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소련 시절의 대표적인 작곡가였던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말하고, 솔로몬 볼코프가 받아 썼다는 '증언' 이라는 책을 보면 쇼스타코비치가 얼마나 붉은 군대 합창단(Red Army Chorus)을 싫어했는지 알 수 있다. '구역질이 날 지경' 이라고까지 써넣은 것을 보면 말이다. (물론 저 책이 정말 쇼스타코비치의 말을 그대로 담고 있는지에 대한 의혹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문제는, 쇼스타코비치의 생각과 달리 저 합창단이 의외로 이념도 지향도 다른 서방 세계에까지 어필했다는 사실이다. '솔로부대 포스터' 가 D모인사이드 등을 통해 나돌던 시절 BGM으로 자주 등장한 구 소련 국가도 바로 저 합창단이 처음 노래한 것이고, 테트리스의 배경 음악중 하나인 러시아 민요 '칼린카(Kalinka)' 도 서방에서는 붉은 군대 합창단의 노래로 먼저 유명해졌다.
붉은 군대 합창단은 전원 남성으로 구성된 소련군 직속 합창단으로, 발랄라이카(러시아 민속 발현악기)와 바얀(러시아 민속 아코디언)을 추가한 밴드가 으레 반주를 맡기 때문에 서방에서는 'Soviet Army Chorus & Band' 라고 불리기도 한다. 1928년에 모스크바 국립 음악원의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프 교수가 창단한 저 합창단은 1937년 파리 국제 전람회에 참가해 공연예술 부문의 대상을 타면서 서방에 알려졌다.
하지만 그 당시에 서방에서 유통되던 붉은 군대 합창단의 레코드는 극소수였고, 2차대전 후인 1956년에 이들이 첫 서방 여행의 대상국으로 영국을 택하면서 갑자기 붐이 일기 시작했다. 데일리 텔레그래프나 런던 뉴스 크로니클 같은 영국 언론은 물론이고, 뉴스위크 같은 꽤 지명도가 높은 언론들까지 앞다투어 보도했다고 한다.
런던 공연은 단발성이 아니라 8주 동안의 긴 일정으로 시작되었으며, 공연이 계속 인기를 얻자 EMI가 그들의 음반을 만들기 위해 접촉하기 시작했다. 결국 EMI는 그 해 서방 음반사로는 최초로 붉은 군대 합창단의 레코드를 내게 되었다. 이들은 1963년에도 영국을 방문해 연주했고, 이 때도 녹음이 이루어졌다.
EMI의 음반은 1986년에 CD 한 장으로 추려져서 발매되었고(위의 음반 사진), 국내에도 수입되었다. 저 CD는 EMI 한국 지사에서 90년대에 로컬반으로 출반했고, 일본에서는 그보다 이전인 80년대에 도시바 EMI가 마찬가지로 로컬반으로 내놓았던 적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물론 이러한 열풍은 냉전 시대의 산물이라는 느낌을 부정할 수는 없으며, 소련 음악이나 음반은 무조건 수입 금지가 되어 있었던 한국에서까지 '저 음반을 사기 위해 일부러 해외 여행을 가는 사람도 생겼다' 는 이야기도 지금 보면 꽤 오바성이 짙어 보인다.
실제로 붉은 군대 합창단도 마찬가지로 소련 붕괴 후에는 '군기가 빠졌는지' 그다지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하고 있는 데다가, 그 명성을 이용하기 위한 수많은 '짝퉁' 혹은 '유사품' 단체들이 등장해서 헷갈리게 하고 있다.
하지만 50-60년대 서방 사람들의 반응이 솔직히 '과장되었다고' 는 해도, 남성만의 합창이 군대식의 박력과 남성미를 뛰어 넘어 나름대로의 '예술 원칙' 으로 호소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들 덕분에 '볼가의 뱃노래' 나 '홀로 선 자작나무', '페테르스카야 거리를 따라서' 같은 민요는 물론이고, 스탈린 집권 시기의 소련에도 재즈가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청년의 노래(두나예프스키 작곡)' 나 서정 가곡풍인 '멀리서(노소프 작곡)' 같은 현대 소련 노래도 서방에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EMI의 음반에는 영국 청중을 대상으로 한 '티페래리' 같은 1차대전 때 유명했던 영국 군가와 '아녜요, 존!' 같은 잉글랜드 민요, 스코틀랜드 민요인 '애니 로리' 가 수록되어 있는데, 러시아 악센트로 부르는 영어 노래라는 색다른 경험도 할 수 있다.
'공산주의를 없애겠다' 가 모 종교인의 공약으로 남아 있고, 별의별 집회에 '친북 성향' 을 갖다 붙이는 사람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 이상, 붉은 군대 합창단도 결국 공산주의와 함께 사라질 운명이라고 조소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과연 '공산주의' 를 연주했는지 '음악' 을 연주했는지는, 확실히 '들어 봐야' 나름대로의 판단을 내릴 수 있을 터. 지금도 음반은 존재하고 있으니, 그 평가의 기회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