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냉면을 그리 즐겨먹지는 않는 편이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가게들에서 고명으로 얹어내는 오이채의 충공깽에-물론 오이채 빼달라고 하면 되지만, 그게 왜 그리 귀찮은지-, 전문점으로 유명한 곳들은 하나같이 가볍게 한 그릇 먹고 나오기 꽤 버거운 고가를 자랑하기 때문에 어지간한 각오(?)를 하지 않는 이상 쉽게 들어갈 엄두도 못내고 있는 현시창.
하지만 쩔쩔 끓는 한낮의 더위도 마찬가지로 감당하기 힘들다. 추위야 강원도 북부에서 군 생활을 한 덕에 그래도 어느 정도 참을 수 있지만, 더위는 정말 답이 없다. 게다가 습도가 높아 끈적대는 기분나쁜 날은 환장하기 일보직전 상태.
그래서 그 더위 덕에 정신줄을 놓았는지(???), 지갑 사정도 별로인 녀석이 7월 초순에 갑자기 냉면을 먹어야 겠다고 들이닥쳐 버렸다. 장소는 꽤 예전에 짤방 없이 포스팅했었던 을지면옥.
이미 몇 차례 가본 가게라, 찾아가기는 무척 쉬웠다. 3호선 을지로3가역 5번출구로 나와 몇 발짝 걷다 보면 위 짤방처럼 길쭉한 세로 간판이 보인다.
그리고 그 간판 밑에는 이렇게 붓글씨체의 가게 표시와 좁은 통로가 나 있는 것도 여전했고.
원래 가게 주인이 실향민이라 그런지, 빛바랜 북한 지방의 옛날 사진이나 지도들이 쫙 걸려 있다. 마치 조그마한 갤러리 같은 분위기인데, 비교적 근래인 2006년에 누군가가 찍어온 듯한 황해도의 어느 지방 컬러 사진도 추가되어 있었다. (맨 왼쪽 위에 보이는 커다란 액자를 잘 들여다 보면, 액자 오른쪽 밑의 귀퉁이에 새로 끼워넣은 사진이 보인다.)
그렇게 짧은 통로를 지나면 바로 앞에 진짜로 가게 대문이 나온다. 평일 오후 4시 20분 쯤에 가서 그랬는지 1층에서는 청소를 하고 있어서 2층으로 올라가서 먹어야 했다. 2층에 올라가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올라가서 본 메뉴판. 확실히 가격이 꽤 올랐다. 하지만 이미 놓친 정신줄을 수습할 겨를도, 생각도 없었다. 여기서는 물냉면을 지칭하는 냉면(8000\)을 바로 주문했다. 냉면 외에 소고기국밥도 무슨 맛일 지 궁금했는데, 그렇다고 더운 날씨에 더운 국밥 그릇을 끌어안고 쳐묵쳐묵할 기운도 없었다.
여느 때처럼 먼저 면을 삶은 물이 나왔다. 하지만 굉장히 뜨거워서, 잔을 잡는 것도 힘들 정도였다. 한 모금 홀짝 해본 것은 냉면을 반 쯤 먹고 나서였는데, 구수한 맛은 여전했다.
수저통과 양념통 등등. 이 곳 특유의 밍밍한 육수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이들은 식초며 간장을 마구 뿌려 먹기도 하겠지만, 나는 그냥 아무 것도 치지 않고 먹는다. 먹다 보면 그게 오히려 낫다고 느껴지기도 하고.
주문한 냉면. 꽤 간단한 고명과 반찬으로 딸려나온 얇게 썬 무김치는 여전했다. 육수도 꽤 시원했고. 바로 이 시원한 육수 때문에 찾아온 만큼, 꽤나 기대하고 있었다.
다만 예전보다는 육수의 맛이 좀 진해진 듯한 느낌이었다. 끝의 고깃국물 맛도 좀 더 강한 편이었는데, 거의 옅은 동치미 국물 맛이었던 예전 맛을 기대했던 터라 약간 실망했다. 그래도 육수 자체는 시원한 편이었고, 가끔 무김치랑 같이 먹으면 그럭저럭 상큼한 맛도 느낄 수 있었다.
냉면 고명의 포인트 3종 셋트. 삶은 달걀 반 쪽과 육수 우리는데 쓴 돼지고기와 쇠고기의 편육이다. 밝은 색의 고기가 돼지고기.
학원 시간표가 좀 뒤틀려서 가는 날이면 늘 점심을 거르던가 부실하게 먹는 실정인데, 그런 것을 감안해도 양이 꽤 많았다. 까딱하면 국물을 남기고 올 뻔했는데, 면수로 입을 가셔가면서 간신히 그릇을 비워냈다. 가격에 좌절하기는 해도, 양이 많아서 꼭 비싸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이 가격을 늘상 기꺼이 감당할 만큼의 용기도 없지만. lllorz
그릇을 비운 뒤 주문할 때 받았던 손바닥 크기의 번호판을 들고 내려왔다. 예전에 1층에서 먹었을 때는 이런 것이 필요없었지만.
육수 맛이 좀 변한 것 같은 느낌이 에러이기는 했어도, 확실히 전문점 다운 모습은 아직 유지하고 있었다. 기회가 된다면 유진식당의 물냉면을 한 번 먹어보려고 하는데, 거기도 여기보다는 훨씬 싸지만 가격인상크리를 피하지 못해 5000원이 되어 버렸다. 좀 더 쌀 때 먹어보는 거였는데. lllOT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