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국가 원수는 한국 등 다른 민주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법적으로는 대통령이다. 하지만 독일의 대통령은 한국이나 미국과 달리 그다지 큰 실권을 발휘하지는 않고 있고, 일종의 상징적인 권위로 해석되고 있다.
오히려 가장 정치적으로 부각되는 직책이 총리(Reichskanzler)인데, 1949년에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이 수립된 뒤 지금까지 총리를 맡은 정치인은 모두 여덟 명이다. 현재 총리는 독일 역사상 최초로 여성 정치인인 앙겔라 메르켈이 맡고 있는데, 최근에는 속옷 광고에 출연했다고 해서 해외토픽 등에 소개된 바 있었고.
다섯 번째로 총리를 역임했던 인물이 사민당(SPD) 소속의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dt, 1918-)였는데, 본업은 정치인이긴 했지만 어떤 취밋거리가 집권 말기와 이후에 꽤 흠많무인 물건으로 나온 바 있었다.
슈미트는 1982년 10월 1일에 경제 정책 실패와 그로 인한 야당의 압력이 더해져 헬무트 콜에게 총리직을 넘겨야 했는데, 독일연방공화국 역사상 최초로 불신임 투표를 통해 실각한 정치인이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바로 그 해에 EMI에서 그의 이름이 찍힌 음반이 나왔는데, 다름 아닌 '피아니스트' 로 연주 녹음한 물건이었다.
ⓟ 1982 EMI Records Ltd.
어릴 적부터 슈미트는 취미로 피아노를 배웠고, 정치인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을 때도 틈만 나면 바흐나 모차르트의 작품들을 음반으로 듣거나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물론 이렇게 취미삼아 음악을 한 정치인들은 꽤 있지만, 그것을 음반으로 만든다는 기획 자체가 꽤 파격적이었고.
이 '총리님' 을 끌어들인 인물이 독일 피아니스트인 유스투스 프란츠(Justus Frantz)였는데, 프란츠의 본업은 피아니스트였지만 학생 시절 사민당과 관련된 정치 모임을 주도하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사민당 출신의 총리 슈미트와도 죽이 잘 맞았다는데, 게다가 크리스토프 에셴바흐(Christoph Eschenbach)와 피아노 듀엣 활동도 하고 있어서 셋이 모임을 가지는 것도 어렵잖은 일이었다고 한다.
프란츠와 에셴바흐는 휴양지로 유명한 카나리아 제도에서 휴가를 보내면서 슈미트와 본격적으로 '음반 작업' 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는데, 일단 피아노 독주의 협주곡이 아니라 두 대 이상의 피아노가 관현악과 협주하는 레퍼토리를 가지고 녹음을 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골라진 곡이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7번과 10번 두 곡이었는데, 전자는 피아노 세 대가, 후자는 두 대가 독주로 연주하는 곡이었다. 특히 7번의 경우 세 번째 피아노 파트는 상대적으로 그리 어렵잖게 쓰여져 있는데, 슈미트가 그 파트를 맡기로 했다. (10번의 경우는 에셴바흐와 프란츠만 독주하기로 함)
관현악단은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London Philharmonic Orchestra)가 기용되었고, 에셴바흐가 첫 번째 피아노 파트의 독주를 겸하며 지휘했다. 그리고 앨범을 발매하면서 수익금 일부를 국제 인권단체인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에 기부한다고 발표했는데, 정치인이 메이저 레이블에서 연주가로 이름을 올려 음반을 발매한다는 것이 자동적으로 홍보 전략으로 연결되어 꽤 많은 음반이 팔렸다고 한다.
정치인의 찬조 출연이라는 점 외에도 10번의 경우 음악적으로도 흥미거리가 있는 악보를 써서 녹음했는데, 원래 저 곡은 오보에와 바순, 호른 각 한 쌍씩과 현악 합주라는 그 당시의 전형적인 관현악 편성으로 쓰여졌다. 하지만 공개 초연 때는 모차르트 자신이 특별히 애호했던 클라리넷 한 쌍에 '축전용' 악기들인 트럼펫 두 대와 팀파니까지 가세한 '풀 오케스트라' 로 가필되어 공연되었다.
그래서 베렌라이터의 모차르트 신전집 악보에도 10번은 간소한 편성의 버전과 (당시로서는) 풀 편성의 버전 양 쪽이 모두 수록되어 있는데, 대개 전자를 택하는 경우가 많지만 에셴바흐와 프란츠는 굳이 후자를 택해 연주한 것이었고.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 슈미트는 일선 정치 활동을 모두 접고 '디 차이트' 라는 언론사의 편집장을 맡아 언론인으로 새롭게 경력을 시작했는데, 정치인 시절보다는 좀 더 시간이 남아돌았는지 어쨌는지 후속 작업까지 계획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바흐의 클라비어 협주곡이 물망에 올랐는데, 계획할 당시 바흐 탄생 200주년이 임박했다는 것도 있었고 슈미트 자신이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나 인벤션 등을 즐겨 연주했다는 것도 플러스 요인이었다. 모차르트 때와 마찬가지로 두 대 이상의 클라비어가 협연하는 곡들이 네 곡 골라졌고, 슈미트가 그 중 한 곡에서 협연하기로 결정되었다.
녹음은 예전처럼 다른 나라가 아닌 독일 현지, 특히 슈미트의 고향이기도 한 함부르크에서 진행되었는데, 관현악단도 함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Hamburger Philharmoniker)가 따라붙었다. 피아니스트는 예의 프란츠와 에셴바흐 외에 당시로서는 젊은 축에 속했던 게르하르트 오피츠(Gerhard Oppitz)가 추가로 기용되었고.
녹음된 곡은 네 대의 클라비어 협주곡(BWV 1065)과 두 대의 클라비어 협주곡 두 곡(BWV 1060, 1061), 세 대의 클라비어 협주곡(BWV 1063)이었다. 모차르트 때와 마찬가지로 에셴바흐가 모든 곡에서 독주와 지휘를 겸했고, 프란츠도 모든 곡의 독주자로 연주했다. 여기에 오피츠가 세 대와 네 대에서 두 번씩, 그리고 슈미트가 네 대에 참가해 연주했다.
이 두 번째 프로젝트는 예정대로 바흐 탄생 200주년인 1985년에 도이체 그라모폰(DG)의 음반으로 발매되었는데, 예전과 달리 특정 단체에 대한 수익금 기부 같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평범한 클래식 음반으로 발매되었음에도 전직 총리가 참가했음은 음반 커버의 사진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었고. 속지에도 이 음반의 프로듀서였던 한노 링케가 곡에 대한 설명 대신 음반이 제작된 경위를 상세하게 써놓고 있다.
ⓟ 1985 Polydor International GmbH
EMI 음반 커버에서는 프란츠와 에셴바흐는 서있고 혼자만 피아노 앞에 앉아 짬밥과 쌀밥의 우월함을 과시했는데, 이번에는 그냥 나머지 세 피아니스트들과 함께 서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다만 혼자 팔짱끼고 카메라를 지긋이 야리는 간지 연출로 차별화시켰고. (사실 그것보다는 에셴바흐와 슈미트의 양복 저고리가 거의 비슷해 '커플룩' 의혹이 제기될 법하다...???)
사실 두 음반 모두 주역은 에셴바흐와 프란츠 두 사람이었고, 슈미트는 그다지 눈에 띄지는 않는 제 3피아노나 제 4피아노에서 연주했기 때문에 오히려 덜 두드러지고 있다. 다만 어설픈 솜씨로 음악을 망쳐버릴 공산이 큰 이런 작업에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연주와 녹음에 임했다는 것이 나름대로 굉장한 것이었고.
EMI에서는 아직 별 움직임이 없지만, 슈미트의 모국 소속이기도 한 DG에서는 2008년에 슈미트의 90세 생일을 맞아 자신들이 낸 음반을 'Kanzler und Pianist' 라는 제목으로 새로 디자인해서 독일 로컬반으로 재발매했다. 재발매반에는 특별히 잔드라 마이슈베르거가 제작한 다큐멘터리가 든 DVD가 특전으로 끼워져서 발매되었다고 하는데, 혹시 음반으로는 나오지 않은 다른 연주가 들어있지는 않은지 궁금할 따름.
독일에서 90세를 넘어 생존하고 있는 전직 서독 총리로는 슈미트가 유일하다고 하는데, 독일문화원에서 열람할 수 있는 독일 신문들 중에서도 '디 차이트' 의 90세 기념 특별 기사를 열람해서 대략의 동향을 알 수 있었다. 물론 나이 때문에 지팡이를 짚고 걷고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는 모습이었고, 총리 재임 시절에도 텔레비전 토론에 나가서까지 담배를 피울 정도였던 애연가 기질도 여전했다.
정치인이라는 위치의 인물들 만큼이나 좋고싫음이 극단적으로 엇갈릴 이들은 아마 없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도 저 슈미트라는 인물의 정치 경력에 대해서는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고, 알아보면서 치적과 실정을 가려낼 수도 있을 것 같고. 하지만 연주가 잘됐고 아니고를 떠나서, '피아니스트 슈미트' 라는 이색적인 케이스를 발견할 수 있던 것을 단순한 호기심이나 가십으로 치부할 수 있을런지.
*'클라시크악첸테' 라는 독일 사이트의 관련 음반 항목: 클릭 (당시 녹음 세션과 커버 사진 촬영 전의 모습 등 진귀한 사진들이나 슈미트의 음악과 관련된 최근 동향도 볼 수 있다. 다만 텍스트는 전부 독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