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서울 시립 교향악단, 약칭 서울시향이 한국 관현악단으로서는 최초로 클래식 메이저 레이블인 도이체 그라모폰과 계약해서 발표하고 있는 음반들과 다운로드 음원들이 꽤 화제를 모으고 있는 것 같다. 아직 독일에 있는 나로서는 그 화제의 파급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일단 내용물 자체는 꽤 성공적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싫어하는 영국의 모 평론가가 호평한 것은 차치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정명훈의 지휘로 녹음한 저 음반들이 서울시향의 첫 녹음은 물론 아니다. 비록 이런저런 작곡가 협회나 연맹 등에서 사가반 비슷하게 제작해서 대중적인 인지도는 바닥을 기지만 한국 작곡가들의 작품을 녹음한 것들도 꽤 있고, 이미 1980년대에 '본격적인' 관현악 연주곡들로 음반을 제작한 것까지 있다.
1980~90년대 제작된 서울시향의 상업적인 녹음들은 서울음반이나 SKC, 나이세스 같이 이제 회사 자체가 사라졌거나 이름과 성격을 바꾼 곳에서 나온 탓에, 지금은 구하기가 매우 힘든 상황이다. 하지만 그 중 하나를 지인이 입수했고, 그것을 어느 클래식 사이트에서 디지털 음원(wav)화시켜 판매하는 것을 구입해 들어볼 수 있었다.
ⓟ 1987 Seoul Records Inc.
1987년 8월 19-20일 동안 서울 스튜디오에서 당시 악단 상임 지휘자였던 정재동의 지휘로 제작된 녹음이었는데, LP 중고샵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나도 물론 실물로 구경할 기회가 있었는데, 나름대로 공들여 만든 속지가 들어 있었고 기억하기로는 이게 서울시향이 합창곡이나 가곡 반주 같은 것이 아닌 본격적인 관현악 레퍼토리로만 만든 첫 상업용 음반이라는 것이 강조되어 있었다.
총 수록 시간이 약 58분인 이 LP의 A면에는 차이콥스키의 환상 서곡 '로미오와 줄리엣' 과 슬라브 행진곡, B면에는 리스트의 교향시 '전주곡' 과 정윤주의 '황병기 주제에 의한 가야금 협주곡' (양승희 협연) 이 수록되어 있었다. 서양 레퍼토리 세 곡에 한국 작곡가의 곡을 추가한 것이 이채로웠는데, 이미 LP 플레이어를 처분해버린 상태라 그냥 잊어버리고 있었다. 차라리 CD로 발견할 수 있으면 사겠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헌책방에서 오래된 서울음반 카탈로그를 보고는 그것도 포기하고 말았다. LP 외에 다른 포맷으로 발매되었다는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물론 그 사이트에서 디지털 다운로드화한 음원도 LP를 소스로 하고 있고, 그 때문에 표면 잡음이 어느 정도 남아 있고 관현악 총주(투티) 부분에서 음의 찌그러짐도 눈에 띄는 등 그리 좋은 음질이라고 하기는 무리였다. 그리고 녹음 비용 절감을 위해 현악 주자들의 숫자를 줄여서 연주했기 때문인지, 뭔가 소리가 가볍다는 인상도 강했고.
전체적인 인상은 비록 정명훈 지휘로 발매된 것들에 못미친다고 하더라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물론 스튜디오 녹음이라 실수를 가능한한 보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강점도 있었기 때문이겠고. 특히 차이콥스키와 리스트 작품들에서 나름대로 극적이고 박력있는 연주를 선보인 것이 좋은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이왕 최신 녹음으로 낼 바에 CD로도 내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여전히 남지만.
이외에도 서울시향은 정재동 재임기에 몇 가지 음반을 더 만들었는데, 아직도 들어보기는 커녕 실물로도 마주하지 못한 것 하나가 남아 있다. SKC에서 제작한 것이었는데,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과 프랑크 교향곡 D단조가 수록된 물건이다. SKC 음반 카탈로그에 분명히 있었던 물건이니 어딘가에 썩고(???) 있겠지만, 그 어딘가를 못찼고 있어서 문제다. 게다가 저 음반은 CD로도 제작되었다고 해서 관심을 끌고 있고.
LP의 황혼기였던 197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에 발매된 이런 국내 관현악단 혹은 연주가들의 음반은 비록 연주력이나 녹음 상태 등을 따져 보면 확실히 지금 싱싱하게 CD 혹은 디지털 음원으로 나오는 녹음보다 점수를 낮게 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기록의 보존이라는 점에서는 여전한 가치를 지니고 있고, 어떤 물건들은 그러한 단점을 상쇄할 만큼 다른 장점을 갖고 있기도 하고.
참고로 이 LP를 해당 사이트에 보내 디지털 음원으로 만드는데 기여한 그 지인은 부산시향이 박종혁 지휘로 1986년에 지구레코드에서 제작한 브람스 교향곡 4번과, KBS 교향악단이 홍연택의 지휘로 국립교향악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시절인 1980년에 성음에서 제작한 바그너 관현악 작품집+강석희의 관현악 '달하' LP도 보유하고 있다.
이 LP들도 각각 꽤 ㅎㄷㄷ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데, 전자인 부산시향 음반은 한국 관현악단 최초로 교향곡 전곡을 스튜디오 녹음한 기록으로, 후자인 국향 음반은 해당 악단의 첫 본격적 클래식 레퍼토리 연주 음반이라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서울시향 LP와 함께 스캔은 끝마친 상태고 잡음 보정과 마스터링만 하면 된다는데, 컴퓨터가 시망 상태라 아직 작업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저 물건들도 LP 외에 다른 포맷으로 나왔다는 말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상태라, 과연 연주나 녹음은 어떨지 궁금할 따름이다. 개인적으로는 LP라는 매체에 대해 어떠한 동경이나 환상도 갖고 있지 않지만, 이렇게 LP 아니면 들어보지도 못할 녹음들의 경우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문제다. 그렇다고 이런저런 컬렉터들처럼 수백만원에 육박하는 진공관 앰프며 턴테이블 등등을 구할 여력도 안되니...lllor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