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이나 국수 등 식사류에 거의 올인하다시피 하는 취향 때문에 '오무라이스' 도 종종 찾는 메뉴인데, 다만 '오X토 토X토' 나 '포X노X' 같은 전문점에는 아직껏 가보지도 못했다. 밖에서 사먹어본 것도 생각해 보면 학교 학생식당 정도였고.
그래서 굳이 '오무라이스' 를 목표로 웹 이곳저곳을 뒤지다가 정보 하나를 찾아냈는데, 다소 막연했다. 서대문구청 근처 어딘가라고만 되어 있었는데, 가게 이름은 '에버그린' 이라고 되어 있었다. (다행히 가게 사진도 있었고, 전화번호도 사진의 간판에 표기되어 있었다.)
서대문구청 쪽은 서울 살면서도 한 번도 가볼 기회가 없던 곳이었는데, 신촌/이대 쪽에서 그럭저럭 가까운 거리라고 해서 2호선 신촌역에서 서대문구청 쪽까지 가는 교통편을 알아보고 가봤다. 신촌역 일대는 현재 버스전용차로 공사가 한창이어서, 마을버스 정류장도 3번출구에서 4번출구로 바뀌어 있었다. 목표 지점까지 가는 버스는 서대문03번.
다만 서대문구청/보건소 정류장에서 내리기 보다는, 그 다음 정류장인 동신병원/농협마트앞 정류장에서 내리는 것이 훨씬 빠르다. 정류장 주변에 병원과 마트가 없다고 해서 충격과 공포를 느낄 필요는 없는데, 일단 내리자마자 버스가 가는 방향으로 몇 발짝 걸으면 오른편에 골목길이 난 것을 볼 수 있다.
골목길 풍경. 그리 길지는 않고, 앞에 큰길이 보이면 다시 우회전하면 된다. 골목 끝 오른편에는 순대국집이 하나 있으므로, 체크해두고 가면 편리할 듯.
그렇게 꺾어서 나오면 대충 이런 풍경이 보일 것이다. 여기서 한 30미터 쯤 걷다 보면 오른쪽에 붉은벽돌 건물이 보이면서 하얀 바탕의 간판을 볼 수 있다. 그 직전에는 '홍은그린' 이라는 아파트로 들어가는 입구도 보이는데, 음식점 이름을 아마 이 아파트에서 따온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가게 앞 풍경. 노란색 경품 오락기가 앞에 놓여있고, 손님이 없을 때는 동네 아저씨들이 들락날락할 정도로 굉장히 소탈한 풍경을 보여주는 가게다. 딱 동네 호프집+경양식집 분위기. 하지만 가게 안의 인테리어는 대체로 깔끔한 모습이었다.
주방도 뻥 뚫려 있는 오픈키친 형태였고 왼쪽 밑에 보이는 커튼 쳐진 좁은 통로로 허리를 구부리고 들락날락해야 하는 구조라 서빙에 귀차니즘이 염려되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음식 등을 내올 때는 우선 다찌 비슷한 앞쪽에 올려놓은 뒤 통로로 빠져나와서 테이블까지 나르는 식으로 접객하고 있었다.
식사 메뉴판. 반대편에는 안주 메뉴판도 있지만, 어차피 밥먹으러 왔으니 안찍었다. 4500~7000원 선의 그다지 비싸지 않은 가격이었는데, 돈까스 등도 땡기기는 했지만 우선 오무라이스부터 먹어보기로 했다. 백세주로 시작하자는 메시지는 무시했다(...).
식사 메뉴를 시키면 우선 나이프와 포크, 숟가락 등 연장과 함께 전통적인 누런 수프가 나온다. 저질 짤방으로 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밀가루 크림수프 같지만, 곱게 간 당근 등의 야채도 들어 있어서 약간 달달한 맛이다.
수프를 먹고 난 뒤 여러 가지 밑반찬+국+양배추 샐러드와 함께 나온 오무라이스. 아무리 생각해도 수전증이 있나보다. 너무 밝게 나와 정체를 알 수 없는게 샐러드 접시고, 오무라이스 위를 감싸고 도는 종지들은 왼쪽부터 배추김치-총각김치-단무지. 오무라이스 오른쪽의 것은 미역국 그릇이다.
역시 짤방만 봐서는 파악할 수 없지만, 오무라이스 양이 꽤 많다. 하지만 달걀을 까보면 또 모르기 때문에, 일단 해부(???)를 해봤다.
풀어헤친 속. 의심한 것과 달리 밥도 꽤 많이 들어 있었다. 잘게 썬 당근과 양파, 완두콩, 얇게 썬 양송이, 곱게 간 쇠고기 등이 같이 볶아져 있었고, 약간 시큼달달한 데미글라스 소스와 함께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
양과 맛 모두 꽤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다른 메뉴에도 관심이 생기기 시작해 11월 말에 한 번 더 갔다왔다. 이번에는 여러 가지를 한 번에 조금씩 즐길 수 있는 '에버그린정식' 을 시켜봤다. 마찬가지로 연장과 수프가 먼저 나왔는데, 저번 것과 다를 바 없었으므로 짤방 생략.
'경양식' 계열에서 가장 비싸고 다채로운 메뉴답게, 상차림도 훨씬 호화로운 모습이었다. 두 종류의 김치와 단무지는 똑같았지만, 딸려나온 국이 고기와 버섯까지 들어간 배추된장국이어서 놀랐고. 다만 접시에 양배추채, 감자튀김, 마카로니와 함께 꾸미로 딸려나온 오이 몇 조각 때문에 잠시 굳었다. 미리 물어보고 빼달라고 했어야 했는데.
햄버그스테이크+돈까스+생선까스와 새우후라이 한 마리라는 구성이었는데, 메뉴판에는 없는 새우후라이가 꽤 흥미로운 조합이었다. 혹시 생선까스를 시키면 같이 튀겨주는 걸까? 아무튼 샐러드 드레싱이 얹힌 양배추를 버무리고 밑반찬과 국을 곁들여 먹어보기 시작했다.
돈까스와 햄버그의 소스는 예전에 먹었던 오무라이스의 그 소스를 그대로 쓰는 것 같았고, 생선까스에는 정석대로 타르타르소스가 얹혀 있었다. 두 소스 모두 달달한 맛 보다는 시큼한 맛이 좀 더 강해서 느끼해지기 십상인 튀김음식에 적절한 배합이었다. 그리고 딸려나온 국도 예전의 미역국보다 더 많았기 때문에, 충분히 배도 불렀다.
정식 먹으러 찾아갔을 때는 일요일 저녁이었는데, 먹고 있는 동안 들어온 동네 친구로 보이는 아저씨를 위해 안주용 돈까스를 튀겨내와 같이 소줏잔을 기울이는 주인의 모습까지 볼 수 있었다. 정말로 털털한 분위기였는데, 손님을 모으기 위해 대내외에 크게 과시하는 소위 '맛집형' 스타일의 가게가 아니라 오히려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식사할 수 있는 가게였다.
혹시 모르니 네이뷁 지도를 가지고 만든 발그림 약도 첨부;
세월이 지나가면서 7~80년대 경양식집 분위기를 내는 음식점은 서울에 이제 그리 많지 않다고 하는데, 물론 어릴 적에 뻔질나게 드나들 정도로 집안 형편이 좋았던 것도 아니라 특별한 추억도 없어서 분위기의 변화가 내게는 그리 아쉬울 것도 없다. 하지만 내가 직접 겪었던 과거가 아니라도, 뭔가 남들이 기분좋게 추억하는 옛 분위기가 있다면 굳이 겪어도 나쁘지는 않은 듯.
이외에 경양식집 분위기가 나는 음식점으로 꽤 특수한 곳이 하나 있다고 하는데, 용산에 있고 주로 군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이쯤 되면 남자들은 어느 정도 눈치챘을 듯.) 하지만 군 시절에 대해 긍정 보다는 부정의 감정이 강한 내게 있어서 오히려 좀 드나들기 껄끄러운 것도 사실이고.
그래서 지금까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는데, 군인 대상이라고는 하지만 민간인도 물론 이용할 수 있다. 복지단에서 직영하는 곳이라 서비스는 꽤 친절한 편이라고 하고,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다고 해서 약간씩 관심이 가는 중이다. 다만 갑자기 라노베나 웹툰 단행본에 지름신이 강림 중인 상황이라서, 연말에나 갈 수 있을 듯. 시구사와 ㅅㅂㄹ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