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커버는 그림이 아닌 사진으로 꾸며졌는데, 고창 선운사의 천왕문을 찍어놓은 것을 썼다. 수록곡 중 두 개가 불교에서 소재를 딴 제목으로 되어 있던 만큼, 나름대로 적절하다고 생각한 듯.
1. 관현악 '바라' (1960)
북독일 방송 교향악단/이와키 히로유키
윤이상이 독일에서 작곡한 네 번째 작품이자, 첫 관현악곡이다. 제목은 승무 등 불교 무용에서 많이 쓰는 심벌즈 비슷한 타악기에서 따온 것 같은데, 그렇다고 바라가 곡에 쓰이는 것은 아니다. 20세기의 많은 관현악곡들처럼 다양한 타악기를 중용하고 있는데, 전체 관현악 편성은 플루트만 두 대 쓰는 변칙 1관 편성이라 거의 실내 관현악 정도로 아담한 편.
12음 기법을 비롯한 음렬 작법을 집중적으로 배우고 내놓은 다른 초기 작품들처럼 여기서도 음렬을 짜서 쓰고 있는데, 다만 그 규칙은 엄격하게 지키지 않고 있다. 이미 동양인이라는 자각이 있었는지, 서양의 전통적인 리듬 박절법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운 모습이고 길게 뽑는 선율에 다양한 형태로 장식을 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990년대 중반에 동국대학교 캠퍼스에서 정치용 지휘의 KBS 교향악단이 이 곡을 포함한 윤이상 음악회를 열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가서 공연도 봤고 중계했던 A&C 코오롱에 비디오 제작도 신청해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야외 공연의 특성상 녹음이 굉장히 이상하게 돼서 듣기 힘들 정도였고, 음반을 찾던 찰나 제대로 걸려든(???) 셈.
수록된 음원은 1962년 초연 후 약 3년 뒤인 1965년 5월 10일에 함부르크의 북독일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것인데, 당일 예정된 콘서트의 최종 리허설을 겸한 방송녹음이라고 한다. 녹음 연도가 꽤 오래되긴 했지만 전체적인 소리는 깨끗한 편. 지휘자인 이와키는 2차대전 후 배출된 일본 지휘자들 중 꽤 유명한 인물로, 현대음악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소개한 바 있다. 21년 후인 1986년에는 윤이상의 교향곡 4번을 세계 초연하기도 했는데, 일본 카메라타의 윤이상 음반 시리즈에도 이 때의 실황녹음이 포함되어 있다.
2. 관현악 '유동' (1964)
(서)베를린 방송 교향악단(현 베를린 도이치 교향악단)/페터 로네펠트
현악 합주로만 편성된 '교착적 음향' 을 제외하면 윤이상의 세 번째 관현악곡. 음열에 대한 탐구 뒤 리게티 등이 보여준 톤 클러스터(음뭉치)의 영향도 반영하고 있는데, 곡 전체가 그렇게 구성되도록 하지는 않았다. 제목 대로 다양한 음색의 선율선이 꿈틀대듯이 움직이는 모습을 구현하려고 한 것 같은데,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예악' 에 비하면 그리 복잡난해하지는 않다.
완성 후 1년 뒤인 1965년 2월 10일에 서베를린에서 처음 공연됐는데, 이 녹음은 초연 직전이었던 5~9일 나흘 동안 리허설을 겸해 자유 베를린 방송국(Sender Freies Berlin. 현 베를린-브란덴부르크 방송국) 대강당에서 제작한 방송녹음이다. 악단과 지휘자는 모두 초연 때와 같은데, 로네펠트는 당시 작곡과 지휘 양 쪽에서 막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던 신예 음악인이었다. 하지만 이 곡을 초연하고 몇 달 뒤 30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3. 대규모 관현악과 오르간을 위한 '차원' (1971)
페터 슈바르츠 (오르간), (서)베를린 방송 교향악단/한스 첸더
뉘른베르크 시에서 1971년의 '뒤러 기념제' 를 위해 위촉한 곡인데, 처음으로 파이프오르간을 편성에 추가시키고 있다. 하지만 생상의 교향곡 3번 등에서 연상되는 장엄한 오르간 소리를 연상시키면 대략 낭패인데, 대규모 관현악에 동반되는 부수적인 역할로 써놓았기 때문에 전면에 나오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주로 고음역 레지스터를 많이 활용하고 있다. 생황 음색의 모방을 위해 도입했다는 듯.
'예악' 등 1960년대 관현악 작품들에서 보여준 '음색선율' 이 여기서도 뚜렷하게 나오는데, 종묘제례악 등 궁중음악의 영향도 물론 반영되어 있다. 1년 뒤 완성되는 오페라 '심청' 과 연관성이 종종 지적되는데, CD 해설에도 오페라의 간주곡 등 몇 군데의 아이디어나 악상이 인용되고 있다고 쓰고 있다.
수록된 음원은 초연 후 약 1년 뒤인 1972년 10월 25일에 자유 베를린 방송국 대강당에서 열린 현대음악 연주회의 실황인데, 오르간의 경우 초연 때도 연주했던 슈바르츠가 담당하고 있다.
4. 세 명의 소프라노와 관현악을 위한 '나모' (1971)
도로티 도로우, 마리아 데 프란체스카, 슬라브카 타스코바 (소프라노), (서)베를린 방송 교향악단/미하엘 길렌
'차원' 보다 몇 달 전에 착수해 마무리지은 작품인데, 불경 중 대승불교에서 쓰는 '대승경전' 에서 발췌한 산스크리트어 가사를 사용하고 있다. 제목인 '나모' 도 한자 독음으로 읽으면 '남무(南無)' 인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의 그 나무다. 이미 오라토리오 '오 연꽃 속의 진주여' 에서 불경을 발췌한 가사를 차용한 적이 있었던 만큼, 동양인으로서 갖고 있는 정서를 담으려고 한 듯. 하지만 불경의 독음 규칙 등에는 크게 구애받지 않고 있고, 굳이 가사의 내용을 묘사하려고 시도하지도 않고 있다.
관현악 편성이 꽤 특이한데, 현악 파트의 경우 바이올린을 몽땅 빼버리고 비올라와 첼로, 콘트라베이스만 쓰고 있다. 소프라노 가수들도 그냥 노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앉아서 북을 치며 노래하는 대목도 나온다(이후 2집에도 수록된 '추억' 에도 응용되서 나오는 착상이라 흥미롭다). 윤이상이 가장 어울린다고 지정한 것은 한국 전통 북인 좌고였는데, 여기서도 한국에서 공수해온 좌고 세 개를 놓고 치면서 부르고 있다. (1975년에는 소프라노 독창을 한 사람으로 줄인 판본이 나오기도 했다.)
1971년 5월 4일에 자유 베를린 방송국 대강당에서 열린 현대음악 연주회에서 초연되었는데, 여기 수록된 녹음도 그 때의 실황이다. 세 소프라노 모두 윤이상과 여러 성악곡에서 같이 작업한 바 있었고, 길렌도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1960년의 '교향적 정경' 을 초연하는 등 윤이상의 관현악 작품들을 종종 다룬 바 있던 대표적인 현대음악통 지휘자다.
4집은 협회반들 중 유일하게 기존에 출반된 음반의 음원을 주로 사용하고 있는데, 독일에서 제작한 LP로만 나오고 한 동안 CD로 복각되지 않아 구하기가 매우 힘들었던 것들이었다. 다음 편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