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생 시절 드럭 등 락 클럽을 돌며 스트레스를 해소하던 때만 해도, 홍대 주변은 그렇게 '번화가' 가 아니었다. 개선문처럼 으리으리한 정문 앞 건물도 없었고 나름 구색을 갖춘 레스토랑 같은 것도 쉽게 찾아보기 힘든 동네였는데, 전역하고 나서 가보니 정말 놀랄 만큼 싹 달라진 모습이었다.
음식점 쪽에서도 꽤 변화가 많았는데, 특히 허름한 옛 아파트를 헐고 주상복합으로 지어놓은 서교푸르지오 건물에만 해도 일본 라멘집이 세 군데나 있을 정도로 일식을 비롯해 중식(중국집이 아닌 퓨전 혹은 정통 중식당), 심지어 인도나 타이 음식점까지 별의별 가게들이 생겨나 영업 중이었다.
푸르지오에 입점한 세 군데 중에, 가게 자체는 라멘 전문점을 표방하고 있지만 돈부리(덮밥) 종류로 유명하다는 멘야도쿄를 달릴 기회가 있어서 써봤다.
사실 입지 면에서 볼 때는 그렇게 눈에 잘 띄는 곳에 있는 건 아닌데, 건물을 올릴 때 비탈을 파서 건축하는 식으로 지은 터라 1층은 사실상 반지하 형태로 길가 옆에 '파묻힌' 상태인 점포가 많다. 멘야도쿄는 그 중에서도 길에서 제일 안보이는 쪽에 입점해 있는데, 그래서인지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부근에 눈에 잘 띄도록 하얀 바탕의 가게 로고를 인쇄한 커다란 종이를 붙여놓고 있다.
여느 일본 라멘집처럼 오후 15~17시 두 시간 동안은 휴식 겸 오후 영업 준비 시간으로 잡아놓고 있었는데, 찾아보니 일본인 주방장이 운영하는 가게라고 되어 있었다. 다만 예전에 이대 쪽에서 거의 컬트적 인기를 구가하던 아지바코처럼 미칠듯이 붐비지는 않았는데, 그런 덕에 오히려 더 마음 편히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가게 안은 그리 넓은 규모는 아니었는데, 테이블은 4인석 하나랑 2인석 두 개 정도였고 나머지는 주방을 마주한 다이에서 먹는 식으로 되어 있었다. 혼자간 이상, 그리고 아지바코와 하카다분코, 미미당에서도 늘 그러듯이 다이 쪽에 자리를 잡고 뭘 먹을지 잠깐 고민해 봤다.
화질이 매우 구리고 뭐라 써져 있는지는 안보이지만, 다이에 앉으면 쉽게 볼 수 있는 메뉴판이다. 라멘 류로는 쇼유라멘과 돈코츠라멘, 그리고 돈부리 등 기타 밥 종류로는 오야코동, 칠리동, 차슈덮밥, 볶음밥, 카레라이스, 가츠동과 데리야키동 등이 표기되어 있고, 일품요리나 술에 대한 것도 적혀 있다.
홍대 뿐 아니라 서울 지역의 라멘집 가격들과 비교해 보면 그럭저럭 저렴하거나 비슷한 가격인데, 맛은 어떨지 하고 일단 오야코동(5000\)을 주문해 봤다.
일단 자리를 잡으면 종업원이 물과 집게가 들어 있는 김치통을 가져다 준다. 수저통과 반찬용 종지는 미리 셋팅되어 있었는데, 돈코츠라멘용 마늘이 담긴 그릇도 있었다.
뭘 하는지 잘 보이지 않지만, 돈부리를 조리중인 주방장과 보조. 왼쪽이 일본인 주방장이다. 다이 위에 올려놓은 것은 물은 아닌 것 같고, 아마 소스나 육수로 추정된다. 달걀이 들어가는 돈부리류는 일단 재료를 요리해 밥 위에 얹은 뒤에 알을 깨넣고 토치로 지져서 슬쩍 익히는 식으로 만들고 있었다.
다이에 붙은 것 외에도, 저렇게 천장 쪽에도 손으로 써서 붙인 메뉴표가 있다. 다만 모두 일본어로 되어 있어서, 모르는 사람은 굳이 신경쓸 필요는 없을 듯...하지만 카레라이스의 경우 저 메뉴표에만 표기되어 있다. 주력 메뉴가 아니라는 것일까?
아무튼 요리하는 모습을 힐끔힐끔 훔쳐보고 있자니 오야코동이 나왔다. 돈부리 류에는 꼭 따라나오는 미소시루도 물론 서비스됐는데, 약간 희멀건 색깔에 송송 썬 파가 잠겨 있었다. 돈부리를 아예 처음 먹어본 것은 아니었지만, 오야코동은 처음이었다.
나름 기대를 하고 떠먹어 봤는데, 약간 달달한 육수에 요리한 듯 했다. 달달짭짤한 맛이야 보천 우동이나 이런저런 음식점에서 경험해본 맛이라 그리 당혹스럽지는 않았고, 오히려 입맛을 돋궜다. 밑에 깔린 밥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조금씩 비벼가면서, 그리고 약간 심심한 것 같으면 김치를 곁들여 먹었고. 닭고기는 한입 크기로 썰어놓은 뼈없는 부위라 안심하고 입에 넣을 수 있었다.
양은 보통임에도-그리고 홍대 쪽 음식점들의 기본 서빙 양을 감안해도-결코 적지 않았는데, 1000원을 추가하면 곱배기로 먹을 수 있다고는 하지만 굳이 시도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국이고 덜어놓았던 김치고 밥이고 여느 때처럼 남기지 않고 완식. 첫 출발은 꽤 괜찮았다.
두 번째로 갔을 때 시킨 가츠동(6000\). 작년 중반까지만 해도 다른 돈부리류와 마찬가지로 5000원이었다는데, 결국 물가 인상의 압박 때문에 1000원 인상됐다고 한다. 오야코동과 달리 돈까스를 일단 튀기고 조리해야 하기 때문에 약간 시간이 걸리는 것은 당연했는데, 옆자리에 앉은 커플부대원들이 시기적절하게 같은 메뉴를 주문하고 있어서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고기는 일식 돈까스 전문점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씹는 맛이 느껴질 만큼 두툼했고, 약간 설익힌 듯한 달걀과 달달하고 아삭한 식감을 약간 남겨둔 양파도 마찬가지로 적절했다. 다만 튀김 음식이 들어가는 메뉴의 특성상 가끔은 좀 느끼한 느낌도 있었고(그래서 뜸들이고 먹으면 안될 것 같다). 물론 이럴 때도 김치를 입가심용으로 요긴하게 쓸 수 있었다.
세 번째 갔을 때는 돈부리 류가 아닌, 기타메뉴 쪽에 있는 볶음밥(5000\)을 골라봤다. 일본에 갔다온 사람들 말을 듣기로는 라멘집에서 교자나 볶음밥(차항)을 같이 파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고 하던데, 여기도 그런 예를 따라간 모양이었다.
볶음밥이야 한국식으로 로컬라이징된 김치볶음밥이나 중국식 볶음밥 종류는 꽤 많이 먹어봤고 직접 해먹기도 하지만, 일본식 볶음밥은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다. 조리하는 모습을 보니 그냥 밥에 달걀을 깨넣고 차슈를 송송 썬 것과 함께 센불에 잽싸게 볶아서 조리하고 있었고. 양파나 당근 같은 야채를 같이 넣고 볶지는 않았는데, 대신 완성한 뒤 접시에 담을 때 송송 썬 파를 뿌려서 내는 식이었다.
기름을 그렇게 많이 쓰지 않고 볶는지 의외로 깔끔한 맛이었는데, 별도로 소스 같은 것은 곁들여지지 않아 겉보기에 꽤 수수한 인상이었다. 맵고 짠 자극적인 맛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너무 담백해서 그리 재미가 없을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 번째 갔을 때 먹은 데리야키동(6000\). 오야코동과 함께 닭고기가 들어가는 돈부리의 쌍벽을 이루는 메뉴라는데, 한 입 크기로 썬 닭살을 볶아 익힌 뒤 데리야키 소스를 부어 슬쩍 조리고 상춧잎과 마요네즈 소스, 시치미로 추정되는 가루 조미료를 뿌려서 내왔다.
데리야키 종류의 메뉴는 꽤 달달하다는 것이 정석인데, 실제로 이 메뉴도 달달한 것으로 따지면 다른 덮밥류보다 특히 그랬다. 마요네즈의 추가도 아마 맛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것 같고. 다만 개인적으로는 식사 종류를 달게 먹는 것을 그리 즐기지는 않는 편이라 약간 찜찜하기는 했다. (이 때도 마찬가지로 김치를 입가심 용도로 써가며 맛에 변화를 주는 식으로 먹었다.)
이제 예정된 다음 시식 메뉴들은 차슈덮밥, 카레라이스, 쇼유라멘과 돈코츠라멘 정도인거 같은데, 세 번째로 갔을 때는 계산한 뒤 종업원이 도장 한 개가 박힌 쿠폰을 주었다. 쿠폰이 있는 줄은 모르고 갔었는데, 20회 채우면 식사 메뉴를 1회 공짜로 먹을 수 있다고 하고. 다만 요즘 같은 불황기에 20회라는 숫자는 결코 녹녹치 않은 횟수라서, 과연 보너스를 쓸 수 있을 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