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앨범 커버는 3집과 마찬가지로 풍경 사진을 사용하고 있는데, 플루티스트 로즈비타 슈테게가 2005년 가을에 금강산을 방문했을 때 찍은 것이라고 되어 있다.
1. 플루트 독주를 위한 '소리' (1988)
천 시춘(플루트)
윤이상 플루트 독주곡 중 '다섯 개의 연습곡' 과 함께 꽤 자주 연주되는 곡인데, CPO에서도 각기 다른 음원을 담은 CD가 두 장이 있을 정도다. 스웨덴 남부의 즈베크라는 요양지에서 작곡했는데, 오보에 독주곡인 '피리' 처럼 관악기 하나만을 위한 작품 치고는 꽤 길게 구성되어 있다(약 13~14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범패를 참고했다는 움직임 많고 빠른 도입부-음의 움직임은 적지만 셈여림과 비브라토 등의 다양한 취급으로 긴장감을 유지하는 중간부-매우 느리고 명상적인 종결부 정도로 분류할 수 있다.
후반기 작품이라 듣는 사람 입장의 난이도는 상대적으로 평이하지만, 물론 연주자 입장에서 절대 쉬운 곡은 아니다. 특히 빠른 첫 부분보다는 상당히 길게 끄는 음정이 많이 나오고 템포도 느려지는 중반 이후에서 노련한 호흡 조절을 요하고, 글리산도나 4분음정 같은 주법의 숙련도 또한 필수. 어려운 곡이지만 자주 연주되는 것도 역량있는 플루티스트의 솜씨를 보여주기 효과적이라 그런 것 같다.
수록된 음원은 2004년 12월 2일에 베를린의 콘체르트잘 분데스알레에서 스튜디오 녹음된 것인데, 타이완 태생의 플루티스트 천 시춘이 연주했다.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슈테게에게 배웠고, 2006년부터 타이완 국립 교향악단의 단원으로 활동 중인 중견 연주가라고 한다.
2. 현악 4중주 제 3번 (1959/61)
잘비리아 앙상블 (제 1바이올린 괴츠 하르트만, 제 2바이올린 마르가레테 아도르프, 비올라 이르멜린 톰젠, 첼로 엘리자베트 볼)
윤이상의 현악 4중주곡은 번호 상으로는 여섯 곡이지만, 1번의 경우 한국에서 작곡된 것이라 유럽 정주 후에는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은 편이었고, 2번은 파리에서 유학 중 작곡하다가 마음에 안들어 파기했다고 한다. 유럽에서 작곡한 세 번째 작품이자 현악 4중주로서도 세 번째 작품인 이 곡부터를 본격적인 4중주로 간주하는 것 같은데, 다만 작곡 연대 표기에서부터 다소 우여곡절이 있는 곡이다.
1959년에 베를린 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하면서 학교 측에서 내준 과제가 현악 4중주의 느린 악장을 작곡하라는 것이었는데, 졸업 후 두 개 악장을 추가로 작곡해 3악장의 곡으로 일단 완성시킨 것이 첫 번째 판본이었다.
이 곡은 이듬해 국제 현대음악 협회(ISCM)에 출품해 입선되었지만, 초연 때는 정작 느린 악장을 뺀 1악장과 3악장 만이 연주되었다. 당시 독일 음악교육계의 보수성을 감안해 작곡한 2악장이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판단 때문이었는데, 1961년에 아예 새로운 중간 악장을 써서 끼워넣고 최종 판본으로 발표했다.
아직 신 빈 악파류의 12음 기법에서 강한 영향을 받고 있을 때의 작품이라, 여기서도 음렬을 짜서 쓰고 있다. 다만 음열의 의존도는 소위 '총렬주의' 계열 작곡가들보다는 덜하고, 훗날 '교착적 음향' 에서 극단의 충공깽을 보여준 온갖 특수주법의 사용도 볼 수 있다. 후속작인 4번이 20년 이상 지나서 창작된 터라, 두 곡을 비교하면서 들어보면 꽤 많은 변화를 느낄 수 있는 것도 흥미로운 대목.
수록된 음원은 2004년 10월 30일에 베를린 콘체르트잘 분데스알레에서 열린 연주회의 실황인데, 'Yun-Werkstatt(윤-작업실)' 라고 이름붙인 실내악 연주회 시리즈 중 두 번째 공연이었다고 한다. 윤이상과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 사이의 연관성을 강조하기 위해 섞어 연주하는 컨셉이었는데, 이 공연에서는 음렬 시대의 곡 답게 안톤 베베른의 실내악 작품을 같이 연주했다고 한다.
연주 단체인 잘비리아 앙상블은 자르브뤼켄 방송 교향악단 단원 출신 연주가들이 2002년에 결성한 현대음악 전문 실내악단인데, 연주하는 곡의 편성에 따라 단원들을 자유롭게 가감해 공연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여기서는 현악 주자들만이 참가해 연주했다.
3. 플루트를 위한 5개의 연습곡 (1974): 제 4번
마르톤 베그(베이스플루트)
플루트 연습곡은 내가 처음 들었던 윤이상 곡들 중 하나인데, 그 당시 존재조차 모르던 알토플루트와 베이스플루트라는 악기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신선한 경험이었다. 다섯 곡 모두 단순한 연습 목적으로도 쓸 수 있지만, 공연 무대에서도 종종 연주되곤 한다.
알토와 베이스플루트용 연습곡들인 2번과 4번은 템포 설정을 느리게 잡은 편인데, 느리고 음의 갯수가 적은 대신 각 음의 온갖 미묘한 떨림과 오르내림 등의 뉘앙스를 살리고 있어서 대금산조의 느낌이 가장 강하게 표현되는 것 같다.
물론 산조의 그것을 완전히 혼성모방한 것도 아니고, 연주 기교도 멀티포닉스나 목소리 섞어내기, 플러터 텅잉, 숨소리 많이내기, 극단적인 고음역 등 현대 플루트 주법의 고난도 스펙 기교들을 줄줄이 풀어내고 있어서 현대음악의 요소를 원하는 이들의 욕구도 충족시켜주고 있다.
수록된 음원은 2002년 5월 23일에 베를린 콘체르트잘 분데스알레에서 만든 스튜디오 녹음이고, 연주는 헝가리 출신 플루티스트 마르톤 베그가 맡았다. 베그는 이미 2000년에 통영국제음악제 참가차 내한해 윤이상의 플루트 협주곡을 비롯한 곡들을 연주한 바 있다. 올해(2010)도 내한해 김홍재 지휘의 울산시향과 같은 곡을 연주했는데, 직접 가서 들어볼 수 있었다. 관현악이 개판이라 캐안습이기는 했지만.
4. 하프시코드를 위한 '소양음' (1968. 피아노판 1996)
홀거 그로쇼프(피아노)
윤이상의 유일한 하프시코드 독주곡인데, 다만 이 악기에 익숙치 않았는지 작곡에 꽤 애를 먹은 것 같다. 위촉자이자 이 곡을 처음으로 연주/녹음한 스위스 하프시코디스트 앙투아네트 피셔에게 보낸 편지나 곡에 대한 언급을 담은 자료들을 보면, 하프시코드에 어울리지 않는 대목이 많고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지도 모른다고 다소 자신감없는 생각을 내비치기도 했다.
실제로 하프시코드는 통주저음으로 쓰는 것 외에 독주악기로 취급할 경우 꽤 까다로운 악기다. 2단 건반의 구조와 음역-레지스터라고 한다-에 대해 확실한 이해가 뒷밭침되어야 제대로 된 독주곡을 쓸 수 있는데, 이 때문인지 현대음악에서 하프시코드 독주곡 숫자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윤이상도 물론 초판본 악보에 상세한 레지스터 지시를 써놓았지만, 덧붙여 위촉자인 피셔가 따로 작성한 레지스터 지시도 포함시키고 있다.
윤이상과 피셔가 작성한 레지스터 지시는 넓은 레지스터를 갖도록 개량된 소위 '모던 하프시코드' 를 염두에 둔 것인데, 이후 정격연주 붐이 일면서 모던 하프시코드 대신 바로크~초기 고전 시대에 쓰인 히스토리컬 하프시코드 연주가 대세가 되었다. 윤이상도 이에 맞추어 히스토리컬 하프시코드용으로 곡을 개작하면서 피아노판도 같이 만드려고 했지만, 생전에 실현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소양음' 의 새 판본들은 모두 윤이상 사후 다른 연주자들의 편집으로 간행됐는데, 하프시코드용 신판은 1998년에 이 곡의 공개 초연자인 에디트 피히트-악센펠트의 새로운 레지스터 지시가 포함된 재편집판으로 간행되었다. 피아노판은 재일교포 출신 피아니스트 한가야가 1996년에 편집했는데, 이 녹음에서도 한가야판을 사용하고 있다.
수록된 음원은 2003년 9월 27일에 베를린 콘체르트잘 분데스알레에서 열린 연주회의 실황인데, 현악 4중주 3번과 마찬가지로 'Yun-Werkstatt' 시리즈 공연 중 첫 번째 콘서트의 녹음을 쓰고 있다(이 때는 바흐의 작품이 같이 연주되었다고 한다). 피아니스트 홀거 그로쇼프는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윤이상에게 작곡을 배운 경력도 있는 연주가인데, 독일 음반사 카프리치오에서 낸 윤이상 실내악 작품집 CD에서도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5. 클라리넷 5중주 제 2번 (1994)
마르틴 슈팡엔베르크(클라리넷)/이투리아가 4중주단 (제 1바이올린 아이촐 이투리아가고이티아, 제 2바이올린 이오키네 이투리아가고이티아, 비올라 카티아 슈토트마이어, 첼로 레베카 리델)
윤이상이 작곡한 마지막 작품들 중 하나인데, 전작인 1번과 마찬가지로 스위스 출신의 본좌 클라리네티스트 에두아르트 브루너를 위해 작곡했다. 원래 일본의 기타큐슈 음악제에서 초연할 예정이었지만, 윤이상의 건강이 날로 악화되어 해외 여행이 힘들어지자 음악제 측의 양해를 얻어 베를린에서 초연했고 윤이상이 생전에 참석한 마지막 연주회라는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1번보다 더 확대되고 동적인 면이 강한 곡이 되었는데, 속지에 기재된 발터-볼프강 슈파러의 해설에 의하면 곡에 '17' 이라는 숫자가 많이 강조되고 있다고 한다. 이미 죽음이 임박했던 만큼 자전적인 요소를 남기고 싶었을 것이라는 추측인데, 실제로 윤이상의 생일은 1917년 9월 17일이다. 이외에 기타큐슈가 윤이상이 일본 유학을 떠나면서 가장 먼저 밟은 일본 땅이었고, 그 추억을 작품에 담으려고 했다는 내용도 보인다.
녹음도 꽤 여러 종류가 있는데, 초연자인 브루너가 아마티 4중주단을 대동하고 녹음한 CPO반과 시노헤 세이키+사와 4중주단이 녹음한 카메라타반을 이미 들어봤기 때문에 이번이 세 번째로 들어본 음원이었다. 여기 수록된 음원은 2001년 11월 1일에 라이프치히의 구 시청사에서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작곡가 윤이상' 이라는 제목으로 열린 음악회의 실황.
독주를 맡은 마르틴 슈팡엔베르크는 뮌헨 필 수석 클라리네티스트를 역임했던 연주가인데, 지금은 바이마르의 프란츠 리스트 음악원 교수로 재직하며 연주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투리아가 4중주단은 1996년에 라이프치히 공연예술대학 졸업생들이 결성한 실내악단인데, 제 1바이올린의 아이촐 이투리아가고이티아는 2001년에 베를린 윤이상 앙상블 멤버로 통영국제음악제에 참가했고 4중주단 전체는 2003년에 같은 음악제에 출연해 공연한 바 있다.
2010년 현재 기준으로는 마지막 협회반인 7집도 기존 음원과 겹치는 곡들이 있는 반면, 처음 들어보는 곡들도 섞여 있었다. 다음 편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