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동백림 사건' 으로 큰 피해를 입은 이들 중에는 그 당시, 혹은 훗날 유명 인사가 된 인물들이 적잖이 포함되어 있었다. 내가 크게 기억하는 이들로는 화가 이응로와 작곡가 윤이상 두 사람이 저 사건에 말려들어 큰 굴욕을 당했는데, 그 중 윤이상의 경우 국제 문제로까지 비화되어 굉장히 시끄러웠다고들 한다.
사실 이 사건에는 중앙정보부의 납치나 다름없는 강제 송환 조치를 비롯해 일제 시대부터 이어져온 고문을 비롯한 비인간적인 심문 절차, 언론 보도의 검열 등으로 인해 일반 대중들에게는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사실 혹은 진실들이 숨어 있었다. 하지만 이를 알고 있던 이들은 극소수였고, 알고 있다고 해도 함부로 발설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나마 아직은 독립성을 유지하던 사법부에서 피고들의 형량을 단계별로 낮춰주면서 대부분 극형은 면하게 되었고, 윤이상의 경우 1969년에 특별 사면 조치가 취해져 독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내부적으로 조용히 처리된 정도에 불과했고, 윤이상에게 씌워진 '북한 스파이' 혹은 '친북 좌익' 이라는 죄목에 대해서는 어떠한 해명이나 번복도 없었다.
이러한 평가는 한국 음악계에서도 매우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한국 음악인이 한국 내에서건 아니면 해외에서건 윤이상 작품의 연주/가창/지휘를 하는 것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하드코어 미션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1971년에 개최된 서울음악제에서 실내악 작품인 '낙양' 이 연주된 극히 드문 예를 제외하면, 윤이상 곡을 다룬다는 것은 곧 친북 행위요 반국가 행위라고 낙인찍히기 십상이었다.
실제로 독일 유학 시절 윤이상 곡을 부르지 말라는 '높으신 분들' 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가곡' 을 프랑크푸르트 음대 연주회에서 불렀던 성악가 윤인숙은 잠시 귀국한 뒤 출국 금지령이 떨어져 복학에 어려움을 겪었고, 독일에 초청받아 '무악' 을 지휘했던 임원식은 귀국 후 이 사실이 알려지자 모 음악잡지에서 마련한 특집 코너-라고 쓰고 인민재판이라고 읽는다-를 통해 그야말로 제대로 '레이드' 를 당했던 바 있었다.
1970년대 내내 이렇게 찬밥 신세였던 윤이상 음악이 한국에서 '복권되기' 시작한 것이 1982년에 열린 제 7회 대한민국음악제 때였는데, 문화공보부와 KBS라는 정부/공영방송에서 주최하는 음악회에서 윤이상 작품만 연주되는 공연이 두 차례나 편성되면서 충공깽을 안겨주었다.
심지어 당시 지독히도 친정부 계통이었던 경향신문에서도 이 공연이 유례없는 매진 사례를 기록하고 있고, 그 동안 구할 수 없었던 윤이상 악보도 특별히 전시/판매된다는 소식을 전하는 기사(1982.9.13 7면)를 실었을 정도였다. 다만 윤이상 자신은 계속되는 군사 정권과의 대립각 때문에 여전히 내한하지 못했고, 이런저런 기사나 평문들에서도 과거 정치적으로 안좋았던 '뒤끝' 을 애써 들추지 않기 위해 고투한 흔적까지 볼 수 있을 정도로 제한적으로 치러진 음악회이기도 했다.
제 7회 대한민국음악제는 9월 14일부터 25일까지 개최되었는데, 일본의 도쿄 교향악단이 창단 이후 최초로 한국을 방문해 공연을 개최한 것도 얘깃거리가 되었다. 윤이상 작품 연주회는 24일의 '교향악의 밤', 25일의 '실내악의 밤' 두 차례로 나뉘어 진행되었는데, 프로그램 목록은 다음과 같다;
24일: 세종문화회관 대강당 (19:30 개연)
-1부-
관현악 '서주와 추상' (프로그램에는 '환주와 추억' 이라고 번역됨)
오보에와 하프를 위한 2중 협주곡
-2부-
대규모 관현악을 위한 무용 환상 '무악'
대규모 관현악을 위한 '예악'
독주: 하인츠 홀리거 (오보에. 협주곡) & 우어줄라 홀리거 (하프. '서주와 추상' 과 협주곡)
KBS 교향악단/프랜시스 트래비스
25일: 국립극장 대극장 (19:30 개연)
-1부-
실내 합주 '협주적 단편'
오보에, 하프와 비올라를 위한 소나타
-2부-
오보에 독주 '피리'
실내 합주 '낙양' (프로그램에는 서양식 표기법인 '로양' 으로 기재됨)
다만 이 때 나는 세상 물정 모르는 세 살배기 꼬맹이였고, 부모님도 유감스럽게 이런 계통의 음악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터라 이 공연을 직접 볼 기회가 없었다. 이 공연에 대해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에야 윤이상 음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였는데, 실황을 녹음한 음원과 영상이 국립예술자료원(구 아르코예술정보관)에서 검색되길래 날잡아서 모두 듣고 볼 수 있었다.
해당 자료들은 문예진흥원에서 자체 제작한 자료들이라, 다른 자료들과 달리 관외대출이 불가능한 상태다. 오로지 자료원 회원으로 등록한 이들만 관내에 비치된 CD플레이어와 VTR로 이용할 수 있는데, 물론 작년에 회비 3만원 내고 평생회원으로 등록한 터라 별 문제는 없었다.
이틀 간의 연주회는 일단 '기록상으로는' 모두 녹음되어 연주회 하나 당 두 장씩의 CD로 제작되어 있는데, 원본 릴 테이프도 보존되고 있기는 하지만 열화가 심한지 회원도 이용불가인 특수자료로 분류되어 있다.
CD 케이스 겉면과 CD 알맹이 짤방. 케이스 겉면에는 공연 명칭과 날짜만 손글씨로 간략하게 기입되어 있고, CD 알맹이에도 원본 릴테이프 번호와 공연명/날짜만 쓰여 있다. 결국 당시 공연 기록을 모조리 검색하고, 그 중 녹음이 있는지 없는지 상세검색으로 일일이 찾아봐야 자기가 원하는 자료를 얻을 수 있는 셈. 꽤나 귀차니즘과 근성을 요하는 과정이지만, 이 CD들을 애써 찾아 듣는 사람은 가입 후 수 개월간 찾아봐도 나밖에는 없는 것 같다(...).
과연 20년도 더 전의 방송 녹음 상태는 어땠을까 하는 기대감을 안고 들어봤지만...결과는 매우 좋지 않았다. 타임 테이블까지 짜가며 들어봤는데, 아래 목록을 보면 CD로 옮기면서 트랙 구분이라던가 녹음의 단락 분류가 꽤 아햏햏한 것을 파악할 수 있을 듯.
24일 녹음 I (CD12424, 원본 릴테이프 AT0523)
트랙 1
0:00~15:50 → 서주와 추상
15:50~16:54 → 박수
16:54~17:04 → 무대 소음
17:04~43:53 → 2중 협주곡 (1)
상식적으로는 '서주와 추상' 이 끝나고 다음 트랙으로 넘어가야 하겠지만, 그냥 통짜로 이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냥 이어져 있다면 모를까.
트랙 2
0:00~3:16 → 2중 협주곡 (2)
트랙 3
0:00~0:33 → 2중 협주곡 (3)
0:33~1:03 → 무음
이렇게 협주곡 연주 도중에 트랙이 두 번 바뀌더니, 갑자기 도중에 끊기고 무음 처리가 되면서 첫 번째 CD의 재생이 끝났다. 연주 도중에 큰 실수가 있어서 올스톱된 것이었을까? 하지만 그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두 번째 CD를 재생하자마자 협주곡의 녹음이 이어졌다. 끊긴 사이에 음악의 결핍이 있었는지는 총보를 보면서 들어본 결과 다행히도 없었지만, 그래도 왜 이렇게 부자연스럽게 녹음이 되었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설마 테이프 수록 시간이 모자라 다른 릴테이프를 급하게 갈아넣느라 그랬던 걸까?
게다가 협주곡 연주가 끝나고도 트랙은 바뀌지 않고 그대로 '무악' 과 '예악' 의 연주가 이어지게 복각되어 있다. 첫 번째 CD의 협주곡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트랙 바꿈 신공으로 데미지를 주었던 것이 여기서는 47분짜리 통짜 트랙으로 뒷통수를 치면서 제대로 된 반전(?????)을 보여준 셈.
하지만 이보다 더 심한 충공깽은 다음 날인 25일의 녹음, 특히 1부의 녹음이었다.
25일 녹음 I (CD 12426, 원본 릴테이프 AT0525)
트랙 1
0:00~0:29 → 튜닝과 무대 소음
트랙 2
0:00~4:36 → 협주적 단편 (1)
트랙 3
0:00~2:26 → 협주적 단편 (2)
트랙 4
0:00~3:25 → 협주적 단편 (3)
트랙 5
0:00~3:08 → 협주적 단편 (4)
트랙 6
0:00~0:06 → 박수
0:06~0:09 → 무음
트랙 7
0:00~0:16 → 무음
보통 '협주적 단편' 은 한 트랙에 담는 음반이 대부분이다. 다악장 곡도 아니고 특별히 흐름이 크게 끊기는 대목이 많은 작품도 아니기 때문인데, 여기서는 트랙을 네 개나 나눠놓는 이상한 꼼꼼함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아무 소리도 안나는 일곱 번째 트랙의 추가는 심오하다고까지 느껴질 지경. 히든 트랙 삘? 그리고 진짜 충공깽은 다음 곡의 녹음이다.
트랙 8
0:00~0:03 → 무대 소음
트랙 9
0:00~1:15 → 오보에, 하프와 비올라를 위한 소나타 (1)
트랙 10
0:00~1:12 → 오보에, 하프와 비올라를 위한 소나타 (2)
트랙 11
0:00~4:35 → 오보에, 하프와 비올라를 위한 소나타 (3)
트랙 12
0:00~0:01 → 오보에, 하프와 비올라를 위한 소나타 (4)
0:01~0:07 → 무대 소음
트랙 13
0:00~1:36 → 오보에, 하프와 비올라를 위한 소나타 (5)
트랙 14
0:00~0:06 → 오보에, 하프와 비올라를 위한 소나타 (6)
트랙 15
0:00~0:13 → 오보에, 하프와 비올라를 위한 소나타 (7)
트랙 16
0:00~0:14 → 오보에, 하프와 비올라를 위한 소나타 (8)
트랙 17
0:00~0:16 → 오보에, 하프와 비올라를 위한 소나타 (9)
트랙 18
0:00~1:20 → 오보에, 하프와 비올라를 위한 소나타 (10)
트랙 19
0:00~1:04 → 오보에, 하프와 비올라를 위한 소나타 (11)
트랙 20
0:00~2:20 → 오보에, 하프와 비올라를 위한 소나타 (12)
트랙 21
0:00~0:04 → 오보에, 하프와 비올라를 위한 소나타 (13)
트랙 22
0:00~1:28 → 오보에, 하프와 비올라를 위한 소나타 (14)
트랙 23
0:00~0:21 → 무대 소음
트랙 24
0:00~3:13 → 오보에, 하프와 비올라를 위한 소나타 (15)
트랙 25
0:00~6:41 → 오보에, 하프와 비올라를 위한 소나타 (16)
6:41~6:47 → 박수
6:47~6:54 → 무음
'협주적 단편' 과 마찬가지로, 연주 시간이 30분 남짓인 이 소나타도 음반 제작 때는 트랙 하나에 담는 것이 보통이다. 다만 이 녹음에서는 두 차례 곡이 끊기고 무대 소음이 들리는 것으로 봐서는 크게 세 섹션으로 나눠 연주한 것 같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이 곡 하나에 무려 16개 트랙-무대 소음만 든 트랙 제외-이나 쓴 것은 정말 이해가 안된다. AVGN의 명대사 "What are they thinking?!!" 을 외치고 싶을 정도.
25일 녹음 II (CD 12427, 원본 릴테이프 AT0526)
트랙 1
0:00~0:03 → 무음
0:04~4:48 → 피리 (1)
트랙 2
0:00~9:17 → 피리 (2)
9:17~9:26 → 무대 소음
9:26~9:39 → 박수
9:39~9:47 → 무대 소음
'피리' 역시 한 트랙에 담는 것이 보통이지만, 여기서는 특별한 장인 정신(???)으로 두 트랙에 나누어 담아놓고 있다.
트랙 3
0:00~5:18 → 낙양 (1부)
5:18~5:26 → 무대 소음
5:26~10:35 → 낙양 (2부)
10:35~10:51 → 무대 소음과 일부 악기 재튜닝
10:51~16:44 → 낙양 (3부)
16:44~17:01 → 박수
17:01~17:10 → 테이프 노이즈
17:11~17:17 → 무음
트랙 나눔 상태만 보면 그나마 가장 양호한 것이 이 '낙양' 이다. 베르고의 CD에는 한 트랙에 통짜로 수록하고 있고, 카메라타의 CD에서는 세 단락으로 나눠서 수록하고 있는데, 무대 소음이 두 차례 들어간 것으로 봐서는 카메라타식 트랙 나눔이 좀 더 자연스럽다고 느껴져 그에 따라 분리했다.
양일 녹음 중 어느 것이나 첫 번째 곡의 녹음 상태는 괜찮은 편이다. 하지만 두 번째 곡으로 넘어가서부터는 지글거리고 규칙적으로 툭툭 튀어대는 잡음, 관현악 총주에서 짓뭉개지는 소리, 부자연스러운 성부 균형 등이 상당히 거슬리는데, 2부 프로그램으로 넘어가면 마치 옛날 SP를 듣는 듯한 시공간 초월의 경험까지 하게 된다. 대체 녹음한 릴테이프를 어떻게 보관했길래, 아니면 얼마나 저질의 릴테이프 혹은 녹음 장비를 썼길래 이 정도까지 심한 열화가 진행되었을까?
개인적으로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이 녹음들은 자료 그 이상의 가치는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CD화 혹은 디지털 음원화해 판매하기에는 너무 음질이 안좋고, 설령 테스타먼트나 타라, 아우디테 같은 전문 복각 업체에 위탁해 소리를 다듬는다고 해도 원 소스 자체가 모노럴에 흐릿한 음질이라는 점에서 '1940~50년대 수준 만도 못한 1980년대 음원' 을 누가 돈주고 사서 듣겠냐는 거다.
어쨌든 녹음 외에, 전 공연의 영상은 아니지만 두 곡씩 녹화된 KBS 영상물의 비디오 테이프 카피본도 같은 곳에 소장되어 있어서 연이어 시청할 수 있었다. 다음 편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