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세기 동안 독일 뿐 아니라 유럽에서 '대중음악' 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 민요와 왈츠, 폴카 등의 춤곡, 오페레타 같은 가벼운 음악극 종류를 지칭하는 단어였다. 그러다가 미국에서 갑툭튀한 재즈와 블루스의 양식과 화려한 쇼맨십이 가미된 프랑스 오페레타가 독일로 유입되면서 조금씩 판도가 바뀌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레뷰(Revue)라는 흥행성 강한 음악극이 나왔다. 이 레뷰는 훗날 뮤지컬의 직계 선조 역할도 했기 때문에, 과도기에 탄생한 장르로 보기도 한다.
가뜩이나 1차대전에서 떡실신당하고 그 뒤를 이은 충공깽 인플레이션에, 미국발 세계 경제 대공황까지 독일은 그야말로 회생하기 힘들어 보이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물론 많은 음악가들도 일자리를 잃거나 쥐꼬리만한 봉급으로 연명하고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여흥음악으로 흡수된 이들도 많았다.
이들은 독일 대중음악의 근간이 되어 있던 전음계적이고 소박한 선율을 유지하면서도 재즈나 블루스의 어법을 도입해 신선한 느낌을 주었고, 아르헨티나에서 유래하고 유럽 등지에서 현지화된 컨티넨털 탱고나 폭스트롯 같은 외래 춤곡의 리듬도 도입해 이국 정취를 모방하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음악들은 나오는 즉시 소비되고 빨리 잊혀지는 식으로 끊임없이 돌고 돌았고, 나중에 흐름을 타고 리바이벌 되는 식으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20세기 초중반의 많은 독일 대중음악 작곡가들도 이러한 수요에 맞추어 많은 가요들과 오페레타, 레뷰를 작곡했고, 나치 시대에도 괴벨스의 정책에 따라 오히려 장려되기까지 했다. 대중들이 극장이나 영화관, 라디오에서나마 매혹적인 선율과 흥겨운 리듬에 취해 전쟁의 현실을 잊게 만들자는 정책 덕이었고, 이는 총력전 계획 등으로 많은 극장들이 폐쇄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활동한 작곡가들 중 발터 콜로(Walter Kollo, 1878-1940)와 빌리 콜로(Willi Kollo, 1904-1988)라는 인물들이 있었다. 성씨와 생몰년도에서 알 수 있듯이 발터가 아버지, 빌리가 아들이었고. 발터는 '마리에타(Marietta)' 나 '세 개의 낡은 상자(Drei alte Schachteln)' 같은 오페레타로 생전에 나름대로 이름을 날린 바 있었고, 빌리는 전후 사양길에 접어든 오페레타 대신 영화음악이나 레뷰 등의 영역에서 활동한 인물이었다.
(↑ 위는 발터, 아래는 빌리 콜로.)
물론 이들의 음악도 1960년대를 전후해 미국식 팝송이나 록, 재즈 등의 강세 속에 마치 한국의 트로트 마냥 한물 간 노래 취급을 받기는 하지만, 독일 어르신들도 마찬가지로 이런 노래에 진한 향수를 느끼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으면야 이런 곡이 아직도 녹음되어 나올 리가 없을 테니.
발터의 손자이자 빌리의 아들은 바그너 등의 묵직한 독일 오페라들에서 주인공을 맡는 소위 '헬덴테너(Heldentenor. 직역하면 영웅적 테너)' 로 유명한 르네 콜로(René Kollo, 1937-)인데, 사실 이 성악가는 음악계에 전혀 다른 방법으로 들어갔었다. 독학으로 드럼을 익혀 재즈 밴드에서 연주하거나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비롯한 작곡가들의 가요를 부르며 경력을 시작했는데, 첫 음반도 유행가만 들어간 앨범이었다.
그러다가 엘자 파레나라는 성악 교사를 만나면서 인생이 바뀌기 시작했고, 1965년에 오페라 가수로 데뷰한 이래로 독일 뿐 아니라 세계 유수의 오페라극장과 관현악단 협연 무대를 석권하는 거물급 성악가로 거듭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초짜 시절 보여준 대중적인 끼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고, 50대가 지난 뒤에는 체력과 정신력 소모가 많은 오페라 무대 출연 횟수를 조금씩 줄이면서 다시 그 분야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러한 영역 전환은 콜로만 한 것은 아니었고, 그보다 더 전 세대였던 라우리츠 멜히오르 같은 바그네리안 테너들도 비슷하게 가벼운 대중음악 쪽으로 전환해 활동 후기를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소위 '쓰리 테너' 들의 최근 활동을 봐도 이제는 이런 활동이 충분한 상업적 성공을 거두고 있으니, 결과물이 캐병진이 아니라면야 특별히 깔 필요도 없겠지만.
르네 콜로는 1991~92년 동안 베를린의 RIAS(Radio in American Sector. 독일판 AFKN)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짬날 때마다 이런저런 가벼운 노래들을 녹음했는데, 바로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곡들이었다. 거기에 르네 콜로 자신이 작곡한 노래도 몇 곡 끼워 넣었고, 1992년에 이것들을 55분 분량의 앨범으로 추려서 독일 EMI 지사인 EMI 엘렉트롤라에 발매했다.
ⓟ 1992 EMI Electrola GmbH
발터의 곡이 여덟 곡, 빌리의 곡이 여섯 곡, 그리고 르네 자신의 곡 두 곡 해서 총 열여섯 곡들이 들어 있고, 오페레타와 레뷰, 영화음악의 노래들 뿐 아니라 가요도 비슷한 비율로 섞어놓고 있다. 반주는 한스 게오르크 아를트 현악 앙상블(Streichergruppe Hans Georg Arlt)과 재즈 빅밴드인 RIAS 댄스 오케스트라(RIAS-Tanzorchester. 현 RIAS 빅밴드)가 호르스트 얀코프스키(Horst Jankowski)의 지휘로 맡았다.
발터와 빌리가 활동할 당시에는 그냥 가요 뿐 아니라 오페레타 같은 음악극에서도 작곡자 자신이 관현악 편곡까지 맡는 경우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이 앨범에서도 지휘자인 얀코프스키 뿐 아니라 헬무트 브란트와 마르틴 호프만, 베르너 빈틀러, 볼프강 푀르스터 같은 편곡자들이 빅밴드에 스트링과 코러스를 더한 가벼운 기악 편성을 동반하는 식으로 편곡했다. 다만 편곡 스타일은 20세기 중반 스타일 보다는 좀 '덜 느끼한' 현대적인 음향을 빚어내고 있고.
비록 한창 잘 나가던 전성기를 지난 시기의 녹음이라고는 해도, 예전부터 갖고 있던 이쪽 감각과 클래식 테너로서의 기량이 뒷받침하고 있는 만큼 노래는 굉장히 안정적이다. 심지어 곡의 분위기에 따라 음색을 거의 로시니 스타일의 테너 부포에서 바리톤 스타일의 약간 어둡고 무거운 소리까지 꽤 자유자재로 조절하기도 한다.
다만 곡 자체가 갖고 있는 밍숭맹숭함이 드러나는 대목도 있는데, 재즈풍이기도 하면서 충분히 재지한 느낌이 들지 않아 좀 애매한 반주 위에서 독일 민요의 전형적인 천연덕스러움이 묻어나는 곡들의 경우에는 약간 이질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아마 발터와 빌리 콜로가 아예 미국 음악 어법으로 좀 더 깊이 경도한 쿠르트 바일 같은 작곡가들보다는 보수적이었던 듯 하다.
속지에는 한 페이지 반 분량의 짤막한 해설이 글쓴이 이름도 없이 독일어와 영어로 인쇄된 것이 고작이고, 가사가 하나도 없는 것이 아쉽다. 물론 이 앨범이 독일 로컬반을 염두에 두고 나온 것이라, 노래를 듣고 거의 100% 이해할 수 있는 독일인들을 위한 것이니 오히려 가사를 싣는게 사족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편곡이 현대적으로 윤색된 탓에 오리지널이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세계적인 테너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과연 무슨 음악을 썼는지, 그리고 20세기 초중반 독일의 대중음악은 어땠는지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는 한번 정도 들어볼 만한 앨범으로 생각된다. 다만 이 앨범은 독일 내에서도 중고반이 그것도 비싼 가격에 판매되고 있어서 구하기는 힘든 편이겠고.
나는 지난 12월 서코 끝나고 들른 회현동 지하상가의 어느 이름모를 중고CD 매장에서 몇 달이 지나도록 안팔리고 있는 걸로 구할 수 있었다. 물론 저 앨범에 대한 상세한 정보도 없었고, 그저 르네 콜로라는 이름이 눈에 띄었고 오페라 아리아집 같은게 아닌 뭔가 특이한 컨셉이었다는 것에 가볍게 호기심을 갖고 있었을 뿐이었지만.
지하상가 말고도 근처의 '부루의 뜨락' 에서는 중고가 아닌 신품 하나를 또 질렀는데, 이것도 꽤 주절댈게 있어서 아마 다음 번에 쓰게 될 것 같다. 다만 어느 쪽이든 요즘 음반가게들의 분위기는 좀 가라앉은 듯 하고, 디지털 다운로드가 활성화될 수록 나처럼 '부피 많이 차지하는' 음반을 사러 발품을 팔 사람도 더 줄어들 것 같다. 물론 어느 쪽이 옳고 그르냐는 판단할 수 없겠지만, 다운로드로도 구하기 힘든 것들을 사냥하는 이의 재미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아쉬운 대목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