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시스테마의 수혜자들 중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은 의외로 많은 편이다. 더 말이 필요없는 구스타보 두다멜이 그 선두에 서겠고, 그 다음으로 많이 언급되는 인물이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창단 이래 최초의 라틴아메리카 출신 단원이자 최연소 입단 기록을 세운 콘트라베이시스트 에딕손 루이스(Edicson Ruiz)다.
루이스는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 변두리 출신으로, 많은 엘 시스테마 수혜자들과 마찬가지로 가정 형편이 영 좋지 않아 어릴 적부터 슈퍼마켓 알바 등 허드렛일을 하며 가계에 보태야 했다. 이런 와중에 열 살 때 이웃 주민들로부터 엘 시스테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입단했다고 하는데, 처음에는 비올라를 택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콘트라베이스로 악기를 바꿔 배우기 시작했다.
엘 시스테마에서 루이스는 여러 콘트라베이시스트 유망주를 키워낸 펠릭스 페티트에게 배웠고, 동시에 베를린 필의 수석 콘트라베이시스트였던 클라우스 슈톨 등에게도 강습을 받을 수 있었다. 루이스는 열다섯 살 때 미국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열린 국제 콘트라베이스 콩쿨에서 우승했고, 2년 뒤에는 베를린 필의 콘트라베이시스트 모집 오디션에서 합격해 그야말로 베를린 필 역사의 일부분을 다시 썼다.
이 때문에 엘 시스테마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면 두다멜과 함께 거의 항상 등장하고 있는데, 자신의 지휘로 CD와 DVD를 내고 있는 두다멜과 달리 루이스는 관현악단 멤버가 주된 일이라 그런지 독주를 들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러던 차에 독일의 필.하르모니(Phil.harmonie)라는 음반사에서 루이스의 연주를 담은 음반이 갑툭튀해 꽤 놀랐고.
저 음반사는 전현직 베를린 필 단원들의 실내악 그룹이나 독주 음반을 전문적으로 내기 위해 설립되었다고 하는데, 아직 가짓수는 적지만 꽤 흥미로운 음반들을 연이어 내놓고 있다. 이 음반의 경우에도 좀처럼 듣기 쉽지 않은 콘트라베이스 협주곡들만을 담고 있어서, 굳이 루이스나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관현악단 연주에 수집벽이 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관심을 가질 만한 물건으로 여겨졌다.
CD에는 고전시대 작곡가들인 칼 디터스 폰 디터스도르프(Carl Ditters von Dittersdorf, 1739-1799)와 프란츠 안톤 호프마이스터(Franz Anton Hoffmeister, 1754-1812), 요한 밥티스트 판할(Johann Baptist Vanhal, 1739-1813)의 협주곡이 차례대로 담겨 있다. 디터스도르프와 호프마이스터의 곡들은 콘트라베이스의 직계 전신인 비올로네(violone)를 위한 곡이고, 판할의 곡 만이 콘트라베이스용으로 작곡된 협주곡이라고 되어 있다.
비올로네는 콘트라베이스보다는 좀 작은 몸집을 가진 저음 현악기인데, 르네상스에서 바로크에 이르는 동안 널리 애주되었던 비올(viol)족 현악기들 중 저음을 맡는 역할이었다. 현의 갯수는 악기에 따라 3현부터 6현까지 꽤 다양했는데, 이 중 4현악기가 관현악의 대형화와 더불어 개량된 것이 현재의 콘트라베이스다.
그래서인지 클라우스 슈톨이 작성한 음반 속지에는 콘트라베이스보다 비올로네에 관한 상세한 내용이 적혀 있는데, 루이스는 모든 곡을 현대 콘트라베이스로 연주하기는 했지만 조율은 당대 4현 비올로네 연주자 중 최후의 대가였던 요한 힌들(Johann Hindle)이 했던 방식을 따랐다고 되어 있다. 통상 콘트라베이스가 미(E)-라(A)-레(D)-솔(G)로 완전4도 간격씩 조율되는 데 비해, 힌들이 택한 조현법은 라(A)-레(D)-파#(F#)-라(A)라는 완전4도-장3도-단3도라는 꽤 불규칙한 방식이었다.
힌들 조현법을 따르면 악기 전체의 음역도 상당히 높아지는 셈이라, 당대 비올로네 곡들의 고음역을 현대 콘트라베이스로도 한결 쉽게 연주할 수 있어서 이런 방식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반주를 맡은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관현악단도 쳄발로 콘티누오를 더한 소규모로 편성해 음량이 작은 편인 콘트라베이스 솔로를 충실히 보필하고 있다.
지휘는 루이스와 마찬가지로 엘 시스테마에서 음악을 시작한 크리스티안 바스케스(Christian Vásquez)가 맡았는데, 두다멜을 위시한 여러 엘 시스테마 출신 지휘자들과 마찬가지로 연주자 출신이다. 아홉살에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고, 2001년부터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에게 지휘 강습을 받으면서 지휘자로 전직해 현재 프랑스와 노르웨이, 스웨덴, 영국, 미국 등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고 되어 있다.
바스케스는 사실 올해(2011) 3~4월에 두다멜에 이어 카라카스 청소년 교향악단을 이끌고 두 번째로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었는데, 토호쿠 대지진 때문에 일본 공연이 모조리 취소되자 곁다리로 있던 한국과 중국 공연까지 모조리 취소되는 바람에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연주와 녹음은 모두 수준급인데, 특히 루이스의 기교파 연주가 충분히 발휘되어 있어서 독주 악기로는 별 인기가 없다는 콘트라베이스의 매력을 나름대로 효과적으로 감상할 수 있다. 다만 공교롭게도 모든 곡이 E플랫장조라는 기본 조성을 갖고 있어서 약간 지루하게 들리는 느낌도 없지 않고. 그 점만 접어둔다면, 한국에서 별도로 구입한 이호교+KNUA(한국예술종합학교) 심포니 오케스트라+정치용 콤비의 콘트라베이스 협주곡 CD+DVD와 함께 유니크 아이템으로 계속 남을 수 있을 듯 하다.
비교적 새로운 안칼라곤과 필.하르모니의 음반, 그리고 나온 지는 좀 됐지만 초야에 묻혀 있던(?) 뉴알비온의 음반 외에 도리안의 시몬 볼리바르 시리즈도 전 아홉 장의 구입에 모두 성공했는데, 그것에 관해서도 다음 편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