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관현악 장르의 덕후로 오랜 세월을 살아오고 있는데, 특별히 편성의 거대함만을 좇는 옹졸한 취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러 가지와 종류의 악기들이 얼키고 설키며 뽑는 다양한 음색 자체에도 기대 심리와 만족감이 생긴다는 것을 구차한 취향으로 들고 싶고.
관악 음악에 대해 관심이 생긴 것은 요 근래에 와서였는데, 별 흥미도 없던 목관 5중주나 금관 5중주 같은 대학 시절 과제곡 작곡을 위해 학습 과제로 연구하기 시작했으니 귀에 그리 잘 받을리 없었다. 하지만 연주하는 이들의 기교나 몰입도, 자발성, 곡의 질 등이 조화롭게 갖춰지면 얼핏 천편일률적으로 보이는 편성의 음악도 충분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고.
금관악기에 대한 나의 편견도 그 무렵부터 많이 깨지기 시작했다. 귀청이 찢어져라 외쳐대는 포르테 뿐 아니라 다양한 음량과 음색으로 어필할 수 있음은 필립 존스 브라스 앙상블을 비롯한 여러 단체가 보여주고 있는데, 이번에 소개할 물건은 라틴아메리카의 베네수엘라 출신 젊은이들이 만든 악단의 연주가 담긴 DVD다.
베네수엘라의 어린이/청소년 음악 교육 프로그램인 '엘 시스테마' 는 이제 한국에도 꽤 많이 알려져 있을 정도로 세계적인 관심을 얻고 있는데, 물론 그 프로그램을 통해 나온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 같은 인물들 덕이기도 하다. 하지만 스타플레이어 개개인 외에 그 프로그램을 통해 결성된 연주 단체들도 여러 다큐멘터리나 음반 등을 통해 조명되고 있는 중이고.
엘 시스테마를 대표하는 관현악단이 '베네수엘라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관현악단' 이라면, 관악 합주단을 대표하는 존재로 베네수엘라 브라스 앙상블(에스파냐어로는 Ensemble de Metales de Venezuela)이 있다. 시스테마 홈페이지에도 소개되어 있을 정도인데, 명칭대로 관악기는 금관악기로만 편성한 합주단이다.
사실 금관만 편성하는 관악 합주단은 그리 많지 않은데, 영화 '브래스드 오프' 로 많이 알려져 있는 영국의 브라스 밴드 정도가 좀 보편화된 형태다. 아무래도 관악 합주단 하면 목관과 금관이 혼합 편성되는 콘서트 밴드를 연상시키는 것 같은데, 몇 개의 밸브와 입술/호흡 조절로 모든 음정을 소화해야 하는 금관악기만 편성하는 것은 어지간한 관록과 실력의 주자들을 모으지 않는 이상 꽤 위험한 편성인 것도 사실이다.
베네수엘라 브라스 앙상블은 거의 모든 단원들이 20대 청년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케이스인데, 웬만한 관록의 중견 금관 주자들이 모이는 단체도 아니라는 것을 보면 뭔가 치기어린 모험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노파심은 DVD를 시청하면서 단숨에 가라앉았고.
이 합주단은 2003년에 창단되었는데,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관현악단 외에도 베네수엘라 각지에서 엘 시스테마를 통해 배출된 재능있는 청소년 금관 주자들을 모아놓고 있다. 창단 직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트럼펫 단원이기도 한 토마스 클라모어(Thomas Clamor)가 수석 지휘자로 초빙되었는데, 클라모어는 그 이전에도 엘 시스테마에 강사로 자주 초빙되어 깊게 관여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창단 4년이 되던 해인 2007년에는 유럽 순회 공연을 떠날 정도로 기틀이 잘 잡힌 악단이 되었다는데, 유로아츠(EuroArts)에서 제작한 이 DVD도 그 공연 일정 중 9월 4일에 베를린의 콘체르트하우스(구 샤우슈필하우스)에서 행한 실황을 담고 있다.
ⓟ 2007 EuroArts Music International GmbH
별도의 독주자나 독창자 없이 앙상블 단독 공연으로 꾸려진 연주회였는데, 프로그램은;
잔카를로 카스트로 (Giancarlo Castro, 1980-): 그랑 팡파르
모데스트 무소륵스키 (Modest Mussorgsky, 1839-1881): 전람회의 그림 (엘가 하워스 편곡)
알레한드로 스카르피노 (Alejandro Scarpino, 1904-1970)+후안 칼데레야 (Juan Calderella, 1891-1978): 파리의 카나로 (호세 카를리 편곡)
세키나 아브레우 (Zequinha Abreu, 1880-1935): 티코 티코 (존 아이브슨 편곡)
레너드 번스타인 (Leonard Bernstein, 1918-1990):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중 세 개의 춤곡 (에릭 크리스 편곡)
펠릭스 멘도사 (Félix Mendoza, 1983-): 지구전
페드로 엘리아스 구티에레스 (Pedro Elías Gutiérrez, 1870-1954): 알마 야네라 (루이스 루이스 편곡)
조지 거슈인 (George Gershwin, 1898-1937): 아이 갓 리듬 (로저 하비 편곡)
레너드 번스타인: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중 맘보
교향곡 역할을 하는 묵직한 무소륵스키의 곡부터 아르헨티나 탕고, 베네수엘라의 국민 가요 격인 알마 야네라, 거슈인의 뮤지컬 히트송까지 다양한 곡들이 선곡되어 있는데, 작곡가들 중 아직 20대였던 카스트로와 멘도사 두 사람이 눈에 띈다. 이들은 전업 작곡가가 아니라 각각 트럼펫과 타악기를 맡은 앙상블 단원들인데, 웬만한 관록 있는 밴드 작곡가들에 버금가는 쇼피스를 써놓았다.
특히 멘도사가 작곡한 '지구전' 의 경우, 제목처럼 각 파트별로 경쟁하듯이 연주하는 아이디어가 독특한 곡이다. 연주 중간중간에 연주자들의 함성이 섞이기도 하고, 소라껍데기 나팔을 부는 장면도 비춰진다. 하지만 가장 신선했던 것은, 중간부에서 관악기들이 모두 연주를 멈춘 가운데 타악 주자들의 열광적인 리듬 연주와 더불어 단원 한 사람의 노래가 어우러지는 대목이었다.
이 장면은 EBS에서 방영했던 다큐멘터리 '엘 시스테마' 에서 매우 재미있게 봤는데, 무슨 곡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가 이 DVD를 통해 확실히 알게 되었다. 다큐멘터리와 이 DVD 모두 노래를 담당한 이가 트럼페터 윌프리도 갈라라가인데, 갈라라가는 다큐에서 연주 장면 외에도 중요한 인터뷰어로 나오고 있다.
카스트로와 멘도사의 오리지널 작품들을 빼면 모든 곡들이 편곡 작품인데, 편곡자로 기재되어 있는 하워스와 아이브슨, 크리스, 하비는 모두 필립 존스 브라스 앙상블 멤버를 역임한 베테랑 금관 주자들이다. 수십 년을 연주 일선에 바친 사람들인 만큼 편곡 퀄리티에는 실망할 필요가 없을 듯. 특히 하워스가 편곡한 '전람회의 그림' 은 금관 주자의 역량과 기교에 대한 요구를 극단적으로 끌어올린 난곡이라, 이들이 왜 이 곡을 메인 레퍼토리로 골랐는지 알 만한 대목이었다.
마지막 앵콜 곡은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관현악단의 단골 앵콜 넘버이기도 한 번스타인의 '맘보' 인데, 여기서도 단원들이 연주와 댄스, 트럼펫 돌리기 등의 화려한 팬서비스를 보여주고 있다. 다소 무뚝뚝하고 불친절하다는 베를린 청중들이 이 정도로 열광적인 반응을 보여주는 적은 드물다는데, 그 만큼 이들의 연주가 짜임새있으면서도 열정적이었기 때문이었을 듯.
그리고 DVD 속지를 보니, 앙상블이 EMI에 'We Got Rhythm!' 이라는 데뷰 음반을 내놓았다는 내용도 실려 있었다. 하지만 EMI 본사 홈페이지를 검색해보니 아직 안뜨고 있는데, 아마 EMI 독일 지사인 엘렉트롤라를 통해 독어권 국가들에만 로컬 발매된 것 같다. 일단 EMI 레이블을 달고 나왔으니 추후 인터내셔널 릴리즈로 풀릴 것 같은데, 지갑 사정에 고민하면서도 꽤 기대심리를 부추기는 물건을 또 목격해버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