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앨범 커버는 2집 때와 비슷하게 수묵화가 곁들여진 한시로 되어 있었다. 한시 제목은 '복(福)' 이라고 하는데, 작가는 알파벳으로 'Kinan' 이라고만 되어 있고 한국인이라는 힌트 외에는 다른 설명이 없다.
1. 교성곡(칸타타) '사선에서' (1975)
에른스트 게롤트 슈람(바리톤), RIAS 실내 합창단 여성부, 지그몬트 자트마리(오르간), 베를린 졸리스텐 앙상블/우베 그로노스타이
1960년대 후반에 한국에 납치되어 겪게 된 고문과 재판 후, 윤이상 작품에는 알게 모르게 사회 비판적인 요소들이 많이 더해지기 시작했다. 가사가 들어가는 성악곡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이 곡에서는 반나치 운동을 주도했다는 혐의로 투옥되어 전쟁 종결을 불과 며칠 앞두고 총살당한 지정학자 알브레히트 하우스호퍼가 모아비트 감옥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소네트를 택했다. 거기에 추가로 구약성서의 전도서, 이사야, 고린도후서 구절이 추가로 붙어 전체 텍스트를 이루고 있다.
여성 합창은 대체로 성서 구절을 부르거나 낭송하며 구원의 목소리를 내지만, 바리톤 독창은 거기에 반문하거나 회의하기도 하면서 하우스호퍼가 겪은 자살 충동을 비롯한 내적 갈등을 드러내는 식으로 진행된다. 오르간과 플루트+오보에+트럼펫+트롬본+타악기로 구성된 기악 파트는 곡의 분위기에 따라 합창이나 독창을 보좌하기도 하고, 타악기와 금관악기의 폭력적인 연주로 공포와 고통의 분위기를 묘사하기도 한다.
수록된 녹음은 2010년 현재도 이 곡의 유일한 음원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1979년 1월 24일에 베를린의 그루네발트 교회에서 녹음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다만 공연 실황이나 방송용 녹음은 아니었고, 이 곡과 아래 소개할 '피리', '현자' 를 함께 커플링한 LP에 쓸 목적으로 제작된 스튜디오 녹음이다.
2. 첼로를 위한 7개의 연습곡 (1993): 제 2번 레제로
이명진(첼로)
윤이상은 첼로를 자신의 악기로 삼아 독주곡이나 협주곡 뿐 아니라 다양한 편성의 실내악에도 자주 편성했는데, 첼로 독주곡의 경우 '활주' 와 이 연습곡이 종종 연주되곤 한다. 물론 장르대로 여러 기교를 숙달하기 위한 연습곡 용도로 쓰일 수도 있지만, 쇼팽의 연습곡이나 윤이상 자신의 플루트 연습곡들처럼 공연에서도 충분히 어필할 수 있는 쇼피스 역할도 할 수 있다.
이 곡은 전부 다 들어보지는 못했고, 5번 '돌체(부드럽게)' 만 통영국제음악제 비매품 CD로 입수할 수 있었다. 이 CD에서도 발췌 수록이라는 것이 좀 아쉽지만, 그래도 지금껏 듣지 못했던 2번 '레제로(경쾌하게)' 가 같이 들어 있어서 약간의 위안이 되었다. 두 곡 모두 첼로 협주곡이나 '활주' 에서처럼 연주자에게 엄청난 기교적 난관을 부여하지는 않고 있고, 90년대 작품 답게 한층 유화적인 모습이다. 다만 각 곡의 표정 기호에 충실한 연주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 기교 보다는 표현력의 향상을 위해 쓴 연습곡들로 여겨진다.
두 곡 모두 한국 출신 첼리스트인 이명진이 연주했는데, 슈투트가르트 음대에서 러시아 첼리스트인 나탈리아 구트만에게 배웠고 현재 동아대학교 기악학과 조교수로 재직하며 교육과 연주 활동을 병행하는 연주자라고 한다. 수록된 음원들은 2002년 7월 27일에 베를린 예술대학의 콘체르트잘 분데스알레에서 스튜디오 녹음된 것들이라고 되어 있다.
3. 오보에 독주를 위한 '피리' (1971)
하인츠 홀리거(오보에)
윤이상과 친분을 맺었던 연주가들 중에는 해당 악기의 달인들이 꽤 많았는데, 오보이스트들에게 본좌로 손꼽히는 홀리거도 마찬가지였다. 오보에+하프를 위한 2중 협주곡, 오보에+하프+비올라를 위한 소나타 등 오보에가 들어가는 실내악 대부분이 홀리거를 위해 쓰여졌는데, 이 곡-다만 홀리거가 아니라 게오르크 메어바인이라는 오보이스트가 초연했다-은 아무런 반주 악기도 없이 오로지 오보에 한 대만으로 엄청난 기교와 표현력을 선보이도록 구성되어 있다.
음역의 높낮이 뿐 아니라 입으로 숨을 내쉬면서 코로 숨을 동시에 들이쉬는 순환호흡, 불협화음에 가까운 다중음을 구사하는 멀티포닉스, 플러터 텅잉, 다양한 비브라토 등이 난무하면서 서정적인 악기라는 이미지를 꽤 많이 깨부수는 충공깽을 선사하는데, 원체 어려운 탓에 한동안 홀리거 외에는 초연자인 메어바인과 동독 출신의 굇수 오보이스트 부르크하르트 글레츠너 등 극소수의 오보이스트들만 연주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니 흠좀무. 지금은 어떨 지 궁금하다.
윤이상의 생일이었던 1977년 9월 17일에 스위스의 바젤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음원인데, 다만 녹음을 담당했던 방송국 측에서 무슨 이유인지 마스터 테이프를 분실했다고 해서 이 음원 만은 LP를 복각해 제작했다고 추가 주기가 되어 있다. LP 특성 상 약간의 그루빙 노이즈가 발생하지만, 그렇게 신경쓰일 정도는 아니다.
4. 첼로를 위한 7개의 연습곡 (1993): 제 5번 돌체
이명진(첼로)
2번에서 한참 주절댔으므로 패스.
5. 교성곡 '현자' (1977)
칼-하인츠 뮬러(바리톤), 에른스트 젠프 합창단 단원들, 베를린 인스트루멘탈 앙상블/페터 슈바르츠
'사선에서' 의 후속곡 격으로 작곡된 곡인데, 마찬가지로 바리톤이 독창으로 나서는 컨셉을 취하고 있다. 다만 합창부의 경우에는 남녀 혼성 합창을 사용하고 있고, 기악부도 플루트+오보에+호른+트럼펫+트롬본+현악 5중주(바이올린 2-비올라-첼로-콘트라베이스)+하프+타악기라는 스펙으로 약간 불어난 모습이다.
가사는 발터 뵈트허가 작성한 텍스트를 기본으로 노자의 도덕경과 구약성서의 전도서를 발췌해 차용했는데, 다만 여기서는 '사선에서' 처럼 가사에서 직접적인 갈등이나 고통을 묘사하기 보다는 다소 추상적이고 막연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초반부에서 나오는 가사도 외부의 침입에 맞닥뜨린 현자의 지혜로 마을이 구해진 건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 지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있는데,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혼란스러운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시각으로도 볼 수 있을 듯.
동서양의 두 현자들인 노자와 솔로몬의 '가르침' 은 후반부에 성악부가 노래하며 시작되는데, 그렇다고 기악부가 마냥 거기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현시창을 묘사하듯이 타악기 주도로 태클을 걸어대기도 하고, 첼로나 목관 독주로 다소 감상적인 선율을 풀어내며 비탄조의 기분을 나타내기도 한다. 물론 마지막에는 '사선에서' 처럼 구원을 나타내는 듯이 그럭저럭 밝게 끝을 맺기는 하지만.
수록된 음원은 1977년 6월 8일에 베를린의 예수 그리스도 교회에서 스튜디오 녹음된 것인데, '사선에서', '피리' 두 곡과 함께 1979년에 베를린 선교회의 동아시아 분과에서 제작한 LP로 처음 출반되었다. 다만 정식 시판품이라기 보다는 선교용 비매품 격으로 풀린 것이라, 구하기 꽤 힘든 음반으로 여겨졌다. 이걸 판권 인수해서 CD화한 협회 측에는 그저 굽신굽신.
이 앨범과 함께 개인적으로 가장 주목한 것이 다음 5집인데, 세계 초연의 실황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악단과 독창자 스펙이 꽤 대단해서 특필할 만하다. 다음 편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