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연말마다 각 관현악단들이 거의 빼놓지 않고 공연하는 레퍼토리가 바로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의 교향곡 제 9번이다. 전곡 연주를 하던, 아니면 4악장만 발췌해서 하건 간에 이 곡이 연주가 안되면 송년 분위기가 안난다는 이들도 있다고 하고.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저 곡이 나치 등의 극단적 정치 세력에 악용된 역사도 있고, 다른 곡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듯이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것 같아 질린다는 느낌이다.
하다 못해 '원조' 국가들인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도 이렇게 연말 고정 레퍼토리로 공연되는 경우는 예상 외로 별로 많지 않다는데, 이런 관습이 전해진 나라는 일본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일본에서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연말 공연 때 어느 관현악단이건 꼭 연주해야 직성이 풀리는지, 아예 '제9' 라고 약칭해도 다들 알아들을 정도고. (다른 작곡가들의 교향곡 제 9번들 지못미)
심지어 저 '제9' 를 어이없을 정도의 초대형 편성으로 공연하는 이벤트가 세 가지나 된다고 하는데, 그래서 대충 조사해 봤다;
I. 국기관 5000명의 제9 콘서트
도쿄에서 스모 경기가 자주 개최되는 실내 경기장이 스미다구에 위치한 료고쿠 국기관인데, 10000명 가량을 수용하는 대규모 공간이라 종종 대중음악인들이 공연장으로 쓰기도 한다. 아주 드물지만 클래식 공연도 열리는데, 일본 비평가들도 비정상적이었다고 평할 만큼 인기있던 러시아 피아니스트 스타니슬라프 부닌도 저기서 독주회(!!!)를 가졌다고 하고.
그리고 매년 2월 중순 쯤 열리는 연례 행사가 바로 이 이벤트인데, 1985년 2월 17일에 국기관 개관 기념식을 겸해 공연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경기장 관객석의 절반을 합창단으로 꽉 채우고 공연한 셈이었는데, 합창단의 대부분은 프로가 아니라 이 공연만을 위해 거의 반년 전부터 맹연습을 해온 아마추어들이었다.
거대한 것에 대한 집착과 동경 때문인지, 아니면 음악적 성취감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저 이벤트는 엄청난 비용과 인원이 투입되는 태생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 해에도 계속되었다. 그리고 올해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개최되고 있고. (관현악단은 도쿄 교향악단과 신일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몇 번 참가한 것 외에는, 대개 이벤트를 위해 임시로 편성되는 악단이 들어가고 있다.)
이렇게 지속되다 보니 일본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도 그 소식이 전해졌고, 심지어 공연에 참가하기 위해 일본으로 들어오는 외국 합창단들도 생기고 있다. 지휘자도 가끔 외국인이 섭외되곤 하는데, 2002년에 개최된 18회 공연 때는 한국 지휘자로는 최초로 장윤성이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올해도 2월 22일에 25회 공연이 개최되었는데, 이번에는 역대 최초의 여성 지휘자로 독일의 케르스틴 벤케가 섭외되어 공연했다고 한다.
규모로만 따지면 도쿄/간토를 대표하는 국기관 이벤트를 가볍게 발라버리는 또 하나의 '제9 이벤트' 인데, 오사카/간사이를 대표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제9 공연이라고 한다(다만 기네스북에는 아직 미등재됨). 공연 시기는 매년 12월 초순 혹은 중순이고.
규모 외에도 일본에서 진행되고 있는 제9의 대규모 공연 중 가장 먼저 시작했다는 기록도 가지고 있는데, 국기관 제9와 마찬가지로 간사이 지방 최대의 이벤트홀인 오사카성 홀의 개관 기념으로 1983년 12월 4일에 1회 공연이 있었다. 다만 공연 명칭에 일본 거대 주류업계인 산토리의 이름이 들어있는 것이 차이점인데, 실제로 이 이벤트의 최대 스폰서로 지금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산토리는 도쿄에 회사 이름을 딴 '산토리홀' 이라는 공연장을 건립한 것으로 유명하긴 하지만, 본사는 오사카에 자리잡고 있다. 당시 간사이 지방은 간토 지방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공연 문화가 뒤처지는 형편이었고, 이 이벤트도 그런 분위기에 일대 전환점을 마련한다는 포부를 갖고 시작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오사카/간사이 지방을 중심으로 일본 각지에서 모집한 아마추어들이 주축이 되어 합창단을 꾸리고 있는데, 지휘자와 관현악단이 자주 바뀌는 다른 이벤트와 달리 특정한 인물과 단체가 주축이 되어 이끌고 있다는 차이점도 있다. 1회부터 16회 때까지는 일본에서 텔레비전 프로그램 공연을 통해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모은 야마모토 나오즈미가 줄곧 지휘했고, 17회부터 지금까지는 중견 지휘자인 사도 유타카가 공연을 이끌고 있다.
관현악단도 1회부터 19회까지는 간사이 지방의 3대 악단들인 오사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간사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교토 교향악단이 연합한 대규모 악단이 따라붙었고, 20회부터는 국기관과 마찬가지로 이벤트 전용으로 임시 편성하는 대규모 청소년 관현악단이 기용되고 있다. (합창단 규모가 엄청난 만큼, 관현악단도 원곡 편성의 두 배 규모인 4관편성으로 크게 증편한 악단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다만 10000명이라는 숫자의 합창 인원을 모으는 것은 엄청난 끈기와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이벤트 초기에는 그 숫자에 크게 못미치는 인원으로 공연을 진행해야 했다. 물론 크게 못미친다고는 썼지만, 가장 합창단원 숫자가 적은 공연도 6000여 명이라는 스펙이었으니 간사이 사람들의 자존심과 고집도 대단해 보인다. (최초로 10000명이라는 정족수를 채운 공연은 1992년에 열린 10회 공연이었다고 한다.)
최근에는 하도 합창 신청자가 많아서 추첨을 통해 인원을 뽑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도쿄 국기관 이벤트와 마찬가지로 해외에도 보도되면서 외국인들까지 가세하고 있다고 한다. 20~22회와 26회 때는 심지어 관현악단에까지 외국 연주자들이 참가했는데, 다름 아닌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빈 교향악단의 악장이나 수석 연주자들이 들어갔다고 한다.
산토리와 국기관 다음으로 시작된 또 하나의 '제9 이벤트' 인데, 산토리와 비슷한 시기인 12월 중순마다 개최되고 있다. 개최 동기도 마찬가지로 히로시마 선플라자라는 대규모 이벤트홀의 개관식이었는데, 다만 공연장 규모가 국기관이나 오사카성 홀보다는 작은 편이라 합창단 규모는 1000~2000명 선에 그친다고 한다.
하지만 합창단 모집에 있어서는 가장 전국적인 형태인데, 히로시마현을 중심으로 규슈나 시코쿠, 간사이, 간토, 도호쿠, 심지어는 홋카이도와 일본 거류 외국인들까지 원정와서 합창에 참가하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그런 외지인들을 위한 패키지 투어 상품까지 팔리고 있다니 흠많무)
관현악단은 1985년 12월 12일의 첫 공연 이래 히로시마 교향악단이 거의 예외없이 맡고 있는데, 단 1988년에 개최된 4회 공연에서는 마침 내일 순회공연 중이던 하인츠 뢰그너 지휘의 (동)베를린 방송 교향악단(Rundfunk-Sinfonieorchester Berlin. 서베를린에 있던 비슷한 이름의 단체와는 별개의 악단)이 협연한 바 있다. (일본의 대규모 '제9' 이벤트 중 유일하게 해외 유명 관현악단이 단독 협연한 기록임)
지휘자는 국기관 이벤트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인물들이 섭외되고 있는데, 2005년의 21회 공연 때는 히로시마 교향악단 전속 지휘자를 역임했던 재일교포 지휘자 김홍재(현 울산시향 상임 지휘자)가 출연하기도 했다.
세 이벤트 모두 전문 성악인으로 구성된 프로 합창단이 아닌 아마추어들이 수개월 간의 맹연습을 거쳐 공연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4악장의 합창 파트를 한 번이라도 불러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가사 이전에 이미 성부 음역의 한계를 마구 뛰어넘는 무자비한 작곡 스타일에 우선 경악할 수밖에 없고. 게다가 일본어 번역 가사가 아닌, 독일어 원어 가사로 노래해야 한다는 규칙도 있다.
가뜩이나 외국어 발음이 독특한 일본에서 이러한 시도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그래서 초기에는 비슷한 가타카나 발음을 짜맞춘 가사를 인쇄한 악보를 보급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억지로 끼워맞춘 단어들을 이으면 완전히 다른 의미의 문장이 완성된다는 것 때문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고 함)
비평가들 사이에는 이런 이벤트성 공연에 긍정적이기만 하지는 않았는데, 일종의 부정적인 포퓰리즘으로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전문 성악가들만이 부를 수 있는 것으로 여겨져온 제9를 대중들이 직접 참가해 (물론 예술적 퀄리티는 다소 떨어지더라도) 부르고 즐기는 '새로운 형태의 연주/감상' 을 제시했다는 견해도 있다.
*국내에도 번역 출간된 와타나베 히로시의 '청중의 탄생' 이라는 책에도 이러한 '제9' 열풍이 언급되어 있는데, 굳이 이런 공연 외에도 서양 클래식 음악의 태동과 함께 연주와 감상법의 변화와 관련한 흐름을 그리 어렵잖게 정리해놓고 있다. 만약 음악사회학이나 연주 예술의 변천 과정에 흥미가 있다면 읽어볼 것을 권한다.
그리고 이런 이벤트 공연 외에도 특별한 컨셉을 가지고 매년 진행하는 '제9' 공연도 있는데, 간단히 써본다;
'제9와 황제': 1981년부터 지휘자 구마가이 히로시가 개최하고 있는 공연. 프로그램은 공연 제목 그대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과 교향곡 9번으로 고정되어 있고, 특별 편성한 임시 관현악단에 프로 합창단과 아마추어 합창단이 절반 비율로 섞인 형태로 공연하고 있음. 초기에는 히비야 공회당에서 진행하다가 NHK홀이나 도쿄 국제포럼 A홀(5012석) 등을 공연장으로 잡고 있음.
'제9와 사계': 도쿄 교향악단이 매년 연말마다 개최하고 있는 송년 특별 공연. 마찬가지로 프로그램은 비발디 바이올린 협주곡 시리즈 '사계' 중 두 곡과 베토벤 교향곡 9번으로 고정되어 있고, 합창은 도쿄 교향악단 부속 합창단이 맡고 있음.
'베토벤은 굉장해!~전교향곡 연속 연주회': 제목 그대로 베토벤 교향곡 아홉 곡 전곡을 12월 31일 오후부터 1월 1일 새벽까지 반나절 동안 한방에 연주하는 마라톤 콘서트. 작곡가 사에구사 시게아키의 프로듀스로 2003년에 시작했으며, 2005년에 도쿄 예술극장에서 열린 것을 빼면 계속 도쿄 문화회관을 공연장으로 쓰고 있음.
관현악단은 1회 때 도쿄 교향악단과 도쿄 시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번갈아가며 출연한 것을 제외하면 NHK 교향악단 단원들을 주축으로 특별 편성한 악단이 기용되며, 지휘자는 2003년과 2006년에 여러 지휘자가 돌아가며 지휘한 것을 제외하면 이와키 히로유키(2004/2005)와 고바야시 겐이치로(2007/2008) 한 사람이 단독 출연하고 있음. 9번의 합창은 전문 합창단이나 음대 합창단이 기용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