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만 교향곡의 경우, 개인적으로는 물론 좋아하는 곡이긴 하지만 '관현악 편성만 좀 더 다듬고 신경썼다면 더 좋았을 것을' 이라는 아쉬움이 계속 남는 작품들이다. 실제로 공연 때 꽤 많은 첨삭이 가해지는 교향곡들 중 상위권을 점하고 있고, 그 때문에 지휘자나 관현악단 모두 일종의 '짐' 으로 여기는지 그리 큰 인기는 얻지 못하고 있다.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아예 '새롭게 관현악 편곡을 가한' 사람이 바로 구스타프 말러였는데, 그 에피소드는 이 포스팅에 이미 장황하게 주절거렸으므로 생략.
하지만 말러가 편곡 혹은 보완한 작품들은 대개 마이너 레이블을 통해 발매되었고, 더군다나 슈만 교향곡 전집의 경우에는 처음 손을 댄 알도 체카토 지휘의 베르겐 필 음반이 사실상 유일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국내에 정식 수입이 되었는지, 혹은 됐는데 이미 절판된건지 하여튼 구하기가 엄청나게 힘든 상황에서 데카를 통해 올해 초에 발매된 전집은 꽤 구미가 당기는 물건이었다.
리카르도 샤이(Riccardo Chailly)는 현재 50대 지휘자들 중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인물들 중 한 사람인데, 아버지가 작곡가였던 탓에 일찍부터 음악을 접하고 배울 수 있었다. 결국 지휘자로 진로를 정하고 스무 살 때부터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부지휘자로 밀라노 라 스칼라 오페라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1978년에 라 스칼라에서 공식 데뷰한 뒤 빈 국립 오페라단이나 코벤트 가든 왕립 오페라단,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단,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 등 유럽과 미국의 주요 오페라단과 작업하는 등 엄청나게 빠른 출세 가도를 달렸다.
물론 오페라 지휘에만 전념한 것은 아니었고, 콘서트 지휘자로서도 굉장한 경력을 일찍부터 보유하기 시작했던 것도 주목할 만한 성과였다. 특히 1980년에 불과 27세의 나이로 빈 필을 지휘해 데카에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을 남긴 것은 굉장한 화제를 불러모았다. (최근에 루체른에서 같은 나이로 빈 필을 처음 지휘한 구스타보 두다멜도 아직 녹음 작업은 하지 않고 있음)
샤이가 첫 상임 직책을 맡은 관현악단이 1982년에 맡게된 (서)베를린 방송 교향악단(현 베를린 도이치 교향악단)이었는데, 이 악단과 브루크너 교향곡들을 비롯한 굵직한 대곡들을 데카에 녹음하면서 '무서운 신예' 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어 맡게 된 암스테르담의 왕립 콘서트허바우 관현악단에서도 마찬가지로 데카 전속으로 여러 녹음들을 진행했는데, 베를린 시절 끝내지 못했던 브루크너 교향곡 0~9번 전집 녹음과 말러 교향곡 전집(베를린 방송향과 녹음한 쿠크 보완판 10번을 포함함), 슈만 교향곡 전집, 브람스 교향곡 전집, 힌데미트의 실내음악 전집, 메시앙의 '투랑갈릴라 교향곡' 과 바레즈의 관현악곡 녹음 등 굵직한 프로젝트들을 연속으로 완성하는 기염을 토했다.
물론 이런 대곡들 외에도 쇼스타코비치의 영화음악이나 여타 '기분 전환용' 음악들을 모은 '재즈 앨범' 과 '댄스 앨범' 이 히트하면서 화제가 되었고, 최근에는 데카 오리지널스로 재발매될 정도로 음반사의 간판 녹음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또 샤이의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인정된 기본 관현악 레퍼토리들 외에도 특이한 곡들을 음반화하는데도 적극적인데, 베를린 시절부터 다름 아닌 오페라 전문 작곡가로 주로 알려진 푸치니의 관현악 작품들을 모은 음반을 취입하기도 했다(2006년에 오리지널스 시리즈로 재발매됨). 이 작업에서 파생되어 콘서트허바우 다음으로 상임이 된 밀라노 주세페 베르디 교향악단과 로시니-베르디-푸치니 삼연성(???)의 미발표 혹은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만 모아 빼곡히 담아낸 '디스커버리즈' 시리즈를 발매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콘서트허바우와 말러 교향곡 전집을 녹음할 때도 낱장 발매 때마다 말러와 연관있는 레퍼토리들을 끼워넣는 기획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베르크의 피아노 소나타 관현악 편곡판(1번 커플링)이나 디펜브로크의 관현악 반주 가곡 '크나큰 심연 속에서' (7번 커플링)같은 곡들은 특히 레어 아이템으로 꼽히고 있다.
샤이가 네 번째로 맡고 있는 악단이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인데, 이 악단과 녹음해 최근에 내놓았다고 위에 쓴 것이 바로 슈만-말러 교향곡 전집이다.
ⓟ 2007 & 2008 Decca Music Group Limited
샤이는 게반트하우스 카펠마이스터 공식 취임 연주회에서 대선배 멘델스존의, 그것도 연주가 꽤 뜸한 편인 교향곡 2번 '찬미가(Lobgesang. 이 실황으로 제작된 데카 앨범에는 교향 교성곡이라고 주기됨)' 를 메인 레퍼토리로 골라 화제가 된 바 있다. 게다가 이번에는 사상 두 번째로 이런 특이한 컨셉의 전집을 완성한 것이었고. (샤이 자신으로서도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에 걸쳐 슈만 원전판으로 완성한 콘서트허바우 녹음에 이은 두 번째 전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들어 보니 전반적으로 꽤 빠른 템포를 잡고 있지만, 그렇다고 사운드가 소위 '정격 연주' 스타일로 가벼워진 것도 아니었다. 게반트하우스 특유의 묵직하고 그윽한 음색을 유지하면서도 거기에 활기나 정열을 불어넣는 일종의 하이브리드 타입 해석이었는데, 특히 관악부에 대대적인 개작을 가한 말러의 의도를 부각시키기 위해서인지 그 방면의 연주 효율을 강조하고 있다. 속지의 해설도 말러 전문 연구가이자 10번의 보완판 개정 작업에도 참가한 바 있는 데이비드 매튜스(David Matthews)가 슈만 원전과 말러 개정의 차이점을 대략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말러의 보완 작업에 100% 찬성하지도 않고 있지만, 이러한 작업이 가지는 의의는 나름대로 인정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다. 예상 외로 인상이 좋은 연주여서 샤이가 또 이런 시도를 한 것이 있나 하고 찾아봤는데, 콘서트허바우와 녹음한 말러 교향곡 낱장 시리즈 중 3번의 여백에 이런 컨셉의 작품이 보너스로 수록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도 질렀다.
ⓟ 2004 Decca Music Group Limited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들 중 2번(서곡과 론도, 바디네리)과 3번(아리아, 가보트)에서 발췌해 4악장 형식의 모음곡을 짜서 '바흐 모음곡(Bach-Suite)' 이라고 이름지은 곡이었는데, 물론 말러가 구성에만 손댄 것이 아니라 관현악 편곡도 새로 했음은 당연한 것이었고. 다만 슈만 교향곡에서처럼 대담한 효과는 많이 자제한 편이었는데, 굳이 특이한 것을 찾으라고 하면 현악부에 피치카토를 많이 사용한 것과 마지막 가보트에서 밸브 트럼펫의 성능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개작 정도가 되겠고.
말러가 직접 뉴욕 필을 지휘해 초연했을 때는 통주저음의 하프시코드 대용으로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의 해머와 현 사이에 종이를 대놓고 치면서 지휘했다고 하는데, 몇십 년 뒤에 나오는 존 케이지의 프리페어드 피아노 아이디어를 선취한 셈이었다. 하지만 샤이는 곡 전체의 해석을 말러의 체취 보다는 바흐라는 원전에 맞추었는데, 그래서 말러가 했던 임시변통 대신 진짜 하프시코드를 오르간과 함께 통주저음 악기로 사용했다.
슈만 때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샤이가 템포를 좀 빨리 잡은 것이 눈에 띄는데, 아무리 말러가 낭만적인 덧칠을 했다고 해도 실제 연주에서까지 낭만성을 강조해 바흐 음악 특유의 구성미까지 해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같아 보인다. 서정성이 강조되는 3악장 아리아의 경우에도 현악기에 표정을-아마 악보의 세밀한 지시에 따라-많이 집어넣은 것은 말러의 의도겠지만, 템포는 너무 느리지 않은 선에서 설정해 지나치게 늘어지는 것을 막고 있다.
이외에도 말러가 손댄 기성 곡들은 꽤 많은 편인데, 베토벤 교향곡의 경우 3번부터 9번까지를 손댔었고 슈만도 이번 교향곡 전집에는 없는 극음악 '만프레드' 서곡, 슈베르트 교향곡 8번(구 9번), 베토벤 현악 4중주 11번 '세리오소', 슈베르트 현악 4중주 14번 '죽음과 소녀',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베버의 미완성 오페라 '세 사람의 핀토' 등을 들 수 있다.
개인적으로 샤이가 이런 말러 보완판의 녹음을 좀 더 진행했으면 하는데, 특히 베토벤 교향곡 9번의 그 무시무시하다는(!) 편곡판이나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현악 4중주를 합주용으로 편곡한 것들이 데카에서 출반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갑자기 들고 있다.
덧붙여 샤이는 말러 보완판 외에 루치아노 베리오의 편곡 작품들도 데카에서 취입한 바 있는데, 베리오 하면 '세쿠엔차' 같은 전위적 현대음악의 작곡가만으로 여기기 쉽지만 의외로 다양한 시기의 음악들을 편곡하는 데도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한 인물이었다.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킨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 의 3막 미완성분도 세계 최초 녹음을 샤이가 했고-'푸치니 디스커버리즈' 의 맨 마지막에 수록됨-, 아예 베리오가 관현악 편곡한 작품들만 모은 'Trascrizioni orchestrali' 도 레어템의 가치가 충분한 물건이다.
세계적으로 불황인 음반계에서도 어떻게든 서로 살아남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계속하고 있는데, 묻혀졌거나 숨겨진 레퍼토리들을 발굴해내는 것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여겨지고 있다. 과연 샤이가 얼마나 더 흥미진진한 레퍼토리들을 찾아내 공연하고 음반화해 내놓을 지 기대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