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후 소련의 위성국이 된 동유럽 국가들 중 그나마 '현대예술' 에 관대했던 나라들이 폴란드와 유고슬라비아였다. 물론 두 나라가 그렇다고 예술에 대한 무한한 자유를 인정한 것은 아니었고, 반체제적이라고 여겨진 예술이나 예술가에 대해서는 활동 금지나 국외 추방, 투옥 등의 조치를 취하기도 했었고.
폴란드의 경우 '바르샤바의 가을' 이라는 국제 현대음악제를 사회주의 정권 치하에서 개최해 꽤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저 음악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북한의 조선국립교향악단도 1986년에 출연해 윤이상과 셰로츠키의 작품을 공연한 바 있다. 고국에 국한하지 않고 전세계의 현대음악에도 굉장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루토스와프스키나 펜데레츠키 등의 작곡가들도, 망명 등의 비상 수단을 택하지 않고도 작품 활동을 진행할 수 있었다.
물론 현대음악 작곡가들 외에도 폴란드에는 다양한 작풍을 가진 인물들이 존재해 왔는데, 좀 통속적인 계열로 여겨지는 작곡가들도 있다. 이번에 쓸 소재도 그 쪽 계열 인물로 여겨지는 이의 작품이다.
예전에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 정기연주회를 갔을 때, 음반으로도 들어보지 못한 곡을 듣는 행운을 누린 바 있다. 그것도 하프 두 대를 위한 협주곡이라는 꽤 흔치않은 편성의 곡이었는데, 이 곡의 음반이 있다는 것을 안 것은 겨우 두 달 전이었다.
작곡자는 '말레키' 라고 표기되어 있었지만, 이는 알파벳 스펠링을 제대로 하지 않은 오기였고 실제 폴란드어 발음과 표기를 감안하면 '마치에이 마우에츠키(Maciej Małecki, 1940-)' 가 맞다고 한다. 바르샤바 태생으로, 고향 음악원에서 카지미에슈 시코르스키와 나탈리아 호르노프스카에게 각각 작곡과 피아노를 배운 뒤 1965년 졸업했다.
졸업 후에는 미국 로체스터의 이스트먼 음악원에 유학했고, 귀국 후 1970년대부터 본격적인 작곡 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작품 목록을 보면 초기에는 발레와 오페라, 극음악, 영화음악 등 무대공연 작품을 주로 쓴 것으로 보이는데, 대략 1980년대 중반부터 소위 '절대음악' 계열의 기악곡들도 창작하기 시작했다.
내가 공연장에서 들었던 '두 대의 하프와 현악 합주를 위한 고전 양식의 소협주곡(Concertino in an Ancient Style for two harps and string orchestra)' 도 1988년 작품인데, 초연은 같은 해에 우어줄라 마주레크와 수산나 밀도니안의 독주에 누르한 아르만 지휘의 실롱스크-독어로는 슐레지엔, 영어로는 실레지아라고 하는 지명-국립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가세해 행해졌고, 1993년 살비 출판사에서 악보가 출판되었다고 되어 있다.
제목에 표기된 '고전 양식' 은 바로크 시대의 음악 어법을 뜻하는데, 일종의 오마주+패러디 성격이 짙은 작품이다. 1악장 첫머리부터 그런 느낌을 강하게 내비치고 시작하는데, 특히 안토니오 비발디의 협주곡집 '화성의 영감(L'estro armonico op.3)' 중 가장 유명한 축에 속하는 5번 협주곡을 자주 인용하고 있다.
하지만 마우에츠키가 물론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로크 양식만 좇아간 것은 아닌데, 관계 조성(key)보다 먼 곳으로 후딱후딱 넘어가는 것에서부터 프로코피에프나 프랑스 6인조 등이 취한 신고전주의 스타일을 반영하고 있다. 가장 '깨는' 대목은 2악장인데, 특정 음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집요하게 반복하는 변주곡 형태인 파사칼리아(passacaglia) 양식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하프 두 대가 처음 제시하는 파사칼리아 음형부터 바로크 시대에는 상상조차 못했을 무조풍으로 되어 있고, 이후 진행하는 곡의 양상도 여기에 기반해 바로크 시대와 현대음악을 넘나드는 기이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바이올린의 약간 음산한 하모닉스라던가 하는 '특수효과' 들도 이러한 이미지 강화에 이바지하고 있고.
공연을 본 뒤 이 곡이 담긴 CD나 여타 음반은 없는지 찾아다녀 봤지만, 소득은 없었다. 그러다가 아르코예술정보관에 유료회원으로 등록한 뒤 자료실을 눈이 벌개지도록 뒤지다가 소장되어 있는 CD를 찾아낼 수 있었다. 프랑스 음반사인 파반(Pavane)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마우에츠키의 작품 외에도 각각 프랑스 고전과 근대를 대표하는 작곡가들인 프랑수아-조세프 고섹과 장 프랑세의 하프 두 대+관현악용 협주곡에 드뷔시와 라벨의 하프 한 대 협연곡들까지 모아놓은 음반이었다.
ⓟ 1996 PAVANE Records
독주는 마우에츠키 곡의 초연에서 제 2하피스트를 맡은 바 있는 아르메니아계 이탈리아인 수산나 밀도니안(Susanna Mildonian)과 프랑스인 카트리느 미셸(Catherine Michel)이 맡았고, 반주는 툴루즈 국립 실내 관현악단(Orchestre de Chambre National de Toulouse)이 담당했다. 수록곡 모두 아주 간소화한 편성으로 연주/녹음했는데, 지휘도 악장(콘서트마스터)인 알랭 모글리아(Alain Moglia)가 바이올린을 켜면서 맡았다고 되어 있다.
밀도니안과 미셸 모두 파리 국립음악원의 하프 명교수였던 피에르 자메의 문하생이었다고 되어 있는데, 지금도 프랑스는 재능있는 하피스트들을 많이 배출하는 나라로 유명하다. 그런 배경도 있기 때문인지 연주와 녹음도 꽤 깔끔하고 명쾌하게 되어 있는데, 코리안 심포니 공연에서 중편성 현악 합주를 기용해 약간 중후한 맛을 냈던 연주와 흥미있는 대비를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아르코에서 대출해 들은 뒤 아예 이 CD를 사려고 여러 음반 매장들과 중고음반점 등을 계속 기웃거리고 있는데,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더군다나 이 마우에츠키 곡은 이 CD 외에 따로 음반이 더 나왔다는 소식도 없는 터라, 언젠가는 구할 수 있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만 갖고 계속 돌아다니는 중.
그리고 마우에츠키는 1992년에 '일렉트릭 하프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을 썼다고 하는데, 아마 국내 하피스트 곽정이 '하피스트 K' 라는 이름으로 크로스오버 활동을 했던 때 연주했던 악기를 위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전기의 힘으로 소리를 증폭/변형시키는 악기용으로 작곡한 협주곡은 과연 어떤 스타일의 곡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