턱없이 오랜 시간 동안 끌어오던 경춘선 복선전철 공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 전구간 개통된 것이 12월 21일이었다. 이래저래 미뤄진 유학 계획이 그 동안 기다렸던 전철 노선들을 탈 수 있게 하는데 간접적으로 일조한 셈이었는데, 다만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진짜로 타본 것은 30일에나 가서였다.
마침 급행열차가 들어와서 춘천역까지는 비교적 빠른 시간에 이동할 수 있었다. 원체 구부정했던 기존선 대부분을 포기하고 터널을 이곳저곳 뚫어서 가능한한 곡선 구간을 많이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가속력에 있어서 디젤기관차보다 월등한 전동차가 운행하니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하도 터널을 많이 지나고 그 길이도 대개 1km 이상 될 정도로 길어서, 터널 안팎의 기압 차이 때문에 귀가 막히는 일이 자주 있었고.
춘천역 전경. 사실 역 밖의 교통은 남춘천역 쪽이 더 좋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전구간을 타보는 의미가 없었으니 종착역까지 가서 내렸다.
역 구내에 붙어있던 시내버스 안내도에 따라 1번 출구 바로 앞의 찻길 건너편에 있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목적지로 가는 버스는 12-1번이었는데, 미리 춘천시 홈페이지에서 조사해본 결과 배차 간격이 평균 30분으로 꽤 긴 편이었다. 이 때문인지 소양댐 쪽으로 싸게 태워준다며 호객 행위를 하던 택시들이 많이 있었지만, 어차피 돈도 많지 않고 해서 깔끔하게 거절했다.
운이 좋았는지,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 버스를 탈 수 있었다. 하지만 경춘선 전철 개통과 관련해 노선 조정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뭔지는 몰라도, 춘천 토박이들조차 왜 엉뚱한 방향으로 가냐고 버스 기사들과 고성을 주고받으며 실랑이를 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중의 이야기지만, 나조차도 이 곳 버스와 관련해 정말 제대로 데였고.
시내를 벗어나 시골 풍경이 눈에 띄는 외곽에 있는 천전3리 정류장에서 내렸다. 주변에는 집 몇 채와 작은 텃밭, 철물점 정도가 전부였는데, 내려서 버스가 가는 방향으로 몇 발짝을 걸으니 목적지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예전에는 다소 허름한 길가의 단층 건물을 쓰고 있었다지만, 장사가 꽤 잘되었는지 좀 더 바깥쪽에 새롭게 개량한옥 식의 건물을 지어놓고 영업하고 있었다.
가게 안의 블라인드에 인쇄되어 있는 예전 가게의 사진. 물론 여기가 정말 막국수의 원조인지는 모르겠고, 실제로 원조 어쩌고 하는 문구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막국수의 지존' 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극찬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면 사람이 많이 몰리는 이유를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을 듯 하다.
건물을 개축하면서 식사 공간이 대폭 넓어진 것 같은데, 단체 손님을 위한 별도의 공간들은 물론이고 현관 왼쪽에 깔끔하게 남녀화장실까지 만들어 놓았다.
벽에 붙은 메뉴판. 서울 분점보다는 대체로 싼 편이었는데, 물론 편육이나 다른 안줏거리를 호기있게 주문할 만큼의 뱃심은 없었고 애초에 막국수가 목적이었던 만큼 곱배기 한 그릇(7500\)을 시켰다.
일단 주문하고 나서 상에 깔린 것들. 다만 뭔가 하나 빠져 있다.
이렇게 누런 주전자가 등장해야 막국수의 기본 상차림이 갖춰진다. 서울 분점에서처럼 왼쪽 주전자에는 동치미 육수가, 오른쪽 주전자에는 메밀국수 삶은 뜨거운 물(면수)이 들어 있다.
쌀쌀한 겨울인 만큼, 뜨겁고 구수한 면수가 꽤 잘 어울렸다. 그 외에는 겨자 종지와 배추김치 그릇 정도가 같이 나오는데, 그나마 손댄 것은 김치 뿐이었다. 사실 내 입맛에는 반찬이고 뭐고 특별히 추가할 필요를 느낄 수 없었다. 그래도 각양각색의 손님들이 자기 취향에 맞춰 먹을 수 있도록 식탁마다 설탕과 간장, 식초, 고춧가루통이 비치되어 있었다.
주문한 막국수 곱배기. 양과 모양새는 서울 분점과 별 차이가 없었지만, 분점과 달리 여기서는 얇게 썬 무김치는 없었다. 그냥 메밀국수와 양념장, 거칠게 빻은 깨, 잘게 부순 김, 삶은달걀 반 쪽이라는 매우 단순한 구성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실망할 이유는 없었고.
마찬가지로 일단 사리와 양념장을 잘 비벼섞다가 동치미 육수를 자박하게 부어서 먹었다. 그리 민감한 미각은 아니어서인지, 분점과 맛의 차이를 느끼지는 못했다. 그 만큼 화려하지는 않아도 충분히 맛깔스러운 한 그릇이었고. 양념장과 국수, 동치미 육수만으로 쓴맛을 제외한 모든 맛이 굉장히 조화롭게 뽑혀나오는 막국수는 찾아보기 힘들다니 더더욱 그렇다.
물론 이번에도 깔끔하게 비웠다. 면수로 국수 그릇을 헹궈 입가심하고, 음식값을 지불한 뒤 화장실을 잠깐 이용하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 남은 것은 집에 가는 일 뿐. 하지만 이 마지막 미션이 이 날 가장 힘들고 혹독했다.
정류장에 붙은 노선도. 이들 중 남춘천역 혹은 춘천역으로 가는 노선은 11번과 12-1번 둘 뿐이었다. 게다가 둘 다 배차간격이 깡패인 것은 마찬가지였고. 그 정도야 예상은 했지만, 내가 놓친 중요한 변수 하나가 있었다. 여기가 바로 어느 시즌에든 관광객으로 득실대는 소양댐 근처라는 점.
저 두 노선 버스는 내 앞을 두세 번 지나갔지만, 모두 완전히 콩나물 시루가 되어 있어서 기사가 손님 더 못태운다고 손을 휘휘 저으며 유유히 사라져갔다. 이미 기점인 소양댐에서부터 관광객들이 엄청나게 탔다는 건데, 택시까지도 손님 너댓 명을 꽉꽉 채우고 지나가고 있어서 잡아탈 수가 없었다.
가뜩이나 배차간격 긴 버스가 세 대나 이런 식으로 지나가 버리니 빡쳐서 돌아버릴 지경이었는데, 그나마 11번 버스 한 대가 몇 명 더 탈 만한 자리가 있었는지 정류장에 멈춰서는걸 재빨리 잡아탈 수 있었다. 추위에 떨며 정류장에서 기다린지 무려 1시간 40분(!!!) 만의 일이었다. 교통편 좋은 서울에서 살다 보니 이 쪽 대중교통 사정은 도무지 알 길이 없었지만, 이 기회를 통해 아주 뼈저리게 체험할 수 있었다.
복선전철 개통 후 춘천시 측의 대응이 매우 굼뜨다는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개통 후 부쩍 늘어난 관광객들의 수요를 충당할 만한 대중교통 정책이 아직 세워지지 않았다는 것은 관광 수입이 시의 소득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곳에서는 꽤 심각한 문제다. 하다못해 이렇게 사람 꽉꽉 채워가는 노선이라면 일시적이나마 증차나 배차 간격 단축 같은 계획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는 것 같고. 애써 잡아탄 버스 내에서도 외지인이나 현지인이나 이구동성으로 '춘천 버스는 참 불편하다' 는 푸념을 늘어놓고 있었다.
춘천농협 정류장에 내려 옛 미군기지 자리를 가로지른 도로를 걸어 춘천역에 도착하니 이미 하늘은 어두워져 있었다. 그나마 서울로 가는 완행열차에는 사람이 매우 적어서 편하게 앉은 채로 올 수 있었지만, 버스 잡아타느라 진이 확 빠진 상태여서 오히려 맛있게 먹은 막국수마저 감흥이 없을 정도였다. 버스 노선이고 택시고 계속 이런 상태라면, 아무리 땡긴다고 해도 자가용 끌고가지 않는 한 도무지 다시 올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다. 서울 사람이면 그냥 차비 같은거 다 따져 봐도 그냥 분점에서 먹는게 속이 편해 보일 정도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