가장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2번 밖에는 없어 보인다. 말러 선구자들 치고는 그 '담백함' 때문에 자주 평가절하되는 것이 바비롤리의 연주지만, 굳이 시행 착오의 실패까지 음반으로 만나는 것도 그다지 기분 좋은 경험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