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이런저런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 1918-1990) 만큼 미국 음악계에 영향을 미친 클래식 음악인을 꼽으라면 아마 비견할 만한 인물을 찾기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지휘에, 작곡에, 피아니스트에, 음악교육에, 음악저술에, 그리고 민권운동까지 한 몸이 모자랄 것 같은 다망한 활동으로 미국 뿐 아니라 전세계의 음악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으니 말이다.
하지만 번스타인의 이력 중 민권운동 등 소위 '정치적' 혹은 '사회참여적' 활동에 대해서는 이상하게 집중적으로 파고든 평전이나 기타 저서, 논문을 찾아보기 힘든 편이었다. 기껏해야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에서 가벼운 뮤지컬 터치 속에 담아놓은 미국 사회의 병폐를 지적하는 문집들이 좀 유명하다면 유명할까.
헌데 이런 문제는 비단 해외 뿐 아니라 미국 국내에서도 접근하기 녹록치 않은 문제였던 것 같다. 199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미국 정보공개법에 따라 번스타인을 사찰해온 FBI의 문건이 공개되었다고 하는데, 공개되고 나서도 이 문서를 통해 번스타인의 정치적 발자취를 따라가본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나마 이번에 싸갈길 이 뻘글의 주제인, 배리 셀즈(Barry Seldes)라는 미국 정치학자의 번스타인 평전이 그 쪽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어서 눈길을 끌었다.
ⓒ 2010 Simsan Publishing Co.
셀즈는 책의 서문에서부터 1950년대 후반 링컨 센터의 기공식에서 번스타인과 아이젠하워 대통령 간에 미묘하게 불편했던 분위기를 다루고 있고, 동시에 비정치적 혹은 탈정치적으로 번스타인에 접근하려 했던 다른 전기 작가들의 평전을 '까고'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이 FBI가 수집한 방대한 번스타인 뒷조사 문건을 입수한 경로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이 평전이 정치적 인간이자 미국 음악에 큰 기여를 하려 했던 작곡가 번스타인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룰 것이라고 못박고 있다.
특히 번스타인의 활동 초기였던 1930년대 후반부터 정상의 자리에 선 1960년대 초반까지는 FBI 파일을 매우 자주 인용하고 있는데, 이렇게 해서 번스타인이 그 당시 미국을 휩쓴 극단적 반공주의인 '매카시즘' 의 광풍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던 인물임을 확실히 하고 있다.
물론 번스타인은 정치적 운동 외에도 이런저런 뮤지컬이나 교향곡을 비롯한 작품들과 지휘 활동으로 광범위하게 재능을 인정받고 있었기에 지지해주는 명사들도 많았지만, 그 역시 자신의 활동이 그저 젊은 날의 과오일 뿐이었고 자신의 미국에 대한 충정은 변함이 없다는 내용의 '전향서' 를 쓰고서야 뉴욕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로 비로소 부임할 수 있었다는 내막을 밝히고 있다.
사실 번스타인과 매카시즘 사이의 대립은 비미활동위원회를 통해 심하게 굴욕을 당했던 다른 인사들보다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부분이 적어서 부각되지 않았다지만, FBI나 여타 국가의 후원을 받던 반공 단체들이 애초부터 그저 재미삼아 번스타인을 친소 공산주의자로 낙인찍어 온갖 잡다한 일상사를 체크했던 것도 물론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셀즈는 FBI 뿐 아니라 미국 방송과 언론계의 실권자들이 소위 '빨갱이 목록' 을 자체적으로 작성해 예술가들의 활동을 통제하려 했다는 사실도 덧붙이고 있다.
뉴욕 필 부임 후 FBI의 번스타인 뒷조사는 그럭저럭 잠잠해졌고, 번스타인도 일단 겉으로는 '비정치적인' 음악인으로서 자신의 경로를 수정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생전에 친분이 있던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면서 미국의 민권 운동이 다시금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번스타인도 여기에 동참하게 되었다. 하지만 케네디의 암살과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미국 사회는 다시 보수우경화 되었고, 번스타인은 린든 존슨의 대내외 정책을 비판하며 셀마 대행진 같은 정치적 시위에 동참하는 등 다시금 '투사' 기질을 보이기 시작했다.
셀즈는 이렇게 미국 사회의 정치적 변혁과 번스타인의 활동을 병치하는 한편, 이러한 변혁이 번스타인의 작곡이나 지휘 활동에도 분명한 영향을 주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베트남전 시기 미국의 제국주의 스타일 정책과 인종차별 등을 비판하는 내용의 오페라 혹은 뮤지컬의 제작에 발빠르게 착수하고, 또 같은 유대인이기도 했던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을 해석하는 시각이 점차 정치적인 쪽으로 선회한 것도 당대 사회상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말이다.
하지만 번스타인이 추구한 정치와 음악의 결합은 1970년대 초반 이후로 크게 후퇴했다는 것도 지적한다. 베트남 전쟁은 미군의 철수와 북베트남의 베트남 통일로 일단락 되었지만, 동시에 미국 사회에 허무주의와 진보에 대한 기대의 상실이라는 격심한 후폭풍을 안겨주었고 이것이 번스타인의 창작열을 급짜식하게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물론 그 후로도 번스타인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수시로 내비쳤고, 평범한 미국인을 그리면서도 맹목적인 애국주의를 비판하는 '노래의 축제' 같은 작품이나 음악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구체적으로 정리하려고 했던 '노튼 강연', 이스라엘의 유대인 정착촌 확산 정책이나 핵무장과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분명한 반대 표명 등이 계속되었다.
셀즈는 일단 번스타인이 타계하기 직전이었던 1990년 가을까지를 이런 식으로 집필한 뒤, 에필로그로 번스타인의 초기부터 후기까지의 생애 동안 미국이 변화해온 자취를 요약해 정리한다. 동시에 번스타인의 작품에 대해 기존의 음악비평가나 학자들이 갖고 있었던 '순음악적' 평가나 재능을 쓸데없이 썩혔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역관광을 가한다. 물론 이 관점 역시 번스타인의 창작력은 미국 사회의 격변에 크게 좌우되었고, 그 과정에서 '미국적인 음악극' 이라는 생애 최대의 작업이 청중을 잃고 미완의 상태로 남아버렸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책은 번스타인이 무조건 옳았고, 미국 정부는 대체로 사악했다는 식의 관점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노튼 강연 대목만 해도, 현대음악 애호가들은 이제 조성과 무조성 사이의 결전이라는 주제에서 몇 발짝 더 나가고 있는 현대음악에 대한 논쟁 속에서 번스타인이 꽤나 케케묵은 보수적 관점을 갖고 있었다며 실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아이젠하워나 케네디, 존슨 정권도 나름대로 미국 발전에 기여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이 정권들이 예술계에 가했던 이런저런 책략이나 억압 정책이 강조되고 있어서 좀 불편할 수도 있겠고.
하지만 번스타인이 어느 당대 음악인 이상으로 사회와 음악 사이의 관계에 대해 고심했고, 또 자신만의 해법을 찾기 위해 동료 음악인이나 예술인들 뿐 아니라 사회 전반과 소통하려 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는게 이 책의 집필 의도로 여겨졌다. 다만 번스타인의 지휘 활동이나 사생활 전반을 알고 싶은 이들에게는 다소 불충분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고.
번역은 대체로 말끔한 편이다. 정치학 교수가 저술한 책을 정치학 박사가 번역한 탓에 오역 가능성도 많지 않은데, 다만 음악 쪽에 있어서는 좀 이상한 대목이 종종 눈에 띈다. 독일에서 망명해온 작곡가 쿠르트 바일을 쿠르트 베일로 써넣었다던가, 스트라빈스키의 '병사의 이야기' 를 '전쟁의 역사' 라고 번역한 것들 말이다. 특히 후자는 프랑스어의 Histoire를 비슷한 모양새의 영어 단어인 History로 명백하게 오역한 사례라, 좀 더 깔끔한 번역이 아쉬워지는 대목이었다.
물론 이 책 자체가 갖는 상징성이나 중요성에 비하면 크게 문제삼을 만한 대목은 아니다. 1970년대 후반에 번스타인이 뉴욕 필을 이끌고 처음으로 내한 공연을 했을 때 공산권 작곡가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어 있었던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을 왜 기를 쓰고 공연하려고 했고, 또 그것을 관철시켰는지에 대한 의문이 이 책을 읽음으로써 어느 정도 해소되기도 했다. 그리고 좀 많이 요약되기는 했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미국 사회의 변화 양상도 어느 정도 읽어낼 수 있었던 부수적인 수확도 있었고.
다만 음악가의 생애를 아직 순음악적인 것에 국한하는 시각으로 보는 이들에게는 다소 읽기 힘든 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이거 인문사회 서가에 있어야 되는데 왜 예술 서가에 있지?' 라고 순진하게(?) 의문을 제기할 이들도 있겠고. 하지만 자신이 비정치적이라고 주장하는 예술가들마저도 사회의 흐름 속에서 본의 아니게, 혹은 자진해서 이런저런 사회 활동에 참여하는 세상이다.
게다가 번스타인같이 예술과 사회 활동을 동일시 혹은 같이 가는 동반자 관계로 여긴 음악인들이라면, 다소 고통스럽고 껄끄러운 과정이더라도 이러한 관점의 연구나 평전 집필이 있어야 좀 더 그 사람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