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촌놈' 인 터라 지방 공연 소식에는 아무래도 둔감하거나 정보가 늦는 경우가 많은 편인데, 다만 몇 가지 찬스는 잡아서 공연을 보러가는 경우도 있다. 특히 이번에는 특정 레퍼토리가 한국 초연된다는 소식에 더 솔깃했고.
현재 울산 시립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는 작년 11월에 부임한 김홍재가 맡고 있다. 김홍재는 소위 말하는 '재일 코리안' 출신으로, 조선적이라는 이유로 남한 땅을 밟지 못하다가 2000년에야 ASEM 기념 음악제를 통해 국내에 데뷰해 화제가 된 지휘자이기도 하다. 또 국내에 소개될 때 가장 먼저 언급된 것이 '히사이시 조와 공동 작업을 많이 하는 지휘자' 라는 것이었고.
히사이시 조는 일본 대중문화의 개방을 한국 정부에서 공표했을 때 가장 선봉으로 들어온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과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에서 음악을 많이 맡아 유명한 인물이기도 하고, 그 때문에 데뷰 콘서트 외에도 히사이시 조의 첫 한국 공연 때 지휘자로 출연해 클래식 애호가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나름대로 어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제(7월 11일)는 히사이시 조가 초대되지는 않았지만, 그가 '이웃의 토토로' 에 붙인 음악을 콘서트용으로 전용한 이색적인 작품의 한국 초연이 있었다. (그 작품에 대해서는 벌써 4년도 더 전에 네이버에 블로그 돌릴 때 쓴 글이 있으므로 참조. 클릭) '토토로' 는 이미 DVD도 나와 있고, 저연령층에도 상당히 보급되어 있었으므로 이런 종류의 음악회를 기획할 때 나름대로 안성맞춤인 레퍼토리이기도 했을 것이고. (사실 이 곡은 울산시민들을 대상으로 '가장 듣고싶은 곡' 을 설문조사했을 때 1순위로 뽑혔다고 함)
어쨌든 그런 의미도 있고, 지휘자에 대한 개인적인 빠심도 있고 해서 거의 1년 만에 울산을 다시 찾아갔다. 물론 돈이 궁해서 일반 고속버스도 덜덜 떨면서 타고 거의 다섯 시간을 달려서 도착했고. 여느 때처럼 한참 일찍 도착해 무대 리허설을 보러 울산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 들어갔다. 다만 여기도 공공시설인 만큼 에너지절약시책이니 뭐니 해서 로비는 바깥보다 약간 시원할 뿐이었고. (그래도 공연장 내부는 한결 나았음)
막 들어갔을 때는 첫 곡이었던 드미트리 카발레프스키(Dmitri Kabalevsky, 1904-1987)의 모음곡 '어릿광대' 중 마지막 곡인 에필로그의 리허설을 하던 중이었다. 이어 협연자인 박종훈이 무대로 나와 조지 거슈인(George Gershwin, 1898-1937)의 '랩소디 인 블루' 를 연습하려고 준비했는데, 이게 또 '토토로' 말고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직접 작곡도 하는 박종훈이 피아노 독주만 나오는 대목을 대폭 손봤는지, 아니면 즉흥연주에 일가견이 있었던 거슈인 자신이 또다른 버전을 만들어 놓았는지는 모르지만 원곡과 꽤 틀린 연주였다. 심지어 중간부에 나른하면서도 정감이 듬뿍 담긴 블루스풍 악구를 피아노가 일찌감치 제시하는 '프리 카덴차(pre-cadenza)' 도 출현했는데, 원곡에 충실하자는 사람들에게는 당혹스러울 수도 있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흥미있었고. 그리고 코다 직전에 갑자기 '팽' 하는 소리가 들려서 놀랐는데, 알고 보니 피아노의 현 하나가 연습 도중 끊어진 것이었다. 그래도 연주 자체에 지장은 없었기 때문에, 그대로 끝까지 마쳤고.
잠깐 휴식한 뒤 '토토로' 를 전체적으로 한 번 훑는 것으로 리허설이 다 끝났는데, 대충 예상은 해봤지만 역시 나레이션이 곁들여지는 '오케스트라 스토리즈' 버전으로 공연되는 것으로 짜여졌다. 거기에 특별히 원작 애니메이션 영상을 편집한 것이 오케스트라 뒷편에 설치된 프로젝터를 통해 같이 재생되었고.
오케스트라 악기가 소개되는 '산보' 에서 목관 주자들이 합주 때 갈팡질팡하거나, 토토로 울음소리를 묘사하기 위해 튜바가 하모닉스를 내는 대목에서 불안하기도 했지만 지휘자가 그대로 진행하고 있었다. 아마 단원들이 실제 공연 때는 더 잘해줄 거라고 믿었을 지도. (사실 후자, 그러니까 튜바의 하모닉스 같은 경우에는 일반적인 클래식 작품에서도 그리 많이 쓰이는 효과도 아니고 연주하기도 쉽지 않다. 히사이시 조가 편집한 이 곡이 단순히 치기어린 장난으로 생각되지 않는 것도, 관현악에 꽤 까다로운 기교를 간간히 요구하는 이런 면모 때문이기도 하고.)
어쨌든 리허설이 끝나고 단원들도 식사하러 간 만큼, 나도 밥먹으러 작년과 똑같이 회관 근처의 중국집에 들어가 짜장면으로 이른 저녁을 해결했다. 점심도 못먹었던 만큼, 곱배기를 시킨 것이 에러였지만. (확실히 양이 많기는 했지만, 어쨌든 다 먹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 대공연장 로비 한켠에 마련된 무료 인터넷 공간에서 컴질도 조금 했는데,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 뉴스도 그 때 처음 접했고.
공연은 여느 연주회처럼 7시 30분에 시작됐는데, 역시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청소년들이 많이 들어와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아무래도 청중들의 관람 에티켓이 걱정되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달리 생각해서 '애초부터 저연령을 노렸다면 그냥 그렇게 이해하고 마음 편히 보자' 는 마인드를 가져보기로 했고.
첫 곡인 카발레프스키 모음곡도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연극의 부수 음악으로 작곡되었던 만큼, 비교적 가볍고 코믹한 맛이 전곡에 흐르는 곡이다. 하지만 지휘자가 악단 실력에 맞추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자신만의 해석이었는지는 몰라도 템포를 좀 느리게 잡아서 그런지 곡의 특성이 좀 상쇄된 듯한 느낌도 들었고. 팀파니의 볼륨이 너무 커서 부담이 된 '판토마임' 도 좀 아쉬운 대목이었다. 하지만 그 느린 템포를 섬세하게 가져간 '자그마한 서정적 풍경' 이나 '가보트' 는 상대적으로 서정미와 고전적인 절도가 더 살아나는 효과도 있었다.
이어 연주된 거슈인 곡도 리허설에서 본 것처럼 일반적으로 알려진 버전에서 꽤 벗어난 색다른 연주였는데, 간간히 미스터치도 들리긴 했지만 재즈에 영향을 받은 곡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는지 피아노만 솔로하는 부분에서는 유연하게 템포와 다이내믹을 가져가는 면도 두드러졌다. (공연 끝나고 그 비밀을 알기 위해 로비에 나온 피아니스트에게 직접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후 글 참조)
오케스트라의 경우에는 초반부의 유명한 클라리넷 솔로 글리산도나 트럼펫과 트롬본의 와와 뮤트 효과 등 '재지한' 부분이 좀 어설펐던 것이 아쉬웠고, 개인적으로는 타악기 파트도 심벌즈나 스네어 드럼, 베이스 드럼은 드럼 세트로 연주하는 것이 낫다고 봐서 너무 두껍고 세게 연주된 것도 좀 걸렸다. 하지만 피아노 독주의 신선함이 커버해준 격이었으니 나름대로 괜찮았다고도 보고.
2부에서는 예의 '토토로' 가 한국 초연되었는데, 원곡의 앨범에서는 사츠키와 메이의 아버지 성우로도 출연했던 이토이 시게사토가 나레이션을 맡았었다. 이번에는 이선경이라는 나레이터가 나왔는데, 리허설 때도 같이 맞춰보는 것을 보고 '성우인가' 생각했다가 울산시립합창단 소프라노 단원이라는 자기 소개를 듣고 흠많무. 그리고 공연에 특별히 임석한 울산시장을 소개한 뒤 연주가 시작되었다.
리허설 때 삐끗했던 부분들은 실황 연주의 긴장감 때문인지는 몰라도 대부분 상쇄되어서 듣기에 훨씬 편했는데, 다만 신일본 필이 연주/녹음한 원본 앨범보다는 좀 섬세함이 떨어진다는 인상도 들었다. 그 대신 전체적인 텐션이나 감정 이입을 요하는 부분에서는 좀 더 '느끼면서' 연주한다는 반대급부의 해석도 엿보였고.
가장 궁금했고, 또 리허설 때 불안했던 튜바의 토토로 울음소리 '악기모사' 도 리허설보다 훨씬 자연스러웠다. 물론 같이 곁들여진 영상 때문에 아이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었고. 영상은 나레이션에 맞추어 나름대로 꼼꼼하게 편집됐지만, 전체적으로 멜랑콜리하고 호흡 긴 선율이 베이스로 깔리는 '바람의 길' 에서는 오히려 코믹한 장면의 영상이 편집돼서 가장 어색한 대목이 되어 버렸다.
어쨌든 울산시민들의 앙케이트를 반영한 연주회였던 만큼, 호응은 대단히 좋았다. 앵콜로는 첫 번째로 김홍재가 현악 합주용으로 편곡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중 '또다시' 가 연주되었고, 이어 '토토로' 의 마지막 악장이 두 번째로 연주되었다. 연주회가 끝나고 로비에 시장을 만나러 나온 지휘자와 피아니스트를 청중들이 둘러싸고 사인과 사진 공세를 퍼붓는 것을 보고 대중음악 콘서트에 온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일본에서 애니나 게임을 기반으로 작곡되고 있는 교향 모음곡이나 교향곡들 중 아마 이것이 가장 처음 정식으로 연주된 것 같은데, 앞으로도 기회가 된다면 이러한 이벤트성 연주회가 꾸준히 개최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역으로 한국에서도 이러한 아이디어로 게임이나 애니 OST에서 관현악 작품을 편곡하는 시도도 있으면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