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토벤에 관해 다룬 서적 중 메이너드 솔로몬이라는 사람이 쓴 '베토벤-윤리적 미 또는 승화된 에로스' 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는 '과천연구실' 이라는 모임의 멤버가 한국어로 번역해 놓았다.
베토벤의 음악을 변증법 혹은 유토피아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하고자 한 시도인 것 같았는데, 번역자가 음악 전공이 아니어서 그런지 종종 어설픈 대목이 나오고 있다. 게다가 솔로몬의 번역본 뒤에는 꽤나 골치아픈 '포스트구조주의 비판' 이라는 번역자의 글이 이어지는데, 왠지 주객전도가 된 느낌도 있었다.
물론 베토벤이 귀족이나 왕족의 '어용' 작곡가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당대의 보기 드문 '개인주의자' 였고, 프랑스 혁명의 강렬한 영향을 받은 공화주의자였으며, 범신론자에 공상적 사회주의까지 생각을 넓힌 인물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귀족들의 후원으로 지급된 연금을 평생동안 받았고, '웰링턴의 승리' 같은, 당시 정세에 발맞추려다가 스텝이 엉킨 괴작도 만들었으며, 사생활에 있어서의 난잡함과 괴팍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솔로몬은 위의 책에서 당연히 '웰링턴의 승리' 뿐 아니라 극음악 '슈테판 왕' 과 '아테네의 폐허', 초기의 많은 춤곡이나 군악대용 행진곡, 민요 편곡 같은 소위 '접대용' 혹은 '생계 유지용' 작품들은 제대로 다루지 않고 넘어갔다. 아니, 다룰 수 없었을 것이다. 저 작품들에 지면을 할애하다가는 저술 의도 자체가 틀어졌을 테니까.
실제로 베토벤의 '접대용' 작품들은 현재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민주적인 현대 사회에서 '계몽 군주 만세' 를 외치는 것도 꽤 우스꽝스럽고, 답답한 크리놀린 차림으로 미뉴에트나 콩트르당스, 독일 춤곡 등을 추는 사람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실정이니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저 작품들을 지나치고 과연 베토벤의 인간됨과 음악의 공헌도를 평가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나는 '아니다' 라고 하고 싶다. 오히려 저 작품들은 인간 베토벤을 '신화' 의 자리에서 끌어내려 평가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중요하다.
베토벤의 음악을 변증법 혹은 유토피아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하고자 한 시도인 것 같았는데, 번역자가 음악 전공이 아니어서 그런지 종종 어설픈 대목이 나오고 있다. 게다가 솔로몬의 번역본 뒤에는 꽤나 골치아픈 '포스트구조주의 비판' 이라는 번역자의 글이 이어지는데, 왠지 주객전도가 된 느낌도 있었다.
물론 베토벤이 귀족이나 왕족의 '어용' 작곡가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당대의 보기 드문 '개인주의자' 였고, 프랑스 혁명의 강렬한 영향을 받은 공화주의자였으며, 범신론자에 공상적 사회주의까지 생각을 넓힌 인물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귀족들의 후원으로 지급된 연금을 평생동안 받았고, '웰링턴의 승리' 같은, 당시 정세에 발맞추려다가 스텝이 엉킨 괴작도 만들었으며, 사생활에 있어서의 난잡함과 괴팍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솔로몬은 위의 책에서 당연히 '웰링턴의 승리' 뿐 아니라 극음악 '슈테판 왕' 과 '아테네의 폐허', 초기의 많은 춤곡이나 군악대용 행진곡, 민요 편곡 같은 소위 '접대용' 혹은 '생계 유지용' 작품들은 제대로 다루지 않고 넘어갔다. 아니, 다룰 수 없었을 것이다. 저 작품들에 지면을 할애하다가는 저술 의도 자체가 틀어졌을 테니까.
실제로 베토벤의 '접대용' 작품들은 현재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민주적인 현대 사회에서 '계몽 군주 만세' 를 외치는 것도 꽤 우스꽝스럽고, 답답한 크리놀린 차림으로 미뉴에트나 콩트르당스, 독일 춤곡 등을 추는 사람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실정이니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저 작품들을 지나치고 과연 베토벤의 인간됨과 음악의 공헌도를 평가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나는 '아니다' 라고 하고 싶다. 오히려 저 작품들은 인간 베토벤을 '신화' 의 자리에서 끌어내려 평가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