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은 지금껏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도시였고, 늘 '언젠가는 가보고 싶다' 는 생각을 담아두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한국에서 유일하게 부산대학교 도서관에만 소장된 자료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그것을 핑계로(???) 홀로 부산 여행을 떠날 기회를 잡았다.
독일문화원 수업이 끝난 바로 다음날인 6월 25일 아침, 가방에 여벌옷과 클리어 파일, 여행용으로 작성한 대강의 일정을 적은 노트, 그리고 도시락을 채워넣고 집을 나섰다. 하지만 출발부터 운이 별로 좋지 않았는데, 지하철이 연착되는 바람에 예매한 8시 30분 차를 타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규정대로 20% 떼이고 환불받은 뒤 9시에 출발하는 우등고속 표를 끊었고. 덕분에 초과비용 만원 발생. lllorz
돈이 더 깨진 것은 꽤 뼈아픈 타격이었지만, 그래도 그 덕에 우등 1인석에서 편하게 갈 수 있었다. 무려 4시간 30분을 달려야 하는 여행이었으니. 중간에 들른 휴게소에서 도시락으로 싸갔던 유부초밥을 이른 점심으로 허겁지겁 먹어치운 뒤, 다시 절반 남은 거리를 달려 노포동 터미널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출발할 때도, 영남 지방은 중부 지방보다 훨씬 더울 거라는 예보를 확인했었다. 하지만 체감상 느낀 더위는 훨씬 심했는데, 바다와 가까운 도시라 그런지 습함까지 더해 굉장히 후줄근한 뜨거움이었고.
내가 사전에 조사한 바로는, 마이비 카드를 제외하고 전국에서 쓸 수 있는 교통카드는 없다고 되어 있었다. 불행히도 내가 쓰는 교통카드는 유패스였고. 게다가 부산지하철이나 버스의 요금은 서울보다 대략 100원 더 비싼 수준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버스는 이용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일단 첫 번째 목표였던 부산대로 가기 위해 1100원짜리 1구간 보통권을 끊었다. 하지만 이게 바보짓이었던 것은 그 뒤에야 알았었고. 그저 생애 최초로 부산지하철을 타본다는 어설픈 철도덕후의 기대감만이 가득했다.
'부산대학앞' 이라는 역명답게 부산대는 역에서 꽤 걸어가야 나오는 곳이었다. 대학가답게 사람도 꽤 많았는데, 그 곳에서는 '표준어' 로 통할 강한 억양의 경상도 사투리를 계속 들으며 거리를 걷고 있으니 괜히 이방인이 된 듯한 느낌이었고. 그렇게 내리쬐는 햇볕과 습한 공기 속에서 약 15분 정도를 걸어 부산대 앞에 도착했다.
캠퍼스 규모는 꽤 큰 편이었는데, 역에서 캠퍼스 안 구석구석을 훑고 다니는 버스 노선이 존재할 정도였다. 하지만 약도를 가능한한 자세히 그려갔고, 일단 걸어갈 정도는 되겠다는 생각에 집에서 꽁꽁 얼려온 물병을 비워가며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헤매는 일 없이 목적지인 제2도서관 앞에 도착했는데, 도서관 앞에는 부마항쟁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도서관에 들어가기 위해 주민등록증을 제시하고 일일이용증을 받았다.
찾고 있던 자료는 작곡가 윤이상이 아직 한국에 있을 때 쓴 피아노 3중주(1953)와 현악 4중주 제 1번(1955)의 초판본이었다. 내가 아는 한, 저 두 곡의 악보는 한국과 독일 어디에서도 재간행된 적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고. 그래서 굳이 부산까지 내려가서 악보를 구해야 했던 거였다.
1층의 보존서고에서 신청해 받은 악보는 그야말로 고문헌 그 자체였다. 종이는 누렇게 변색되어 단내가 풀풀 풍겼고, 특히 정식 제본판이 아닌 등사판으로 발행된 현악 4중주의 악보는 잘못 넘기면 종이가 떨어지거나 찢길 것 같이 되어 있었다.
일반인 이용자 신분이라 관외/관내 대출 모두 불가였던 탓에, 보존서고 안의 복사실에 악보를 맡겨 복사를 부탁했다. 4820원을 들여 두 악보를 모두 복사했고, 원본과 복사본을 체크한 뒤 클리어 파일에 복사본을 담아 도서관을 나왔다. 현악 4중주에서 31-39페이지가 뒤집히고 순서가 뒤죽박죽이 된 것을 제외하면 크게 문제가 되는 부분은 없었다(복사 과정의 실수가 아니라, 원본 자체가 그랬다).
물론 두 곡 모두 윤이상이 유럽 시절 쓴 작품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겠지만, 초기 가곡들과 함께 그가 천착한 전통음악과 서구 현대기법의 조합과 응용에 대한 정보를 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다. 개인적으로도 복사본을 바탕으로 컴퓨터 사보를 다시 해서 정서할 예정이지만, 그러기 전에 새롭게 편집한 악보가 나와줬으면 하는 바램이고.
(↑ 자료 인수 직후 바로 복사를 맡긴 탓에, 원본 커버는 찍지 못했다. 위 짤방들은 각 악보들의 복사본 커버들)
*반 년마다 한 권씩 나오고 있는 음악학술지 '음악과 민족' 제 35호에 '윤이상의 국내 활동기(1956년 이전)에 관한 자료연구' 라는 전정임의 논문이 실려 있다. 여기에 한국에 소장되어 있으면서도 지금껏 활발하게 거론되지 않았던 윤이상의 초기 작품이나 평문의 소재들이 일목요연하게 밝혀져 있는데, 혹시 이 분야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열람해 보기를 추천하고 싶다.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 그 다음을 노릴 차례였다. 그 다음이야, 위에 암시한 대로 부산지하철 전 구간의 완주였고.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