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의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음악교육 프로그램인 '엘 시스테마' 를 다룬 같은 제목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광복절에 본 뒤, 이번에는 책이 또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질렀다. 사실 어떤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 매체의 출현과 동시에, 혹은 비슷한 시기에 나온 책들의 경우 개인적으로 큰 관심을 주지 않고 있는 점에서는 꽤 이례적이었고. 그나마 래핑되지 않은 책이라, 그 자리에서 한 번 속독하고 나서 '대세에 편승해 끼워넣은' 식으로 급조된 책이 아니라고 판단한 뒤 구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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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인 김희경의 후기에 따르면, 저 책은 엘 시스테마의 역사가 딱 30년이 된 2005년에 발간된 에스파냐어 원서의 영어판 번역본을 한국어로 중역한 것이라고 한다. 다른 언어로 이미 번역된 책을 중역하는 과정에서 뭔가 빠지거나 두 번의 번역을 거쳐 의미가 달라진 대목이 있을까 좀 걱정이 되는데, 일단 엘 시스테마 최고 책임자인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와 출판 주체인 카리베 은행의 검토와 허가를 받아 간행됐다고 한다.
저자는 베네수엘라의 일간지 '엘 나시오날' 에서 오랫동안 기자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언론인 체피 보르사치니라고 되어 있는데, 물론 보르사치니 자신이 쓴 글 외에도 아브레우를 포함한 엘 시스테마의 여러 관계자들과 참가 학생들의 인터뷰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엘 시스테마의 수혜를 받은 두 부부와 한 학생의 인터뷰와 수기가 나오는데, 특히 레나르 호세 아코스타 라미레스의 수기에는 온갖 산전수전 다 겪고 음악에 천착하기까지의 과정이 꽤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마약 거래 등의 범죄를 저지르고 소년원을 전전하다가 엘 시스테마 강사의 천거로 클라리넷을 잡고 현시창이었던 인생을 청산했다는 내용인데, 워낙 극적인 에피소드라 그런지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나온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관현악단의 CD 해설지에도 약간 언급되어 있다.
연두색 바탕 종이에 인쇄된 프롤로그가 끝나면 엘 시스테마의 태동기였던 1975년부터 1980년까지의 초창기 역사를 주제로 본론이 시작된다. 그 당시 물론 베네수엘라에도 관현악단이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 외국인 연주자들이 단원이었고 베네수엘라인은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고 해도 입단이 무척 힘든 탓에 수많은 음악학도들이 결국 음악을 포기해버리는 실정이었다고 한다.
아브레우를 비롯한 몇몇 음악인 혹은 음악 애호가들이 이러한 현실에 맞서 시작한 것이 '엘 시스테마' 였는데, 이 초기 과정의 발단과 전개, 온갖 어려움, 처음 얻은 성과 등은 아브레우와 비올리스트 프랑크 디 폴로 두 초기 개척자들이 저자와 가진 인터뷰 내용에 상세히 소개되고 있다. 특히 가장 상세하게 다루고 있는 아브레우의 인터뷰에서는 그가 단순히 음악을 취미로 했던 경제학자가 아니라, 음악원에서 정식으로 건반악기 전반과 작곡, 지휘를 배운 프로였다는 경력을 새로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 단원에서는 엘 시스테마의 교육 체계와 이념, 교육 시설의 분포도, 악기별 교육 과정, 장애를 가졌거나 범죄 경력이 있는 청소년들에 대한 특수 음악 교육, 악기의 자체 조달과 관리를 위한 노력 등이 서술되고 있다. 물론 여기서도 저자의 견해나 통계 수치 외에도 엘 시스테마의 여러 관계자들의 인터뷰들이 군데군데 삽입되어 내용을 보충하고 있다.
참가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인터뷰도 비슷한 비중으로 들어가는데, 대부분 평범하거나 가난한, 혹은 장애를 갖고 있는 이들임에도 자신의 포부와 장래 계획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어서 꽤 흥미로운 대목이었다. 음악을 본업으로 삼고 싶던, 아니면 부업 혹은 취미로 하고 싶건 간에 손에서 놓지 않겠다는 생각은 모두 똑같았다.
세 번째 단원은 엘 시스테마의 정점에 있는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관현악단' 에 대한 소사와 중요 관계자들에 대한 소개, 인터뷰가 차지하고 있다. 국제적인 인지도가 부쩍 높아진 두다멜 이전의 악단에 관한 정보에 큰 비중이 주어져 있는 것이 크게 눈에 띄는데, 악단을 거쳐간 여러 객원 지휘자들-그냥 지나가는 정도지만, 그 중에는 2010년 현재 대구시향 상임 지휘자인 곽승도 들어 있다-외에 이 악단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던 멕시코 지휘자 에두아르도 마타에 대한 내용이 꽤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사실 이 악단은 1978년 창단된 지 겨우 2년 남짓 지난 1980년대 초반에 첫 음반들로 6장의 LP를 냈는데, 국제적으로 유통된 첫 음반은 미국 음반사인 도리안(Dorian)에서 마타를 주축으로 엔리케 아르투로 디에메케, 막시미아노 발데스가 지휘해 녹음한 아홉 장의 CD들이었다. 하지만 이 CD들은 한국에서 찾아보기가 어려운 편인데, 예전에 용산 전자랜드 1층의 예인사에서 몇 장을 발견했지만 사지는 못했다. (8월에 갔을 때는 한창 리모델링 공사 중이어서 그 행방도 알 수 없다. lllorz)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홉 장 중 여덟 장은 낙소스 뮤직라이브러리에서 청취가 가능하다는 것인데, '베네수엘라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교향악단(Simon Bolivar Symphony Orchestra of Venezuela)' 라고 치면 나온다. 이름이 약간 달라 보이지만, 같은 단체다. 에스파냐의 본좌 작곡가들 중 한 사람인 마누엘 데 파야부터 알베르토 히나스테라나 에이토르 빌라-로부스, 카를로스 차베스 같은 소위 '네임드' 남미 작곡가들, 안토니오 에스테베스 같은 베네수엘라 작곡가들까지 라틴계 레퍼토리들을 듬뿍 담고 있어서, 나중에 한 번 사냥해 볼 예정이다.
이외에도 시몬 볼리바르 관현악단이 입단 희망자가 많아지면서 성인들이 주축이 되는 A팀과 30세 이하 청소년/청년이 주축이 되는 B팀으로 나뉘어졌다는 사실도 여기서 처음 확인했고-두다멜이 지휘하고 있는 악단은 B팀이다-, 1980년부터 개최하기 시작한 해외 순회 공연의 역사도 매우 흥미있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책의 가치가 높다고 여긴 것은, 직접 음악을 하지는 않더라도 이 프로젝트와 관련된 모든 제반 사항을 처리하는 무대 뒤의 행정직들에 대해서 자세하게 서술한 부분이었다.
사실 프로 악단들도 무대 위에서 연주하는 단원들 못지 않게 행정 직원들의 비중이 큰 편인데, 전업 음악인도 아닌 청소년들로 구성된 대규모 관현악단 수백 팀이 활동 중인 베네수엘라에서는 이들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아마 그 점을 저자가 확실히 인지한 모양이었는데, 악단의 공연 기획, 무대 감독, 악보 담당, 연주 여행 보조, 시청각 자료 기록 담당, 의료진까지 이 프로젝트와 함께 움직이는 거의 모든 행정직들의 활동과 인터뷰를 비중있게 실어놓고 있다.
행정 직원들의 대다수도 엘 시스테마에서 음악 교육을 받고 관현악단이나 합창단에서 연주 활동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론 뿐 아니라 실무에서도 그 경험을 살려 효과적으로 보조를 맞출 수 있다는 것이 책의 설명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과연 자신이 음악을 배워 본 행정 직원들의 비중이 얼마나 될 지 궁금한데, 이 프로젝트가 단순히 음악 영재만을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와 청소년의 사회화 과정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지를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
마지막 단원은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관현악단과 국립 어린이 관현악단을 비롯한 엘 시스테마의 악단들이 1990년대 중반부터 해왔던 해외 공연 여정과 이 프로젝트 수혜자들 중 최고의 지명도를 자랑하는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 콘트라베이시스트 에딕손 루이스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그리고 엘 시스테마가 단순히 베네수엘라의 음악 교육에 국한하지 않고 중남미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자신들의 체계와 경험을 살려 꾸준히 보급되고 확장되는 과정이 서술되어 있다.
엘 시스테마의 세계화 과정은 역자 후기에도 추가로 언급되어 있는데, 심지어 경제적으로는 베네수엘라보다 훨씬 우위에 있는 소위 '천조국' 미국에서도 엘 시스테마 USA라는 이름으로 이 프로젝트를 도입하고 있다는 소식이 실려 있었다. 유럽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진행 중이라고 하는데, 과연 베네수엘라에서 보여준 성과가 전 세계로 파급되어 어떠한 효력을 보여줄 지 매우 궁금하다.
역자 후기 전의 마지막 단락인 에필로그는 프롤로그와 마찬가지로 연두색 종이에 인쇄되어 있다. 엘 시스테마의 성공 사례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베네수엘라를 방문한 두 지휘자들인 사이먼 래틀과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방문기들이 실려 있는데, 각기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현직/전직 예술 감독인 두 대가가 각각 1주일과 두 달 반 남짓 베네수엘라에 머물며 본 온갖 공연과 교육 현장, 마지막으로 이들이 직접 지휘대에 올라 개최한 대규모 연주회의 여정,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다.
역자 후기에는 단순히 번역 과정의 고충이나 책에 대한 자신의 느낌만 적혀 있지 않은데, 위에 쓴 것처럼 2005년 책이 출간된 후 한국어판이 나오기 까지의 기간 동안 갱신된 정보들과 가난한 자들에 대한 물질적 충족 만큼이나 중요한 정신적 충족의 필요성, 그리고 이 책의 영어 번역본을 어렵게 보내준 엘 시스테마 관계자들에 대한 감사의 말이 더해져 있다.
물론 베네수엘라인이 자국의 사정을 기록한 책이라 어떤 면에서는 다소 국수적이고 편파적인 면도 있을 수 있다. 실제로 역자도 후기에서 이 프로젝트를 주도한 아브레우가 너무 지나치게 우상화되고 있다는 비판도 있음을 언급하기도 했다. 외국인들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들의 노선과 병치시켜서 보면 상호 보완도 될 것 같은데, 무엇이 되던 클래식 음악이 단순히 있는 자들의 고고한 예술이 아닌 모든 이를 위한 예술이자 사회와도 긴밀히 연관될 수 있음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을 듯.
뱀다리: 그리고 오역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두다멜에 대한 대목 중에 그가 청소년 시절 작곡한 곡들에 대한 설명 중 '~를 위한 콘서트' 라는 대목이 있는데, 이는 아마 협주곡이라는 뜻의 '콘체르토(Concerto)' 를 오역한게 아닌가 싶다. 번역자가 영어 번역서를 기준으로 번역했다고 하니 그 쪽에서 오역이 난 것일 수도 있는데, 사실 확인이 좀 더 필요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