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코디언(Accordion)이라는 악기는 흔히 유랑극단이나 서커스 등의 이미지로 연상시키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제로 그 방면에서 유용한 악기로 활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류의 이미지로만 아코디언을 재단하는 사람들이라면, 저 악기가 얼마나 여러 장르에서 쓰이고 있는 지를 주지시킬 필요가 분명히 있겠고.
공기를 불어넣어 소리를 내는 건반악기로는 이미 파이프 오르간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저 악기는 만드는게 아니라 '짓는다' 는 개념으로 생각해야 할 정도로 규모가 크고 일찍부터 종교음악의 전용 악기로 인식되어 있었다. 파이프 오르간의 원리를 축소해서 악기를 만들려는 시도는 예전부터 있어 왔는데, 기록상으로는 1816년(또는 그 이전)에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만들어진 것이 최초로 여겨지고 있다.
아코디언은 차츰 개량되면서 비록 오르간 만큼 장엄하고 다양한 소리를 내지는 못하더라도, 양손을 이용해 화음과 멜로디를 동시에 연주할 수 있다는 잇점을 보유한 데다가 휴대도 간편한 덕에 서민적인 악기로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한국에서는 흔히 오른손에 피아노 건반처럼 흑백건이 배열된 키보드 아코디언이 많이 쓰이고 있는데, 해외에서는 오른손 부분도 왼손과 마찬가지로 동그란 버튼이 배열되어 있는 버튼식 아코디언의 사용 빈도도 높은 편이다. 오히려 악기의 종류로 따지면 버튼식 아코디언이 더 다양하고 변종도 많이 파생되었고.
아코디언이 러시아로 넘어가서 개량된 형태가 가르모니(Garmoni)와 바얀(Bayan)인데, 이들 악기는 발랄라이카를 비롯한 민족악기들이 주가 되어 편성되는 민족관현악단 뿐 아니라 붉은 군대 합창단의 기악 반주로도 많이 쓰이고 있어서 러시아 음악을 즐겨듣는 이들에게는 매우 친숙한 악기다.
가르모니가 비교적 작은 사이즈에 한결 가벼운 소리를 내는 악기라면, 바얀은 크기도 가르모니보다는 더 크고 버튼 수도 많아 넓은 음역대를 지니고 있는 악기다. 이러한 장점 때문에 소련 성립 후에도 여러 크기로 개량된 발랄라이카와 함께 민족관현악단의 필수 합주 악기로 편입되었고, 기교 면에서도 과시적인 곡들이 많이 나와 독주 악기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2차대전 후 소련의 위성국이나 주변 사회주의 국가들에도 보급되어 지금도 쓰이고 있다.
(*북한의 조선인민군 공훈국가합창단은 흔히 기악 반주가 따라붙어 공연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는데, 약 10여년 전만해도 서양식 관현악단이나 취주악단이 흔히 반주를 맡았었다. 그러다가 요즘에는 붉은 군대 합창단의 그것처럼 소어은금-중어은금-대어은금 세 종류로 개량한 민족발현악기인 어은금과 아코디언들이 현악 파트를 대신하는 식의 악단이 반주를 맡고 있다. 한술 더 떠 바얀 교측본까지 발간하고 자체적으로 악기까지 생산하고 있다는데, 러시아-소련 음악이 북한에 아직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다만 바얀이던 아코디언이건, 그 자체로 효과적인 독주를 할 수 있는 악기이긴 하지만 관현악과 협주시키는 작품을 만들 경우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음량이 그리 크지는 않은 악기라는 점인데, 이 때문에 아코디언 협주곡은 그 수가 그다지 많지 않다. 아코디언 종주국인 독일에서는 헤르만 칠허나 후고 헤르만이 시도했었고, 미국에서는 아르메니아계 작곡가인 앨런 호바네스가 쓴 것도 있다. 그리고 윤이상도 트로싱엔 음악제의 의뢰로 아코디언 독주와 현악 4중주를 위한 소협주곡을 쓴 바 있다.
심지어 북한에서도 '결전의 길로' 라는 전쟁가요를 주제로 한 아코디언 협주곡(리한우 작곡. 북한에서는 아코디언을 '손풍금' 이라고 함)이 작곡된 바 있다. 굳이 아코디언에 한정짓지 않는다면, 아스토르 피아소야 작곡의 반도네온 협주곡이나 이번에 소개할 바야니스트 겸 작곡가 니콜라이 차이킨(Nikolai Chaikin, 1915-2000)의 바얀 협주곡도 같은 범주에 넣을 수 있는 곡들이다.
차이킨은 우크라이나의 하르키우(러시아어로는 하르코프) 태생으로, 어릴 적부터 독학으로 바얀을 익혔다. 이후 키에프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음악 이론, 작곡을 배웠는데, 차이킨이 재학하고 있을 때 음악원에 소련 최초로 민족악기 학과가 개설되었다. 이어 바얀 합주단도 창단되어 활동하기 시작했고, 차이킨은 어려서부터 친숙했고 나름대로 통달하고 있던 그 악기를 위한 곡을 쓰기 시작했다.
1952년에는 바얀과 서양 관현악을 협주시키는 아이디어로 협주곡을 작곡했는데, 이후에도 한 곡을 더 썼다고 하지만 들어보지는 못했다. 2관 편성의 정규 관현악을 쓰되, 금관악기는 호른 4대와 트럼펫 2대, 트롬본 1대로 제한해서 음량이 그리 크지는 않은 바얀과 균형을 맞추려고 한 것 같다.
이 곡은 작곡과 초연이 이뤄진 해에 재빨리 러시아 국영 음반사인 멜로디야(Melodiya)에 녹음됐는데, 독주는 차이킨의 제자였던 유리 카자코프(Yuri Kazakov)가 맡았고 관현악은 베로니카 두다로바(Veronika Dudarova) 지휘의 모스크바 지역 교향악단(Moscow Region Symphony Orchestra)이 따라붙어 연주했다.
이 음원을 낙소스에서 디지털 음원용으로 복각해 낙소스 클래시컬 어카이브로 풀었는데, 물론 23분 정도인 바얀 협주곡-아코디언 협주곡으로 표기되어 있음-만 있는 것은 아니고 러시아 민족관현악단을 위한 발랄라이카 협주곡이나 모음곡, 소품이 같이 수록되어 있다(음반 번호: 9.8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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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킨은 여타 소련 '주류 작곡가들' 과 마찬가지로 비교적 보수적인 작풍의 소유자였던 것 같은데, 이 곡도 고전적인 빠름-느림-빠름 3악장 협주곡 형식과 고향인 우크라이나의 민속음악 요소에 뿌리박은 토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독주 바얀에 요구하는 기교는 꽤 고난이도인데, 양손을 이용해 대위법 진행을 보여주거나 바얀 특유의 묵직한 베이스 음을 사용해 장중한 음향까지 만들어내는 1악장의 카덴차가 특히 압권이다.
이후에도 차이킨은 바얀을 위한 곡을 계속 만들어냈고, 1970년대에는 유네스코 산하 국제 아코디언 회의의 소련 대표와 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소련 붕괴 후, 여타 많은 작곡가들이나 바야니스트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갑작스러운 생활고를 겪게 되었다. 타계하기 불과 며칠 전에 가진 마지막 인터뷰에 의하면 노인 연금과 딸이 벌어오는 돈을 합쳐도 한 달에 100달러가 못되는 돈으로 겨우겨우 생활하고 있었다는데, 거기에 뇌졸중과 그 합병증이었던 언어 장애와 시각 장애로 고통받았다고 한다.
*아코디언 관련 세계 최대 사이트인 'accordions.com' 에 실린 차이킨의 마지막 인터뷰 전문: 클릭 (영어)
차이킨 뿐 아니라 많은 바얀 음악 작곡가와 바야니스트들도 소련 붕괴 후 많은 국영 민족악단들이 해체되거나 단원들을 감축하면서 일자리를 잃었는데, 독재 정권 치하에서 관제용으로 이용된 민족음악이 정권의 붕괴로 인해 존재 가치가 크게 떨어지면서 빚어낸 비극이었다. 그리고 이 곡의 연주 빈도도 지금까지 그리 높지 않은 모양인데, 바야니스트나 바얀을 다룰 줄 아는 아코디어니스트들의 활발한 연주로 리바이벌을 기대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