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번에 선정된 곡들은 클래식 음악을 많이 들어 본 고단수 애호가들에게 어필하는 패러디 곡들이므로, 스포일링 혹은 네타바레성 내용이 있으니 참고하시길.)
독일/오스트리아의 고전음악이라고 하면 지금도 그 권위를 온 세계에 떨치고 있으며, 대체로 높은 차원의 질서가 지배하고 있는 준엄하고 강직한 음악이라는 인상이 짙다. 하지만 그 때문에 많은 클래식 초심자들이 들어섰다가 '지겹고 너무 무겁다' 라는 인상을 받고 물러나는 일도 잦다.
하지만 나는 '이것은 이렇다' 라고 뚝 잘라 정의하는 것을 대단히 싫어한다. 대상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하나의 선입견에 빠뜨리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인데, 독일 음악도 찾아보면 단순소박하게 삶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내용의 것들도 많다.
저런 면을 가장 많이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 바로 민요나 동요 등의 노래다. 지금도 술집에서 맥주를 몇 잔 걸치고 취기가 돌면 합창을 하는 독일인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고전음악' 축에 끼워주기는 좀 그렇다고 해도 오히려 민중의 흥취를 듬뿍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독일적인' 음악이 아닐까?
게다가 몇몇 독일 작곡가들은 위에 쓴 것처럼 예상되는 준엄함과 강직함을 훌훌 벗어던지고 '패러디' 의 세계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물론 바흐-베토벤-브람스로 이어지는 독일 음악의 거성들과 비교하면 그들의 네임 밸류는 초라하기 그지 없지만, 이들의 이름이 멀고 먼 한국 땅에까지 도달한 것을 보면 '음악의 즐거움' 을 찾는 사람들에게 거리의 한계는 없어 보인다.
고전음악 방송이 주종을 이루는 KBS 1FM에서 어느 날 독일/오스트리아 작곡가들의 재미있는 변주곡이라며 몇 곡을 방송했다. 대부분의 청취자가 클래식 고단수인 이 방송에서 그 곡들은 갑자기 열렬한 반응을 얻었다. 그리고 이 여세를 몰아 EMI 한국 지사에서는 그 때 방송된 곡들을 모은 CD를 출반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지크프리트 오크스(Siegfried Ochs, 1858-1929)와 칼 헤르만 필나이(Karl Hermann Pillney, 1896-1980)의 작품들인데, 각각 '한 마리 새가 날아오네' 와 '한스야, 무릎으로 뭐하니?' 라는 소박한 민요와 동요를 주제로 한 곡들이었다. 물론 이러한 대중적인 노래를 주제로 한 변주곡은 그 이전에도 여러 가지가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 곡에 중요한 차별성을 부여한 것이 바로 변주마다 딸린 표제였다.
예로 오크스의 변주곡은 주제가 주어진 뒤 연주되는 첫 번째 변주에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나오는 음악은 아주 전형적인 바로크 푸가이며, 그 뒤로 나오는 두 번째 변주 '요제프 하이든' 은 고전시대 현악 4중주 스타일, 세 번째 변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는 클라리넷이 소프라노 아리아를 모방하는 스타일 식이다.
한 마디로, 주제를 각 작곡가의 스타일 대로 변주시킨 것이었다. 모차르트 뒤로도 계속 요한 슈트라우스, 베르디, 구노, 쇼팽, 바그너 등으로 이어지는 이들 변주는 확실히 클래식 매니아들에게 대단히 이색적인 즐거움을 주었다. 바그너에 이르러서는 오페라 '탄호이저' 서곡이 아주 노골적으로 패러디되어 내게도 뜻하지 않은 폭소를 자아내게 했다.
오크스가 각 변주에 표기된 작곡가들의 '스타일' 위주로 패러디를 했다면, 그것을 뛰어넘은 것은 바로 후배 뻘인 필나이였다. 필나이의 아이디어도 기본적으로는 오크스의 것과 비슷하지만, 대신 그는 작곡가별 변주에 진짜로 해당 작곡가의 작품을 인용한 것이었다.
예로 '바흐' 변주에는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제 1권 22번의 전주곡이, '슈베르트' 변주에는 연가곡 '아름다운 물레방앗간의 아가씨' 의 두 번째 곡 'Wohin?' 이, '베르디' 변주에는 오페라 '아이다' 의 유명한 개선 행진곡이, '로시니' 변주에는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 서곡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변주에는 교향시 '돈 환' 이 나오고 있다. 이 때문인지 필나이는 이 작품을 발표할 때 본명의 철자를 뒤집어 만든 '리프만 헤르나이(Lipman Herney)' 라는 가명으로 발표했다고 한다.
이 두 곡이 담긴 문제의 음반은 독일에서 1969년에 출반된 것이었는데, EMI 독일 지사인 EMI 엘렉트롤라가 베르너 안드레아스 알베르트(Werner Andreas Albert) 지휘의 북서독일 필하모닉 오케스트라(Nordwestdeutsche Philharmonie)와 에른스트 귄터 셰르처(Ernst Günter Scherzer)의 피아노 연주로 녹음한 것이었다.
유감스러운 것은, 한국 EMI에서 낸 CD가 현재는 절판 상태라는 것. 하지만 국내의 대형 레코드점 등에서는 아직도 간간히 찾아볼 수 있으므로, 시간과 돈 여유가 되는 분은 찾아 보시길. (참고로 본인은 이대 쪽의 유명한 중고 음반점에서 입수했음) 그리고 위의 오케스트라 홈페이지에 가보니 같은 곡에 울리히 좀머라테(Ulrich Sommerlatte)라는 작곡가의 곡을 추가한 필립스의 신보가 소개되어 있었다. 독일에서는 여전히 인기있는 곡인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