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미널 근처에 있던 한 찜질방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유스퀘어에서 집어온 막연한 축척의 지도에 의지해가며 5·18 자유공원으로 가기 위해 빗속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예상보다 훨씬 먼 거리였고, 게다가 내가 찾던 공원이 아닌 5·18 기념공원이었다. 물론 저 공원도 항쟁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곳이기는 했지만, 계엄군에 의해 끌려간 연행자들이 고초를 치뤘던 곳을 보기 위한 목적에는 부합하지 못하는 곳이기도 했다.
어쨌든 사진 하나는 찍어봤다. 기념공원 내의 시설물인 5·18 기념문화관 뒷편인데, 802석의 민주홀을 비롯한 공연장과 회의실, 항쟁 당시와 그 이후의 사료와 자료, 유품 등을 모아놓은 자료실 등을 포함한 다목적 문화공간으로 건립된 곳이라고 했다.
건너편 버스정류장에서 518번 간선버스를 타고 정말 목표로 했던 자유공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번호에서 쉽게 알 수 있듯이 산 자가 가혹행위를 당했던 자유공원과 죽은 자들이 쉬고 있는 민주묘지를 연결하는 노선인데, 특별히 버스노선까지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는 것도 아직 항쟁의 여파는 계속된다는 의미로 여겨졌다.
자유공원 머릿돌 오른편에는 광주의 야학운동 단체였던 '들불야학' 의 중요 강사 일곱 사람을 북두칠성 별자리 모양으로 조형화한 추모비도 세워져 있다. 검은 돌 위에는 해당 인물들의 청동 부조와 간단한 이력이 적혀 있는데, 항쟁 전에 과로사했던 박기순 외에도 항쟁 마지막 날이었던 27일 새벽에 벌어진 총격전에서 목숨을 잃은 윤상원과 박용준, 항쟁 후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단식투쟁 끝에 사망한 박관현도 물론 포함되어 있다.
공원은 크게 전시와 회의 시설을 겸한 자유관과 당시 상무대(정식 명칭은 전투교육사령부) 헌병대를 재현한 막사 시설로 나뉘었는데, 먼저 자유관부터 들어갔다.
들어가서 오른편에 있는 전시 시설에는 80년대 민중 미술 작품으로 많이 볼 수 있는 판화들과 계엄사령부의 포고문과 경고문, 전남매일신문의 호외, 시민군과 수습위원회 측이 작성한 투사회보 등의 유인물 원본 혹은 사본들이 전시되어 있다. 물론 항쟁 전의 한국 상황과 항쟁의 경과, 계엄군의 진압으로 종결되기까지의 상황들도 시간 순으로 쭉 나열되어 있다.
간혹 소위 '고어물' 에 민감한 이들에게는 보기 꺼림직한 사진들도 몇 장 들어 있는데, 중간 짤방에 희미하게 보이는 사람 얼굴 사진들은 항쟁 당시 사망한 이들의 신원 확인을 위해 시민들이 찍은 것들이다. 그나마 공공 전시시설임을 고려해 안면부가 비교적 깨끗한 시신들의 사진을 택한 것 같은데, 얼굴이 진압봉과 군홧발 난타로 짓뭉개지거나 총탄에 날아가버린 사진들보다는 나은 편이었다.
살해된 희생자의 사진은 시신의 상태가 양호하건 훼손되어 있던 간에 상당히 끔찍한 기록물이기는 하지만, 계엄군의 진압 양상을 설명하는데 더없이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그래서 주로 진압봉과 대검에 살해된 초기 희생자들의 경우 거의 온 몸에 타박상이나 자상이 있는 경우가 많고, 본격적인 살상 목적 발포가 시작된 21일 이후에는 가슴이나 허벅지, 목, 머리 등에 관통상을 입은 경우가 많다.
(여담으로, 항쟁 후 계엄사령부 측에서 작성한 희생자들의 검시보고서에 첨부된 사진들은 시신 신원 확인이 되었던 안되었건 간에 얼굴에 시꺼먼 액체를 칠해놓고 촬영되었다. 처음엔 더운 날씨에 부패되어 그런게 아닌가 싶었지만, 얼굴 아래의 몸은 그럭저럭 멀쩡한 피부색이었던 것을 보면 뭔가 신원 은폐 등의 목적으로 행한 짓이 아닌가 싶다.)
그 외에는 항쟁 전후 해외에서 발행된 외신들의 보도와 계엄군이 착용한 전투복, 카빈과 M16 소총, 진압봉, 연행자들이 입었던 죄수복, 사망자 매장 당시 시신을 감쌌던 피얼룩이 진 태극기 등도 진열되어 있었다. 이후 민주묘지에서 본 전시물들도 이와 비슷한 구성이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