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주곡 하면 주로 현악기나 관악기, 건반악기 독주가 나오는 경우가 많아서, '타악기 협주곡' 이라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심지어 19세기에는 리스트의 화려하고 드라마틱한 피아노 협주곡을 마음에 안들어하던 비평가들이 '피아노 협주곡이 아니라 트라이앵글 협주곡' 이라고 저 개념을 비틀어서 사용했을 정도였으니.
하지만 숫자가 적고 대중적이지 않을 뿐이지, 타악기 독주를 위한 협주곡도 엄연히 존재한다. 이미 리스트 한참 이전에도 터키 등 중동 지역에서 들여온 팀파니를 사용한 협주곡들이나 협주풍 작품들이 존재했고, 지금도 연주하기 상당히 까다로운 레퍼토리로서 팀파니스트들의 도전 과제가 되어 있다.
바로크~고전 시대의 팀파니 협주곡이 좀처럼 연주되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개량을 거쳐 대형화된 현대 팀파니로는 한 사람이 연주하기가 벅찬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이유가 가장 큰 것 같다. 통상 네 대를 한 세트로 하고 더 많아봤자 여섯 대 정도가 최대 스펙인 현재의 대세로 어떻게 여덟 대(!!!)나 되는 팀파니를 혼자 연주하라는 말인가.
이 때문에 저 시대의 팀파니 협주곡은 돈이 꽤 나가더라도 당대의 악기를 복원해 연주하거나, 아니면 주자 두 사람이 듀엣으로 연주하는게 보통이다. 이렇게 북이 많아진 이유는 연주 중에 음정을 바꾸기가 힘들었기 때문인데, 손으로 스크류나 핸들을 돌려서 북면을 조이고 풀어야 하기 때문에 양손에 채를 쥐고 치는 주자로서는 음을 빨리 바꾸기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손으로 조율하는 악기에서 20세기 중반 무렵 등장한 '페달 팀파니' 로 혁신적인 개량이 이뤄진 덕에, 팀파니 협주곡이라는 장르의 가능성이 다시금 탐구되기 시작했다. 이 팀파니는 손 대신 발로 북 밑의 페달을 밟아 신속하게 음정을 조절할 수 있고, 심지어 손으로 치고 있는 도중에도 음정을 끌어올리거나 내릴 수도 있게 되어 있다.
이 때문에 과거의 연주법과 악기를 리바이벌하는 정격연주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같은 극히 보수적인 악단이 아니라면, 절대 다수의 관현악단과 취주악단에서는 페달 팀파니를 갖춰놓고 있다. 물론 합주단 단원이 아닌 독주자라도 마찬가지고.
20세기 들어 팀파니 독주 아니면 다른 타악기들과 같이 갖춰놓고 독주하는 협주곡들은, 그 동안 솔로 연주의 기회를 갖기가 여의치 않았던 많은 타악 전공자들의 애호를 받게 되었다. 이번에 구입한 앨범은 스크류/핸들 팀파니 시절의 것과 페달 팀파니로 옮겨간 현대의 협주곡 혹은 협주풍 작품을 나란히 수록하고 있어서 눈길을 끌었다.
ⓟ 1986 Koch-Records GmbH
생몰년도와 이력도 불확실하고 단지 이름과 몇 편의 작품만이 남아 있는 장 밥티스트 프랭(Jean Baptiste Prin, 17세기 중반-1742 이후)의 팀파니, 트럼펫과 오르간을 위한 모음곡 '프시케의 메아리(L'echo de Psyche)가 첫 곡으로 들어 있는데, 엄연히 3중주라는 실내악 편성이지만 한 악기가 관현악 역할을 하고도 남는 오르간의 빠방한 소리가 팀파니와 트럼펫의 '군악풍' 성격과 어우러져 흔히 생각하는 '복잡화려한 바로크풍' 의 소리를 빚어내고 있다.
다만 트럼펫은 아무리 들어봐도 두 대를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음반에 기록되어 있는 트럼페터는 기 투브롱(Guy Touvron) 한 사람 뿐이다. 다른 트럼페터도 있었는데 누락되었던가, 아니면 투브롱이 2중으로 사후 녹음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오르간 연주는 볼프강 카리우스(Wolfgang Karius)가 맡았다고 되어 있으며, 이 곡만 1979년 뒤셀도르프에서 녹음되었다고 기재되어 있다.
두 번째 곡은 고전 시대 작품인 요한 빌헬름 헤르텔(Johann Wilhelm Hertel, 1727-1789)의 팀파니 협주곡인데, 위에 쓴 것처럼 스크류 팀파니 시절의 곡이라 무려 8대의 북을 요하는 곡이다. 낮은 솔(G)에서 높은 솔까지 한 옥타브의 전음계 음정을 모두 커버하도록 작곡되었는데, 이 녹음에서는 가장 낮은 북을 독주자의 맨 왼쪽에, 가장 높은 북을 맨 오른쪽에 가게 죽 늘어놓고 쳤다고 속지에 도표까지 그려져 있다.
하지만 구식 팀파니를 복원해 연주했다는 설명은 없고 실제 소리도 현대 팀파니라서, 아마 두 사람의 주자가 각각 네 대씩의 북을 나눠 연주했을 거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여기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없어서 아쉬운데, 이 곡 뿐 아니라 모든 곡에서 누가 언제 연주했는지에 대한 정보 자체가 없다. 딱 한 곡 빼고.
세 번째 수록곡은 아예 작곡가 조차 불명인 2악장 짜리 작품인데, 헤르텔 협주곡과 마찬가지로 옥타브 온음을 모두 커버하는 8대의 팀파니에 다섯 대의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가세하는 이색적인 편성의 곡이다. 단지 1800년대 쯤 쓰여졌다는 추측만 있는데, 이 곡도 내 추측이 맞다면 아마 두 사람의 팀파니스트가 동원되어 연주되었을 것이다.
마지막 곡은 내가 이 CD를 지르게 만든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는데, 1948년부터 1984년까지 무려 37년 동안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 팀파니스트를 역임한 베르너 테리헨(Werner Thärichen, 1921-2008)의 팀파니 협주곡이다. 음반이건 실연이던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지만, 내가 '팀파니 협주곡이라는 곡도 있구나' 라고 납득하게 만든 곡이라 기회가 되면 음반으로라도 들어보자고 벼르고 있었던 차였다.
중딩 시절 잠시 '객석' 을 사보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때 서울시향의 정기 공연에 관한 기사 중에서 당시 시향 수석 팀파니스트였던 최경환이 이 곡을 협연하던 리허설 사진이 실려 있었다. 다섯 대의 북을 악단 앞에 벌여놓고 연주하는 모습이 굉장히 신기했는데, 소리로 듣게 된 것은 10년도 더 지나서인 셈이었다.
물론 작곡 시기가 시기였던 만큼(1954), 당연히 페달 팀파니를 사용했고 이 악기만이 낼 수 있는 트레몰로 글리산도나 복잡한 음정 변화 외에 다양한 재질의 채를 사용한 음색 변화 등 팀파니스트들에게 꽤 까다로운 기교파 작품으로 여겨진다. 게다가 작곡자 자신이 능란한 타악기 주자였으니 더더욱 그렇겠고.
테리헨은 이 곡을 독주자로서 뿐 아니라 지휘자로서도 생애 동안 자주 공연했고, 여기서는 속지를 보면 독주자 역할로 나왔다고 되어 있다. 관현악단은 헤르텔과 작곡자 미상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영국 지휘자 버논 한들리(Vernon Handley) 지휘의 베를린 방송 교향악단(현 베를린 도이치 교향악단)이 맡았다고 되어 있다.
음반 속지와 앞뒤 커버에 기재된 또 한 사람의 팀파니스트는 니콜라스 바닥(Nicholas Bardach)인데, 캐나다 태생의 이 타악 주자는 벨기에와 독일에서 수학하고 독일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내 추측이 맞다면, 모든 수록곡에서 테리헨이 독주를 맡았고 헤르텔과 작자 미상의 두 곡에서 바닥이 제 2팀파니스트로 연주했을 것이다.
녹음은 시기상 모두 아날로그지만, 소리는 또렷하게 잘 잡혀 있다. 파이프오르간이 요구되는 곡이라 아마 교회 혹은 성당에서 녹음했을 프랭의 작품도 여음이 너무 심하지 않도록 적당하게 잔향 조절이 되어 있고, 1981년에 서베를린에서 RIAS 베를린의 스탭과 공동으로 제작한 나머지 세 곡도 팀파니와 관현악 혹은 나머지 기악 주자들 간의 음향 균형이 비교적 잘 맞춰져 있어서 시끄럽게 들리지 않는다.
이렇게 팀파니가 주역이 되는 곡들만 수록한 앨범은 정말 드문데, 낙소스에서 나온 또 하나의 앨범을 나중에 기회가 되면 사서 들어볼 생각이다. 해당 음반은 바로크에서 고전 시대 까지의 팀파니 협주곡 혹은 독주곡만 모아놓은 앨범인데, 독주자가 구식 팀파니를 가지고 혼자서 모든 독주 파트를 다 소화했다고 되어 있다. 이미 낙소스 뮤직라이브러리에 올라와 있기는 하지만, 어찌 됐던 CD를 사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 문제...lllor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