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중국 혹은 중국계 작곡가의 작품이 한국에서도 종종 연주되고 있다. 올해 내한한 '물의 수난곡' 의 탄 둔을 비롯해서, 비파 협주곡 '난징! 난징!' 의 브라이트 솅 같은 작곡가들의 작품은 언론의 관심을 끈 바 있다. 중국에서는 이미 자국의 음악을 세계 무대로 끌어올릴 계획을 이전부터 세워 왔으며, 지금은 그 결실이 막 생겨나려 하는 시점이다.
위의 작곡가들 이전의 중국 음악-서양식 어법과 악기로 작곡된-은 지난 번 올렸던 발레 모음곡 '백모녀' 와 같은 사회주의 사실주의 흐름을 타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60년대 중반부터 10년 동안이나 지속된 문화대혁명 때문에 저런 작품의 창작까지도 금지되다시피 했기 때문에, 중국 작곡가들이 현대적인 어법을 배우기 까지 오랜 시간과 고통을 견뎌야 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주 지안얼(朱踐耳, 1922-)은 아마 중국의 '현대 음악' 1세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작곡가다. 탼진에서 징족-어업을 생업으로 삼는 중국의 소수 민족-의 후예로 태어났고, 가족이 중국 제 1의 대도시 상하이로 옮겨가면서 그 곳에서 생의 대부분을 보내고 있다.
주 지안얼은 학창 시절부터 독학으로 음악을 배웠고, 1940년부터 노래와 극음악, 관악 작품 등을 쓰기 시작했다. 1949년에는 영화 음악에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1955년 소련 유학의 특전이 주어져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음악원에서 5년 동안 배울 수 있었다. 유학 후에는 다시 상하이의 영화 촬영소와 오페라단에 배속되어 창작 활동을 계속 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인해 다른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주 지안얼도 일시적으로 음악 활동을 중단당했고, 1975년 상하이 교향악단의 전속 작곡가가 되기까지 침묵을 지켰다고 한다. 문화대혁명이 마오쩌둥의 죽음과 4인방의 체포로 막을 내린 후에는 상하이 음악원의 작곡 교수를 겸하면서 현대적인 기법에 의한 창작을 시도하게 되었다.
1981년에 쓴, 문화대혁명 희생자들에 대한 사실상의 추도곡인 '교향 환상곡' 이 중국 교향악 창작 경연대회에서 입상하면서 그 결실을 보게 되었고, 네 곡의 교향곡과 교향 모음곡 '구이저우 산의 소묘들' 같은 작품으로 계속 화제를 모았다. 1990년에는 교향곡 제 4번이 스위스의 마리 호세 여왕 작곡 콩쿨에서 대상을 수상했고, 이듬해에는 상하이 시에서 문예 부문의 공적을 인정해 상패를 수여하기도 했다.
주 지안얼의 작품은 문화대혁명 이전과 이후의 것들이 상당히 판이한 어법으로 작곡되었는데, 마르코 폴로에서 나온 두 장의 CD 중 '축전 서곡(1958)' 과 교향곡 제 1번(1986)이 같이 담긴 것을 들어보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소련 유학 중 작곡되어 볼쇼이 극장 관현악단의 연주로 초연된 '축전 서곡' 은 서양의 고전 소나타 형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쒀나(중국 태평소)의 가락과 중국 타악기의 리듬, 산시성의 서정 민요 등 중국 전통 음악에서 소재를 취하고 있다.
문화대혁명 이전까지는 이렇게 선배 작곡가들의 방식을 따랐던 주 지안얼이었지만, 그 이후에는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겪었던 개인적인 압박과 사회의 파탄을 작품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이는 소련 유학 중 가장 큰 영향을 받았던 쇼스타코비치의 경우와 유사하며, 결과적으로 무거운 내용의 작품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교향곡 제 1번은 작곡된 해 5월에 개최된 '제 12회 상하이의 봄 음악제' 에서 초연되었으며, 작곡 부문 1등상을 수상했다. 1악장의 첫 네 개 음이 전곡을 통일시키고 있는데, 각 악장 별로 느낌표(!), 물음표(?), 말없음표(...)등이 사용되고 있다. 이들 기호들이 각 악장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는데, 느낌표로 표기된 1악장의 경우 클라이맥스에서 오디오 스피커의 저음부가 나가버렸을 정도로(!!) 그 흐름이 과격하다.
2악장의 경우 쇼스타코비치가 썼음직한 냉소와 풍자 위주로 되어 있는데, 기호는 '?!' 이다. 느낌표는 마지막에 타악기의 무자비한 연주와 네 개 음의 광포한 투티로 재현되며, 풍자에 대한 탄압이라는 정치적 메시지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3악장(...)은 전통 교향곡의 아다지오 악장에 해당되는 조용한 곡이다. 하지만 그 긴장감을 잃지는 않고 있고, 오히려 그 적적함이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슬픔과 고통으로까지 다가온다. 후반부에서 팀파니의 난타 솔로가 그 분위기를 다시금 깨버리며, 피아노의 저음 건반을 마구 두들기는 트레몰로의 크레센도로 4악장(!)과 링크된다.
4악장의 말미에는 무언가 희망을 보여주는 악구가 현을 중심으로 잠시 연주되어 일종의 '해피 엔딩' 을 기대하게 하지만, 결국 행진 리듬과 수수께끼같은 정적 속에 파묻히면서 끝을 맺는다. 작품 전체는 쇼스타코비치의 영향을 비롯해 현대적인 창의로 가득차 있지만, 그 저변에 깔린 것은 역시 중국 음악의 요소들이다. 단지 그것이 위의 '축전 서곡' 처럼 전면에 등장하지 않고, 곳곳에 양념처럼 나타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마르코 폴로 레이블의 운명과 함께 저 CD-차오 펑 지휘의 상하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는 한국에서 보기가 매우 힘들어지고 말았다. 단지 호기심으로 산 CD였지만 중국 작품들 중 가장 충격적인 모습으로 다가온 작품이었고,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도 시작된 '표현의 자유' 라는 변화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귀중한 음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