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애니메이션의 현실과 미래라는 과제는 그 자체만으로도 아직까지 갓 건져올린 대어마냥 파닥거리는 신선도 100% 떡밥이고, 온라인이건 오프라인이던 극명하게 엇갈리는 견해로 격렬한 논쟁이 오가기 일쑤다.
하지만 호감과 비호감을 갖고 있는 이들이라도 한국 애니메이션 모두가 걸작 혹은 졸작이라고 싸잡는 이들은 많지 않은데, 어느 나라에서 만들어졌던 어느 시대에 만들어졌건 간에 명작, 범작, 졸작, 괴작 등으로 분류될 수 있는 작품들은 다양하기 마련이다. 불행히도 여기에 거론할 작품은 졸작으로 분류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지만.
김영삼 정권 시절, 한국에서는 그 동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정부 시책이 하나 발표되었다. 바로 정부가 국가적으로 애니메이션 사업을 장려하고 지원한다는 것이었는데, 당시 국내 극장계를 휩쓸었던 '쥬라기 공원' 의 대성공을 보고는 '우리도 거액을 쏟아부으면 저렇게 대중문화계에서 걸작을 낼 수 있다' 는 꽤나 단순하고 무모한 시도였다. 그리고 그 시도는...결과적으로 실패했다.
1995년 발표된 '돌아온 영웅 홍길동' 은 고 신동우 화백의 원작 만화를 소재로 한 극장판 애니메이션이었는데, 이미 1967년에 한국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 꽤 성공한 전력이 있어서 이번에도 그 인기를 부활시켜보자는 의도였다.
과거의 영광을 부활시킨다는 명분 외에도, 당시 광복 50주년을 맞은 터라 그다지 좋다고 볼 수는 없었던 한일 관계를 고려해봤을 때 한일 합작으로 제작되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이 꽤 화제가 되었다. 총감독은 신동우 화백의 동생 신동헌 화백이, 연출은 야마우치 시게야스가 맡았고, 실제로 작품의 연출이나 작화 면에서도 기존의 한국 애니메이션보다는 많이 향상되었다는 평을 받았다.
하지만 기술적인 진보 만으로 예술 작품의 가치 척도가 결정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신동우 화백의 원작과는 동떨어진 괴이한 롤플레잉식 진행과 억지로 끼워넣은 듯한 SF 요소, 일본색이 지나치게 짙은 그림과 연출 스타일은 이 작품이 한국 것인지 일본 것인지도 헷갈릴 정도였다. 게다가 성우도 전문 성우가 아닌, 연기자 위주로 뽑은 것도 패착의 원인이었다.
결국 이 애니메이션은 전국 기준 40여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고도 심한 비판에 시달렸고, 이후 빠른 속도로 잊혀져 지금은 흑역사 정도로 잠깐 거론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개인적으로도 이 때 영화관에서 이 애니를 직접 보고는 한국 애니메이션 전반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만 심해졌고, 한 동안 한국 작품은 모두 '쌩까는' 상황까지 가기도 했다. 그나마 원더풀 데이즈 때 좀 그런 견해를 수정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그것도...lllorz
(지금은 극장판이 아닌, 텔레비전용으로 제작된 '장금이의 꿈' 과 '르브바하프 왕국 재건설기' 두 작품 덕에 이러한 편파적인 견해를 많이 불식시킬 수 있었다는 점이 다행이다. 그래서 르브바하프 DVD는 언제 나오는 거냐 ㅅㅂㄹㅁ)
몇 달 전에 방정리를 좀 하다가 완전히 아오안이 되어 먼지만 뒤집어 쓰고 있던 CD들을 몇 장 찾아냈는데, 그 중에 바로 이 애니메이션의 OST 앨범이 있었다. 처음 보고는 물론 애니메이션 자체에 대한 안좋은 감정 때문에 그다지 유쾌하지는 못했지만, 속지를 넘겨보면서 이 앨범을 내가 왜 버리거나 처분하지 않고 갖고 있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약간이나마 알 수 있었다.
애니메이션 자체에 대한 홍보가 워낙 강렬했고, 그로 인한 비판도 많았기 때문인지 OST에 대한 이야기는 웹에서도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OST 자체도 따로 거론할 필요가 꼭 있는데, 한국 애니메이션 OST 사상 최초로 관현악단을 동원해 녹음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 왼쪽이 CD, 오른쪽은 카세트 테이프. 왜 두 개나 갖고있는 지는 글 마지막에 보충.)
OST의 모든 음악은 김동성이 작곡했는데, 현재 KBS에서 제작되는 거의 모든 사극들의 OST를 전담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김민기의 노래를 관현악화한 '클래식 김민기' 에서도 편곡을 맡았는데, 한국에서는 클래식을, 독일과 미국에서는 재즈를 전공하는 등 장르를 거의 가리지 않고 다방면으로 활동하는 전천후 작/편곡가로 유명하다.
김동성이 어떤 이유로, 또는 어떤 경로로 이 애니의 OST를 담당했는지는 모르지만, 꽤나 모험을 한 셈이다. 기존의 곡을 차용하는 일도 없이 모든 음악-주제가 포함-을 직접 작곡하고, 관현악용으로 편곡해 OST를 만드는 것은 당시 한국 영화계에서도 꽤 드문 경우였기 때문. 그리고 '한국적 정서' 를 살리기 위해서였는지, 서양 관현악 외에도 사물놀이와 태평소, 가야금, 양금, 대금, 당적 등의 전통악기 연주를 곳곳에 끼워넣고 있기도 하다.
작/편곡가의 정체가 밝혀졌다면, 그럼 관현악과 그 지휘는 누가 맡았는지도 궁금할 수밖에 없다. 궁금하지 않아도 궁금한 척좀 굽신굽신 어디서 맡았냐 하면...
바로 부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였다. 그것도 상임이었던 임헌정의 지휘로.
물론 당시 국내 1급이었던 서울시향이나 KBS 교향악단이 맡았다면 더욱 충공깽을 선사했겠지만, 거기까지 시도하려면 아마 예산이 미칠듯이 뛰었을 테니.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당시에도 부천 필-당시 공식 명칭은 부천 시립 교향악단이었다-은 수도권에서 창단된 관현악단 중 가장 장래가 촉망되는 관현악단으로 손꼽히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도 꽤 흥미로운 소식이었다.
비록 예산 절감을 위해 관현악 편성을 변칙 2관 편성-플루트와 클라리넷만 두 대씩 썼고, 오보에와 바순은 한 대씩만 썼다-으로 줄이고 현 파트의 숫자도 많이 감축시킨 형태로 녹음했지만, 이러한 편성 축소는 녹음 기술의 힘으로 충분히 커버가 되는 핸디캡이었다.
실제로 관현악 연주가 주축이 되는 1~7번 트랙은 음악적으로만 따져봐도 썩 괜찮게 느껴지는 편이다. 간혹 너무 짧다 싶은 대목들도 눈에 띄지만, OST 앨범의 특성상 어쩔 수 없을 듯. 특히 관현악 편곡 실력은 상당히 수준급인데, 소편성임에도 여러 종류의 타악기를 중용하고 갖가지 파트에 솔로나 그룹 연주를 맡겨 색감도 다채롭게 연출했다. '내가 왜 이걸 처박아놨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나머지 트랙들을 차지하는 노래들에는 개인적으로 후한 점수를 주고 싶지 않다. 특히 동심의 표현이나 당시 대중가요의 공식 어느 것도 제대로 취하지 못하고, 공익광고에나 쓸 법한 천편일률적인 내용의 나레이션까지 갑툭튀해 미칠듯한 민망함까지 선사하는 주제가 '우리에게 내일이' 가 문제다. 후반부에는 열정적인 스캣까지 선사하며 열창한 김민종의 가창력이 아깝다고 생각될 정도.
이어지는 사랑의 테마 '꿈을 꾸어요' 는 평이하고 무난한 발라드 듀엣 곡이지만, 가수 경력이 있던 김민종에 비하면 상당히 밋밋한 채시라의 노래 때문에 급짜식하게 된다. 차라리 전형적인 창작동요식 어법으로 쓰여진 차돌바위의 주제가 '즐겁게 통통통' 이 진정성 면에서 더 나은 편. 보컬을 맡은 자칭 이대나온 여자 윤석화도 낮은 톤이 약간 거슬리기는 하지만, 연극 무대의 경험이 뒷받침되었는지 그럭저럭 무난하게 경쾌한 가창법을 선보이고 있다.
결론을 짓자면 한국 애니메이션 OST 앨범 중 상당히 공을 들여 만든 케이스에 속하고, 음악적인 가치 자체는 재고해볼 필요가 분명히 있는 음반이다. 하지만 애니 자체가 흑역사가 되었고, 그 덕에 재발매의 가능성도 0에 수렴하는 탓에 아쉬울 따름이다. 일본이나 미국 등지에서 하는 것처럼 기악 연주 부분만 따로 정리해 모음곡 등으로 2차 창작하는 대안도 있을 수 있겠지만.
앨범과 애니의 운명과는 별도로, 부천 필은 이후에도 한국 최초로 말러 교향곡 전곡을 완주하는 등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 서울의 유명 악단에 뒤지기는 커녕 오히려 발라버릴 정도라는 평까지 받을 정도로 성장했다. 하지만 악단을 이 수준으로 끌어올리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임본좌의 건강 상태가 영 좋지않다는 것이 걱정이다. 어쨌든 지금은 거의 클래식 전문 악단으로 입지를 굳힌 악단과 지휘자에게 이 앨범을 회상시켜 본다면 어떤 반응이 나올 지가 꽤 궁금하다.
뱀다리: 그리고 이 앨범은 CD와 카세트 테이프의 수록 순서가 좀 다르다. 카세트 테이프의 경우 노래 세 곡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일곱 개의 기악 섹션이 따라나오는데, 말미에는 CD에도 없는 '즐겁게 통통통' 의 기악 버전까지 수록되어 있다. 그것 때문에 카세트 테이프까지 구입한 거였는데, 대체 이건 왜 CD에 안실린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