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식 덮밥인 돈부리는 내게 그리 생소한 음식은 아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홍대 근처의 멘야도쿄에서 그 맛을 들이기 시작했었고, 그 외에도 이런저런 장소와 기회 때마다 가끔씩 맛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리 자주는 아니었고.
그러다가 이제 독일행을 불과 2주 남짓 남겨두고, 집에서는 약간 먼 거리인 가산디지털단지역 근처에 특이한 가게 하나가 있다고 해서 맘잡고(?) 달려봤다.
일단 지도를 검색해 보니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 출구는 7호선 역사에 있는 5번 출구였다. 확실히 가깝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1호선 플랫폼에서 깊이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것도 딱히 시간을 절약하는 방법은 아니었다. 그래서 두 번째 갈 때부터는 그냥 1호선 역사의 7번 출구로 나와서 바로 연결된 우림라이온스밸리를 따라 이동하는 식으로 다녔다.
어쨌든 5번 출구를 나와서 U턴하자마자 이랜드 건물이 정면에 보이는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리고 독산역 방향으로 좀 걷다 보니 약간 움푹 들어간 모습의 빌딩이 눈에 띄었고, 가게 간판도 보였다. 빌딩 이름은 신한 이노플렉스였는데, 예전에는 세진 이노플렉스라는 명칭의 건물이었다. 네이뷁이나 당므 같은 곳의 지도에도 건물 이름이 없어서, 지은지 얼마 안된 것 같기도 했고.
편의점 오른쪽에 있던 문으로 들어가서 편의점과 중국요리집을 따라 곧장 몇 발짝 옮기다 보니 왼편에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둥그런 옆간판과 유리문에 뭔가 범상찮은(???)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온통 사무실과 공장 뿐인 이 다이나믹 로동 단지에서는 좀처럼 기대할 수 없는 사전 서비스(?????)였다.
통로쪽 유리벽에는 이렇게 이 집 간판 메뉴들과 신메뉴 소식, 요일별 한정 메뉴, 주류 목록 등을 붙여놓고 있다. 생각보다는 그렇게 비싼 편은 아니었는데, 다만 규동의 경우 정직하게 써넣은 미국산 우삼겹이라는 문구 덕에 패스하고 무난한 부타동 쪽으로 먹기로 했다.
유리문에는 이렇게 이 가게의 간판 캐릭터인 '돈부리 양' 의 그림이 붙어 있다. '감자동 8번지' 라는 4컷 웹툰 작가 나코파파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당신은 중증 오덕! 그림체인데, 찾아보니 정말 저 작가가 만든 캐릭터라고 한다.
돈부리 양은 가게 내부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었는데, 이렇게 돈부리 먹는 법을 그린 4컷 만화라던가,
화질은 시망이지만 메뉴판 오른쪽 귀퉁이에라던가,
가게 종업원들의 유니폼인 검정 티셔츠 뒷쪽에서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메뉴판에는 유리벽에 붙은 메뉴들 외에도 텐동(튀김덮밥)이나 우나기동(장어덮밥), 샤케동(연어덮밥), 마구로동(다랑어붉은살 덮밥), 카이센동(일본식 회덮밥), 심지어 낫토동까지 있었다. 하지만 텐동은 단호박튀김 들어간다고 해서 GG, 해물 종류 돈부리는 가격 때문에 GG. lllorz
돈부리 말고도 카케우동이나 고로케 등이 사이드 메뉴로 추가되어 있었고, 그 외에도 카츠나베(냄비까스)나 니쿠쟈가(쇠고기 감자조림), 새우후라이 정식 등이 있었다. 하지만 돈도,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시간도 부족한 나에게 선택의 여지는 별로 없었고, 그냥 돈부리 네 종류를 먹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이미 이 건물 혹은 근처 회사원들이 점심 식사를 끝낸 뒤라 손님은 나밖에 없었고, 테이블들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렇게 네 명이서 앉을 수 있는 식탁 외에도, 가게 왼편에 벽을 마주보고 먹을 수 있는 다이도 길게 배치해 놓고 있었다. 된장국은 음식을 주문하면 갖다 주었고, 송송 썬 배추김치와 단무지 같은 밑반찬과 시치미, 간장 등의 양념은 취향 대로 알아서 먹을 만큼만 덜어먹게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해서 맨 처음 주문한 오야코동(5000\)...이었는데, 한 가지 간과한 부탁이 있었다. 바로 초생강(베니쇼가) 빼달라는 거였는데, 아예 못먹는 것은 아니지만 와사비와 함께 좀처럼 적응하기 힘든 일본식 밑반찬이라 김치로 생강향을 죽여가며 간신히 비웠다. 메뉴 사진에는 규동에만 들어 있어서 방심한 것이 마음에 걸려서, 이후 한 번 더 주문해 제 맛을 볼 수 있었다.
요일별 메뉴는 이렇게 월~금 5일 동안 점심 때만 50인분 한정으로 낸다고 되어 있다. 마파동이 내가 방문했던 5월 중순의 가장 최신 메뉴로 여겨졌다. 두 번째 갔을 때가 마침 점심시간이었는데, 첫 번째 갔을 때의 한산함이 무색할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그렇다고 소위 '홍대 맛집' 같은 가게들처럼 몇십 분이고 줄을 서야 자리가 날 정도로 폭발적이지는 않았지만.
첫날 초생강에 데인 탓에, 주문할 때는 '초생강 들어가면 빼주세요' 라는 말을 꼭 했다. 이건 가츠동(7000\). 오야코동도 마찬가지였지만, 구제역 대란의 여파 때문인지 가격이 1000원 올라 있었다.
덮밥용으로 튀긴 돈까스이기는 했지만, 두께는 꽤 두꺼운 편이었다. 양파도 달달하고 부드럽게 조려져 있었고, 달걀은 약간 액체가 흐를 정도의 반숙으로 풀어져 나왔다. 맛도 양도 꽤 괜찮아서, 이후 여러 차례 왔다갔다 해도 되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세 번째 갔을 때 다시 시킨 오야코동. 닭다리살과 양파, 파, 달걀이 올라와 있었다. 브라질산을 쓴다고 되어 있는 닭고기는 비교적 작게 썬 대신 갯수는 많은 편이었다. 초생강의 포스에 가려 제대로 맛을 못봤다가 이 기회에 제대로 맛을 느낄 수 있었는데, 이것도 마음에 들었고.
네 번째로는 부타동(5000\)을 시켰다. 얇게 썬 삼겹살을 달달하게 조린 양파와 같이 밥 위에 얹고 깨를 솔솔 뿌린 모양새인데, 규동과 마찬가지로 돈부리 중에는 가장 단순한 모양새다. 삼겹살은 정말 얇아서 고기를 씹는다는 느낌이 나지 않을 정도였는데, 개인적으로는 좀 더 두툼했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기는 했다. 그리고 간혹 씹히는 오돌뼈도 이가 그다지 좋지 않은 내게는 다소 신경쓰이는 요소였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먹어본 에비가츠동(7000\). 에비(일본어로 새우)라는 이름대로 가츠동의 돈까스 대신 이카무스메가 본능적으로 달겨들 포스의 새우튀김이 네 개 들어가 있는데, 먹기 좋으라고 했는지 통새우튀김 두 개를 절반 정도 잘라서 얹어놓고 있었다. 속의 새우살은 꽤 튼실한 편이었지만, 가츠동보다는 다소 맛이 진하고 느끼한 편이라 단무지와 김치를 좀 더 많이 곁들여 먹어야 했다.
돈이 넉넉치 않더라도 그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시간만이라도 충분했으면 좋겠지만, 이제 내게 한국에서 남은 시간은 불과 몇 시간 정도 뿐이다. 이 글을 포스팅한 뒤 곧 생애 처음으로 거의 지구 반대편의 타국으로 날아가 두려움 반 호기심 반의 생활을 해야 한다. 물가가 비싼 선진국에서 늦깎이 유학을 시도하는 만큼, 한국에서처럼 먹는데 돈을 관대히 쓰기는 쉽지 않아 보이고.
다만 이번 독일행은 유학을 위한 어학시험 패스라는 목적이 주된 것이고, 오픈티켓 유효기간 때문에 11월 말까지는 잠시나마 다시 한국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아직 못먹어본 메뉴들 때문에라도, 돌아와서도 계속 탈없이 영업하고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