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다, 많다, 위생은 좀 안좋다, 허름하다. 시장통 음식점에 대한 일반적인 관점들이다. 물론 올 2월 들어 포스팅 제목대로 학원 끝나고 어중간한 시간대의 시장끼를 해결해주고 있는 곳도 그 관점들에 부합된다면 될 수 있겠고. 다만 개인적인 관점에서는 맛이나 가격 면을 다른 것보다 우위에 두고 있어서, 그 점에 딱이라는 가게라는 생각이다.
처음 가보게 된 때가 공교롭게도 솔로들에게는 최악의 날이라는 발렌타인 데이 4일 전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초콜릿이나 제과 재료 도매상으로 유명한 이 쪽에도 여학생부터 성인 여성에 이르는 수많은 여자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줄 사람도 받을 기회도 없는 이상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목적지 찾는 데만 주력했다.
청계천길을 타고 가면 찾기는 어렵지 않은데, 동대문 방향으로 걷다가 청계5가 사거리 직전에 나오는 오른편의 시장 골목에서 꺾어서 좀 걷다 보면 바로 왼쪽에 보이는 가게였다. 시장으로 통하는 문은 여러 개지만 번호 매겨져 있지 않아 좀 헤맬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새로 도입되고 있는 도로명 이정표에 따르면 '방산길' 이라고 표시된 길로 들어가면 된다.
이렇게 가게 이름보다 짜장과 우동을 강조하고 있어서, 저 두 종류가 여기의 간판 메뉴로 여겨졌다. 이름이 분식집이라서, 초콜릿 재료 쇼핑을 끝내고 간단히 군것질하러 들어가려다가 문을 열어보고는 발걸음을 돌리는 여성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사실 가게 분위기 자체가 젊은 여성이 들어가 부담없이 먹기엔 좀 거시기할 수도 있을 테니.
문 옆에는 가게 안에도 붙어 있는 메뉴 현수막을 빙 둘러쳐 그 일부를 볼 수 있게 해놨다. 짜장과 우동이 보통 2300원, 곱배기 2500원이라는 매우 파격적인 가격이라 눈에 띄었고, 나도 저 두 메뉴를 맨 먼저 먹어봤다.
가게 내부 한 컷. 딱 봐도 좁고 허름해 보인다. 테이블도 독상으로 쓰이는 벽붙이 두 개와 4인용 아홉개 정도로 많지 않았다.
메뉴판 현수막 풀버전...은 아니고 귀퉁이가 좀 짤렸다. 육개장이나 만두국 빼면 대부분 중국집의 식사 메뉴들이라 여기가 사실상 중국집임을 알 수 있다. 가격대는 가게 앞에서 봤던 대로 보통 기준 2300~3300원 대라는 초저가를 자랑하고 있고.
손님들 대부분은 시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나 근처에서 사는 듯한 노인들 같이 주로 남자들이었고, 간혹 가다가 근처 가게들의 여종업원이나 마실 나오신 아주머니들이 눈에 띄는 정도였다. 메뉴판에는 없지만 소주도 팔고 있었고, 아예 안주 삼아 면 없이 짜장이나 짬뽕국물만 시켜서 술잔을 비우는 아저씨도 보였다.
가격에 혹해서 차례로 다 먹어볼까 하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몇 차례 드나들면서 기본적인 메뉴들에 약간씩 변형을 가한 정도라는 것을 알고는 그 '기본적인' 것들만 곱배기로 시켜서 먹어 보기로 했다. (이상하게 중국집만 오면 뭐든 곱배기로 시키는게 버릇이다...)
뭘 시키든 간에 앉으면 자동적으로 나오는 물잔과 깍두기, 단무지. 크게 특출날 만한 건 없다. 다만 여느 중국집이라면 기본으로 나오는 생양파와 춘장이 없는데, 이런 점에서 싼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아, 그리고 배달을 안하기 때문에도 인건비를 절약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수저통과 소금, 고춧가루, 간장, 식초. 제일 큰 하얀 병에 든게 식초인데, 까딱하면 물병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래서 병 주위에 식초병이라고 매직으로 써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찍혀 있지는 않지만, 테이블 벽 쪽마다 두루마리 휴지도 한 통씩 걸려 있고. 이제부터 음식 짤방 시작이다.
맨 처음 시켜본 우동. 계란 푼 국물에 양파와 당근, 양배추 등을 볶아 국수를 만 전형적인 중국집 스타일 우동이다. 다만 이 곳의 여느 면류와 마찬가지로 면발은 좀 가는 편이었고, 해물도 오징어가 전부라서 왜 이 가격대인지를 실감케 한다. 극히 단순한 외관이기는 했지만, 맛은 괜찮은 편이어서 다른 메뉴에 대한 기대치를 높여줬다.
두 번째 갔을 때 시킨 짜장면. 겉보기에는 일반 짜장면과 다를 바 없고, 실제로도 그랬다. 다만 다른 곳보다 캐러멜 색소나 설탕을 적게 쓰는지 춘장의 짭짤한 맛이 강한 편이었다. 그리고 가격대가 가격대인 지라 고기 건더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다만 달달한 짜장면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몰라도 오히려 내 입맛에는 더 잘 맞았다.
세 번째 갔을 때는 짬뽕을 시켜봤다. 사실 중국집 짬뽕은 중국집 우동 육수에 고춧가루 풀어 매콤하게 만드는 거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여기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면발과 꾸미는 우동과 똑같았고. 꽤 벌겋게 보이는 국물임에도 생각만큼 많이 맵지는 않았지만, 고춧가루가 꽤 많은 편이라 사레 들리면 좀 고생할 법했고.
네 번째로 방문했을 때는 정말 오랜만에 간짜장을 시켜봤다. 일반 중국집에서 간짜장을 안시키는 이유는 면 위에 채친 오이를 얹어주는 '정성' 때문인데, 여기서는 내가 본 바로는 오이 그런거 없어서 과감하게 시켜볼 수 있었다.
생각할 필요 없이 바로 짜장을 면 위에 붓고 신나게 비벼먹었다. 다른 간짜장보다는 좀 물기가 있는 편이었고, 양파와 양배추가 주된 구성인 야채는 아삭하게 살짝 볶아져 나왔다. 어느 정도는 짜파게티 종류를 생각나게 하는 맛이었는데, 크게 나쁠 것은 없었지만 개인적인 입맛으로는 그냥 짜장이 더 나아 보였다.
사실 개인적으로 중국집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짜장면이나 짬뽕이 아닌 볶음밥이다. 국수 보다는 밥이 좀 더 든든하다는 이유 때문인데, 여기도 있길래 다섯 번째 방문했을 때 시켜봤다. 물론 저가인 탓에 딱 봐도 겉모양은 꽤 심심하다. 밥에 잘게 썬 당근과 줄알친 달걀, 그리고 곁들임 짜장이 전부다. 다만 같은 곱배기라도 면류 보다 양이 더 많은 편이었다.
딸려나오는 국물은 짬뽕 국물이 아닌 계란 풀고 송송 썬 파 넣은 우동 국물이었다. 다만 그 이후로 몇 차례 더 갔을 때 다른 사람들 식탁을 보니 짬뽕 국물이 나오는 때도 있어서, 어느게 나올 지는 랜덤인 것 같다. 볶음밥 양에 있어서는 꽤 만족스러웠고, 단순한 모양새 그대로의 소박한 맛도 썩 괜찮은 편이었다. 다만 볶음밥 자체가 비교적 짭짤했기 때문에, 짜장이랑 같이 비벼먹으면 심심하게 먹는 사람에게는 좀 짜게 느껴질 수 있을 듯.
좀 특이해 보여서 여섯 번 째 갔을 때 시켜본 볶음국수. 삶은 국수를 잘게 썬 양배추와 당근, 양파 같은 채소들과 함께 맵게 볶아낸 요리였다. 게다가 짬뽕과 달리 국물도 없고 쉽게 식지도 않아서, 뜨거운 열기까지 더해지니 오히려 두 배는 맵게 느껴졌다. 후후 불면서 싹싹 비웠지만, 뜨겁고 매운걸 빈속에 채워넣어 그랬는지 결국 설사크리로 끝났지만. lllorz 그래도 맛은 나쁘지 않아서, 나중에 배에 기름칠해서 안전보장한 다음에 또 먹어보고 싶기도 하다.
일곱 번째 갔을 때는 왠지 만두가 먹어보고 싶어져서, 짜장면 보통 하나랑 군만두(야끼만두) 보통 하나로 시켜먹었다. 물론 가격대가 가격대인 만큼, 직접 만든건 아니었고 사다 쓰는 것이었다. 맛도 흔히 볼 수 있는 군만두맛. 다만 갓 튀겨낸 것을 먹느라 뜨거워서 혼났다. 곁들임 간장은 즉석에서 만든 것을 내주는 것 같았는데, 간장에 식초와 후추, 깨를 섞어서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이 집의 '기본적인' 메뉴는 거의 다 먹어본 셈이 됐는데, 물론 다른 것을 더 먹어보지는 않더라도 가격 대 성능비가 꽤 괜찮았던 만큼 계속 가고 싶은 곳이 되었다. 적어도 볶음밥과 짜장면, 우동 세 메뉴는 확실히 마음에 들었으니, 가끔 청요리가 땡기는데 주머니 사정이 별로라면 어렵잖게 찾을 수 있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