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만 모이면 자연스레 나오는 것이 군대 이야기인데, 사실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추억하고 싶은 에피소드가 거의 없다. 지금도 내 인생에서 최악의 시간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정도니까. (더군다나 집안에서 유일하게 현역 복무를 한 터라, 군대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이해할 사람이 없다...)
아무튼 복무했던 곳이 기차가 닿는 곳도 아니었고, 하물며 면회도 안되는 민통선 내 독립부대였던 까닭에 TMATMO니 무슨무슨회관이니 하는 장병 혜택 시설도 이용해본 적이 없었다. 전역 후에는 '이용할까보냐!' 라는 심정이었고.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런저런 일로 용산을 그리 자주까지는 아니더라도 한달에 한두 번은 종종 갔다오는데, 민자역사로 으리으리하게 지은 용산역 왼편에는 '용사의 집' 이라는 건물이 있다. 평소에는 그냥 별 생각없이 지나치기 마련이었고, 현역 군인들이나 퇴역 부사관/장교만 드나들 수 있는 곳이라고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현재 서울에서 찾아보기 힘든 옛스러운 '경양식집' 스타일의 양식당이 있다는 포스팅들을 접할 수 있었다. 포스팅들을 보니 굳이 현역이나 전역 간부들만 갈 수 있는 곳은 아니었던 것 같았는데, 그렇다고 경계심(?)이 풀린 것은 아니었고. 온갖 망상이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음식이 나오면 '식사에 대한 감사의 기도' 를 읊어야 할 것 같다거나, 테이블에 양팔 다 올려놓고 먹으면 나보다 짬많은 손님들한테 갈굼당할 것 같다거나, 식당 안에는 10대 군가만 줄창 틀어줄 것 같다거나 등등.
옛스럽다고는 해도 그 시절에 경양식집을 자주 간 것도 아니라 분위기도 별 기대를 안했고, 그저 예상 외로 음식은 맛있다는 이런저런 평가를 보고 12월 초에 불쑥 찾아가봤다. 아무래도 군 복지단 휘하의 편의시설이다 보니, 늦게까지 영업은 안한다고 해서 적절히 저녁식사 때 쯤 찾아가기로 했다.
노이즈 그득하고 광량 조절도 꽝인 저화질 폰카를 바꿔야 겠다는 생각이 무럭무럭 들지만, 이내 귀차니즘으로 잊고 마는 저퀄 짤방의 시작. 자그맣게 파란 네온사인으로 된 '용사의 집' 글씨가 보인다. 짤방은 안달았지만, 군인 복지시설이라는 이미지를 좀 순화시키려고 했는지 벽화도 새롭게 단장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고색창연한 건물 외관과 종종 드나드는 짧은 머리의 '아저씨' 들만 봐도 이내 현실을 깨닫게 되지만.
건물 입구는 내가 본 바로는 한 군데밖에 없다. 들어가서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가면 한식당과 양식당, 연회장으로 통하는 작은 로비가 나오는데, 위의 짤방이 양식당으로 가는 문. 다소 밋밋한 디자인이지만, 놀랍게도 문은 자동문이었다.
손님은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주로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술이나 음식을 드시는 어르신 분들이 대부분이었고, 나누는 대화 내용을 봐서는 아마 전역한지 오래인 간부 출신들로 생각되었다. 나도 앞에 용산역이 보이는 쪽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경치도 경치지만, 히터가 가까이 있다는 잇점도 있었다.
일단 앉으면 이렇게 종이로 된 식탁보와 식기를 깔아준다. 다른 포스팅들을 보면 군무원으로 여겨지는 여종업원들과 짧은 머리의 현역들이 같이 서빙을 보는 걸로 되어 있었는데, 내가 갔을 때는 여종업원 두 사람밖에 볼 수 없었다. 주방은 식사 공간과 완전히 격리되어 있어서, 조리실에도 누가 있는지 볼 수 없었고.
메뉴판. 식사류 네 가지 정도에 이런저런 차나 술을 같이 파는 식으로 되어 있었다. 원산지 표시도 되어 있었는데, 쇠고기는 호주산으로 되어 있었다. 군 장병들에게 미국산 쇠고기를 먹이네 마네 하는 논란이 있었는데, 여기는 해당사항이 없는건지 있는건지.
가격은 최고가 메뉴인 안심스테이크까지 생각해도 그럭저럭 저렴한 편이었고, 무엇보다 정말 옛날 경양식집에서처럼 '밥으로 드릴까요, 빵으로 드릴까요?' 라는 질문이 나올 법하게 '추가빵' 이라는 메뉴까지 있던 것이 뭔지모르게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돈까스(5500\)에 추가빵(1100\)까지 주문해 보기로 했다. 조금 기다리다 보면 다음과 같이 먹을 것들이 탁자에 죽 깔린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오이피클과 추가빵, 밥. 피클 빼달라는 말을 깜빡하고 말았다.
그리고 간단한 야채샐러드와 크림수프. 빵이나 밥은 그렇다 쳐도, 샐러드와 수프에서부터 뭔가 '제대로 찾아왔다' 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샐러드에는 다행히 오이가 없었고, 방울토마토와 양상추, 양배추채, 무순과 아일랜드 드레싱이라는 매우 안전한(?) 컨셉이었다. 수프도 평범하다면 평범한 크림수프 맛이었지만, 시판품보다는 좀 더 진한 육수맛이 났다.
수프 그릇을 비우고 샐러드를 버무리다 보니 나온 돈까스. 짤방만 봐서는 모르겠지만, 꽤 크고 두툼한 것 한 조각이 접시에 얹혀 나왔다. 곁들임은 당근과 데친 브로콜리, 감자튀김 두 조각. 지금까지 돈까스를 먹어보면서 당근과 브로콜리가 같이 나오는 것은 처음 봤다. 특히 당근은 개인적으로 혐오해 마지않는 생당근이 아니라, 푹 삶아 부드러운 것이어서 안심했고.
소스는 일반적인 데미글라스 소스였는데, 버섯과 양파를 넣고 만든 것이라 의외로 꽤 정성들여 요리한 음식으로 보였다. 맛도 너무 달거나 짜거나 시지 않고 딱 적당했고, 일본식과 한국식의 딱 중간 정도로 두툼한 고기에 매우 잘 어울렸다. 음식만 보면 군인용 복지 시설이고 뭐고 따질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돈까스를 다 먹고 디저트처럼 추가빵에 손을 대려는 찰나, 종이컵에 다방커피 한 잔이 담겨나왔다. 식사를 주문하는 고객들에 대한 서비스 같았는데, 이것도 결코 고급스럽지는 않지만 뭔가 운치있는(?) 컨셉이었고.
모닝롤 두 개였던 추가빵은 작은 플라스틱 트레이에 담긴 버터와 딸기잼이 같이 나왔는데, 딸기잼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맛스타 딸기잼이 아니었다. 둘 다 오뚜기 제품이었는데, 다만 버터는 진짜 100% 버터가 아니라 식용 경화유-아마도 마가린-를 섞은 가공버터였다. 딸기잼은 중앙에 십자 모양으로 금이 나 있었고, 뒤집어서 꺾은 뒤 쭉 짜서 발라먹도록 되어 있었다.
대단한 병맛을 풍기는 빵먹는 사진. 원래 빵을 뜯던가 가르던가 해서 버터나 잼을 발라먹어야 하는데, 왜 이딴 짓을 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유럽 유학간다는 놈이 이래서 되려나...아무튼 각별하게 맛있거나 또는 끔찍하게 맛없거나 하지는 않았고, 그냥 추가빵이라는 메뉴가 어떤지 확인하는 선에서 주문한 것이었으니 별다른 코멘트는 안해도 될 듯.
피클 빼고는 죄다 먹을 것을 비운 뒤 차곡차곡 그릇을 쌓아놓고, 버터와 잼 껍데기도 쓰레기통에 버리고 계산을 마쳤다. 계산은 바를 겸한 카운터에서 하게 되어 있었는데, 카운터 옆에는 행정병 출신들이라면 치를 떨 근무일정 문서파일 등이 차곡차곡 놓여 있었다. '웨이트레쓰' 라고 적힌 명찰도 꽤 복고풍이었고.
합쳐서 6600원이 나왔는데, 예비역이나 일반 고객들에게는 이렇게 받지만 현역 군인들에게는 부가세를 제하고 추가 할인 혜택이 있다고 되어 있었다. 하지만 '현역 때 먹어볼걸' 이라는 후회까지는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대부분 사회인인 손님들 틈바구니에서 혼자 전투복 차림으로 뻘쭘하게 밥을 먹고 있었을 자신을 생각하면...
아무튼 군 복지 시설이라고 '짬밥식' 음식만 내올 거라는 편견을 다소나마 누그러뜨리게 해준 곳이었다. 더군다나 가격만 봐도 용산역 아이파크몰의 푸드코트보다 좀 더 싼 편이고, 서비스나 분위기도 정중하고 조용한 편이라 혼자 밥먹는 일이 많은 사람에게도 부담없는 곳으로 여겨진다. 평상복입고 드나드는 사람들이라도 신분증 검사 같은건 안하니 크게 신경쓸 것도 없고. 다만 여성 고객은 내가 갔을 때 한 사람도 없었는데, 이것도 군 복지 시설의 편견이라면 편견일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