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시기에 좌익에 몸담은 음악인 중 거의 유일하게 남한에 생존해 있는 작곡가로 조념(1922-)을 들 수 있다. 함경남도 출신으로, 처음에는 바이올리니스트로 시작해 도쿄와 하얼빈 등지에서 유학했고 1944년에는 계정식 현악 4중주단 단원으로 연주 활동을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남북 분단과 6.25를 거치면서 친족을 잃었고, 자신도 잠시 동안의 좌익 음악단체 활동 경력과 이북이 고향이라는 이유로 '빨갱이' 로 몰려 갖은 고초를 치루었다고 한다.
다행히 그는 전후 남한에서 계속 활동할 수 있었지만, 대체로 그 당시 날고 기던 음악인들에 비하면 조용하고 간소한 것이었다. 1952년에 한하운의 시로 작곡한 가곡 '보리피리' 가 지금도 애창되고 있으며, 지금도 작품 목록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것은 가곡 등의 성악 작품들이다. 기악곡으로는 피아노 3중주, 바이올린 소나타, 현악 4중주 등 주로 바이올린이 포함되는 실내악 작품들을 남긴 바 있다.
1987년에 6월 항쟁으로 민주화 열풍이 몰아치면서 조념도 그간의 '순수음악' 활동에서 탈피할 수 있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 같은 그룹의 가요(녹두꽃)를 쓰는가 하면, 김지하의 통렬한 풍자시 '오적' 등으로 가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민족음악연구회 등의 단체가 그를 조명하기 시작했고, 해방 시기의 음악계를 상징하고 증언하는 원로 음악인으로서 부각되었다.
나는 2년 전 지금 다니고 있는 음대에 붙어있던 연주회 포스터로 조념의 음악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리틀엔젤스 예술회관에서 열린 개인 작곡 발표회였는데, 국내 작곡가의 음악회로서는 드물게 관현악단이 출연했다. 특히 한국 작곡가가 교향곡을 발표한다는 것만으로 굉장히 솔깃해졌다.
연주회장은 꽤 썰렁했고, 연주자들도 연습 부족으로 제대로 된 연주를 들려주지는 못했지만, 그 연주회는 내가 처음으로 한국인이 작곡한 교향곡을 실연으로 들었다는 의미가 있었다. 연주회 후 나는 조촐한 환영회 자리에 끼어들어 마침 자리하고 있던 작곡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교향곡의 악보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몇달 후, 나는 송파구에 있는 한 '바이올린 연구실' 로 그 작곡가를 찾아갔다. 그리고 막연하게 기대했던 교향곡의 자필 악보 사본은 물론이고, 바이올린 소나타 등의 악보집과 연주회 실황 CD 등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이 민족음악연구회 회지에 중복되는 내용이기는 했지만 젊었을 때의 회고담을 들을 수 있었다.
조념의 교향곡은 현재 3번 '통일' 과 4번 '산하' 만이 완전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데, 1번은 습작으로 시도했다가 취소했으며 2번은 전쟁 중 악보를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작년에 추계예대 콘서트홀에서 열렸던 '조념 헌정음악회' 에서 다시 작곡가에게 '5번 교향곡을 작곡 중이다' 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4번 교향곡 '산하' 는 1971년에 피아노 악보로 우선 출간되었고, 30년 후인 2001년에 관현악 편곡이 완성되어 안드레이 다슈이닌 지휘의 블라디보스토크 국립 교향악단에 의해 초연되었다. 그 후에도 작곡가는 타악기 파트를 비롯해 여러 군데를 수정했고, 그 때 받은 악보 사본은 개정 후의 것이다.
이 곡은 D단조를 기본 조성으로 하고 소나타 형식을 고수하는 보수적인 형식의 곡이지만, 내용도 그런 것은 아니다. 연주회 때 나는 원로 작곡가라는 점 때문에 60-70년대의 가곡이나 가요 풍의 '뻔한 도식성' 을 예상했지만, 오히려 조성을 파악하기 힘든 악구나 불협화음이 곳곳에서 출몰해서 당혹스럽기도 했었다.
물론 이 곡의 의미가 그러한 '현대성' 에만 집중된 것은 아니다. 곡의 기초로 전통음악의 가락과 장단이 존재하며, 이러한 요소들은 비록 이건용이나 김대성 등 제 3-4세대 작곡가들의 그것보다 표피적이기는 하지만, 서구의 교향곡들과는 분명 차별되는 나름대로의 개성인 것이다. 하지만 '교향곡' 으로서 좀 더 높은 차원의 통일성이 엿보이지 않는 것도 아쉽기는 하다.
음악적인 측면 외에, 이 곡은 3번 '통일' 과 함께 자신이 살았던 고난의 세월을 회고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작곡 중에 쓴 시(1974)에서 특히 그러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데, 3번과 마찬가지로 이 곡도 결코 긍정적인 결말로 향하지 않는다. 귀에 거슬리는 목관의 불협화음 뒤에 이어지는 플루트 솔로와 조용한 끝맺음은 '분단된 산하' 라는 비극의 아이러니를 상징하는 듯 하다.
밑의 음원은 2002년 당시의 실황 녹음이다. 덕분에 관현악단의 졸연이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기도 하지만, '조금 더 높은 수준의 악단이 성심성의껏 연주하기를' 바랄 수밖에. 악보도 있는 만큼, 나 자신이 이후 더 수준 높은 연주를 직접 이끌고 싶은 욕심도 생기고 있다.
ⓟ 2002 Pasang Cho Nyum
*조념 선생님은 2008년 9월 15일에 위암으로 타계하셨습니다. 뒤늦게나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