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 혹은 개인과 가장 거리가 먼 악기가 뭐냐고 한다면, 나는 '파이프 오르간' 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세계의 어느 오르가니스트도 파이프 오르간을 자기 소유로 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안다. 집에 가지고 있다고 해도 분명 크기가 축소된 '포지티브' 오르간일 것이고, 어느 성당이나 교회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한 제대로 된 파이프 오르간을 만져보기도 힘들 것이다. 오르간을 만들었다는 단어를 'made' 라고 쓰지 않고 'built' 라고 쓰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고.
오르간 음악이 가장 발달한 나라는 독일과 프랑스였다. 오르간 독주곡으로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바흐 이전에도 '카논과 지그' 로 유명한 파헬벨, 바흐가 흠모했던 북스테후데 등이 독일 오르간 음악의 굳건한 지주로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독일도 18세기 들어서 '계몽주의' 와 '고전주의' 의 바람이 불자 종교의 영향력이 축소되었고, 동시에 오르간 음악도 쇠퇴하기는 했지만.
확실히 바흐 이후 독일의 오르간 음악에서 명곡은 없어 보인다. 19세기에 오르간 음악을 부흥시켰던 나라는 독일이 아닌 프랑스였고, 독일에서 오르간 음악의 명곡이 다시 나오기 시작한 것은 막스 레거가 등장한 19세기 후반이나 되어서 부터였다.
600곡도 넘는 작품을 35년의 생애 동안 남긴 '서양음악사 최고의 천재' 모차르트가 오르간곡을 썼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모차르트는 오르간+스트링의 간소한 편성으로 된 17곡의 교회 소나타와 세 곡의 오르간 독주곡을 남겼다. 잘츠부르크 대사교 밑에서 오르간 연주자로도 일했던 모차르트였지만, 그의 오르간 곡은 CD 두 장으로 충분한 이 곡들 뿐이다.
그나마 세 곡의 독주곡은 교회 오르간을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었다. 요제프 다임이라는 백작이 빈에 세운 '로우돈 원수의 대영묘(mausoleum)' 에서 추도 음악으로 쓰기 위해 모차르트에게 오르간 곡을 부탁한 것이 1790년 말이었다. 모차르트는 '아다지오와 알레그로' K.594와 '환상곡' K.608, 그리고 아담한 소품인 '안단테' K.616을 이듬해 5월까지 작곡했다.
'대영묘' 는 문자 그대로의 묘지는 아니었고, 백작의 진귀한 골동품 수집소 역할을 했던 모양이었다. 유리관에 밀랍으로 만든 사람의 조각상 등이 들어 있었고, 내부에는 추도곡이 울려퍼지는 좀 괴상한 분위기의 건축물이었다고 한다. 다임 백작은 매주 작곡가들에게 그러한 '추도곡' 들을 위촉했고, 모차르트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모차르트는 '붓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곡을 빨리 쓰는' 사람이었지만, 이들 오르간곡 만큼은 다른 작곡가들처럼 고생해 가면서 쓴 모양이다. 첫 곡을 쓰기 시작했을 무렵 부인인 콘스탄체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아주 드물게 '작곡의 어려움' 을 호소하고 있었으니까. 모차르트가 이렇게 그 동안 써보지도 못한 오르간 독주곡을 작곡했던 것도 분명 '생계 곤란' 때문이었을 것이다.
18세기에 독일 오르간 음악이 쇠퇴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시기 독일의 오르간은 종교적인 쓰임새를 떠나 '관현악의 울림에 가까운' 거대한 기계 혹은 건축물로 거듭나고 있었다. 다임 백작의 대영묘에 설치된 오르간도 구조가 복잡하고 크기도 거대한 오르간이었다고 한다.
모차르트의 오르간 독주곡들 중 가장 높이 평가받는 곡이 바로 두 번째 작곡된 환상곡이다. 첫 곡으로 쓴 '아다지오와 알레그로' 와 마찬가지인 F단조의 곡인데, '아다지오...' 가 고요함-화려함-고요함의 세토막으로 나뉘어 진다면 이 환상곡은 그것을 뒤집어 놓은 듯한 모양이다. 곡을 시작하는 강한 화음은 공포 영화에 써도 괜찮을 정도로 위력적이며, 중간부는 그것을 진정시키는 듯이 부드러운 음색으로 일관하고 있다.
특히 이 곡의 중간부 코드 진행은 J.D.화이트의 '음악분석' 이라는 책에도 인용되어 있는데, 모차르트가 이미 고전을 넘어 낭만주의 음악의 길을 열어놓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바흐와 헨델 등이 작곡한 오르간 음악들도 참고했음이 틀림없고, 첫머리의 강한 연주가 장조(major)로 조옮김되어 시작되는 마지막 세 번째 부분에는 많은 오르가니스트들이 골치를 썩일 복잡한 2중 푸가(double fugue. 수평적인 음악 이론인 '대위법' 의 최고 경지에 이르는 작곡 기법 중 하나)가 들어있다.
하지만 이들 곡만으로 '모차르트=오르간의 명수' 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르간 음악이 전반적으로 맥을 못 추던 시절의 작품인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모차르트의 오르간 음악들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아니면 모차르트가 자평했던 것처럼 '구역질 나는' 곡들이어서 그랬을 지도. (물론 저 말은 일에 쫓기던 때라 자학 비슷하게 내뱉은 것이리라 생각된다.) 나 자신도 필립스에서 나온 거대한 '모차르트 대전집' 이 아니었으면 평생 이 곡을 접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이든의 손에서 모차르트의 정신을 이어받으라' 는 발트슈타인 백작의 충고로 빈에 눌러 살게 된 베토벤이 저 환상곡의 진가를 높이 사서 악보를 직접 베껴 놓았고, 그의 말년에 새롭게 부활시킨 대위법 양식의 작곡 패턴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모차르트 작품 치고는 듣기 힘든 곡인 만큼 음반을 구하기도 쉽지가 않다. 필립스의 모차르트 대전집 외에 90년대 EMI에서 CD가 하나 발매된 적이 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폐반된 상태다. 아마 오르간 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마이너 음반사가 있다면 거기에 포함되어 있을 지도 모르겠다. 오르가니스트들의 분발을 기대해 본다.
아래의 음원은 모차르트 대전집에 있는 것으로, 독일 오버마르흐탈(Obermarchtal)의 대교구 성당에 있는 홀츠하이 오르간(Holzhay-Orgel)으로 연주되었다. 1784년에 제작된 오르간이라고 하는데, 모차르트가 곡을 쓰기 6년 전 쯤에 만들어진 것이니 나름대로의 시대 고증을 위한 선택으로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