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골공원 근처는 서울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알겠지만, 공원 자체보다는 어르신들의 망중한 장소로 많이 활용되는 곳으로 유명하다. 불과 몇 발짝 지나서 젊은이들이 활보하는 종로 거리가 있다는 것도 묘하게 모순되는 듯하면서도 한데 어우러지는 독특한 풍경이고.
어르신들은 대체로 주머니 사정이 그다지 좋지 않으신 분들이 많은 걸로 아는데, 그래서인지 공원 주변의 식당들은 대부분 서울 도심에서뿐 아니라 서울 전지역을 통틀어 박리다매를 추구하는 것으로는 제일 가는 곳들이다. (심지어 대학가 밀집 지역을 비교해봐도 절대 꿀리지 않는다.)
아직 노년기가 한참 남은 나이긴 하지만, 나도 개인적으로 그런 식당들 중 1500원짜리 해장국집의 단골 아닌 단골로 드나드는 중이다. 대학을 졸업하기는 했지만 직업도 없고, 하루 빨리 유학을 빙자해 이 답없는 나라를 떠나고 싶어하는 늙다리 니트에게도 그러한 식당은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고.
해장국집 말고 그 쪽을 다니다가 눈에 띄는 곳이 몇 군데 더 있는데, 그 중에 '유진식당' 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좀처럼 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왜인지는 모르겠다. 물론 어르신들의 회포를 푸는 장소로 활용되기 때문에 굉장히 시끌벅적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런 분위기는 비단 유진식당 뿐 아니라 공원 주변의 거의 모든 식당에도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분위기고.
아무튼 돈도 별로 없는데 갑자기 돼지고기와 국물이 땡기길래, 여남은 돈을 쥐고 나가봤다.
도착한 시간은 초저녁이었지만 여름이라 아직까지 하늘은 밝은 편이었다. 하지만 해가 떨어지기 전임에도, 이미 바깥 테이블까지 들어찬 손님들은 술잔을 기울이며 좀처럼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있다가 다시 오자고 하면서 목적도 없이 일대를 거닐었다.
목이 말라서 종로 쪽으로 나와 큰길가의 다X소에 들어갔는데, 식품 코너를 힐끗 보니 런천미트와 어육소시지-천하장사 그런거 아니라 분홍색 소시지와 야채소시지-가 각기 1000원에 팔리고 있었다. 한술 더떠 편의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메추리알이나 달걀 염지한 것까지 같은 가격에 팔고 있었고. 케첩이나 마요네즈, 컵라면, 당면, 참치캔 같은 것까지 팔 때도 그리 놀라지는 않았는데, 아무튼 신기했다.
약간 어둑어둑해질 즈음에 다시 유진식당으로 돌아왔는데, 사람은 더 많아져 있었다. 야외 테이블도 몇 개 더 생겨있었고, 심지어 외국인 손님들을 대동한 일행까지 보였다. 식당 안과 밖 사이의 주방 공간에서는 노익장을 과시하는 주인장분을 비롯한 종업원들이 부침개를 지지고 냉면을 말고 수육을 썰며 굉장히 분주하게 일하고 있었다.
언제 자리가 나려나 하고 막연히 기다리기도 뭣해서, 주문을 받으러 안팎을 왔다갔다 하는 분-주인장 아드님 되신다고 함-께 '혹시 가게 안에 자리가 있습니까' 라고 물어보니 있다고 해서 후다닥 들어갔다.
들어가서 자리에 앉기도 전에 돼지머리국밥(2500\)과 돼지수육 소짜(3000\)를 급하게 시켰다. 가능하면 빨리 먹고 나가자는 생각이었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주문한 음식들이 모두 나와서 꽤 놀랬다. '놀랬다' 는 음식 나온 속도에 놀랜거 외에 위의 음식들에 괄호로 표기한 가격일 수도 있겠는데, 미처 메뉴판은 찍지 못했지만 다른 블로그들에 친절하게 찍혀 있으니 검색의 생활화.
우선 돼지머리국밥. 개인적으로 돼지머리국밥은 외대 근처에서 먹었던게 지존으로 생각되는데, 이 집의 것은 오히려 부산에서 먹었던 돼지국밥의 그것처럼 국물이 사골국물처럼 희뿌옇고 기름기도 그다지 많지 않아보였다. 국물맛도 너무 짜거나 돼지누린내가 나거나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건더기까지 담백했다는 건 절대 아니다. 짤방에서도 보이지만 큼직큼직한 비곗살이 들어있는 것이 특히 그랬고.
돼지수육 소짜. 소짜라고는 해도 나름대로 먹을 만큼 담아준다. 비계 안붙은 살코기와 비계 위주의 부위를 딱 나눠서 담아낸 것도 흥미로웠는데, 다만 그 만한 가격대임을 입증하듯 밑반찬은 새우젓 무친 것과 깍두기밖에 없었다. 어차피 고기를 노리고 온 것이라 별로 신경쓰지는 않았지만.
망한 접사샷 1. 국밥에는 고기나 비계 건더기 외에도 특이하게 염통과 간 같은 내장까지 들어 있었는데, 국물이 좀 더 뜨끈뜨끈했다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그래도 가격이 가격인 만큼 큰 불평을 하기는 힘들고. 참고로 밥은 따로 나오지 않고 미리 말아져서 나온다.
망한 접사샷 2. 솔직히 국밥보다는 수육이 더 마음에 들었는데, 마음같아서는 막걸리 시켜서 안주로 먹고 싶었을 정도다. (소주는 소맥을 비롯해 마시고 난 뒤 대부분 뭔가 뒤끝이 안좋아 패스) 참고로 유진식당을 비롯해 탑골공원 주변 식당에서 술값은 소주고 막걸리고 할 것없이 병당 2000원 수준이다.
사실 유진식당에서 가장 유명한 메뉴는 평양식 물냉면이라고 한다. 심지어 훨씬 비싼 우X옥이나 을X면X의 아성까지 위협한다는 평도 있는데, 다만 물냉면도 나이든 주인장 분이 없을 때는 맛이 들쭉날쭉해 어르신들이 가끔 짜증을 내거나 말다툼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고. 개인적으로는 오이 꾸미를 절대로 빼달라고 해야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손님들의 대부분은 예상했던 대로 어르신들이었지만, 그 중에는 위에 잠깐 쓴 것처럼 외국인 몇 명에 낙원상가에 들렀을 젊은이들-첼로를 옆에 놓고 냉면을 먹던 여학생도 보였다-이 섞여 있었다. 가게 분위기도 예상했던 것처럼, 혹은 그 이상으로 시끄럽고 혼잡했고. 위생이나 혼잡함, 시끄러움에 약한 이에게는 비추일텐데, 값싸게 술자리나 식사를 해결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가게이기도 하다.
유진식당 오른편으로 난 골목을 거닐어보면 삼계탕을 3000~5000원에 팔거나 하는 등 마찬가지로 가격에 눈이 커지는 가게들이 계속 보이는데, 복날이고 뭐고 챙길 겨를도 없이 어학 공부에 매달리고 장염크리까지 당해서 제대로 식사도 못하고 골골댔던 터라 갑자기 닭고기도 땡기고 있고. 언제 날잡아서 그쪽 삼계탕도 정ㅋ벅ㅋ하고 싶다. 물론 싼 가격에 반비례해 작은 크기의 닭을 쓸 확률이 높기는 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