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말에서 11월 말까지 독일어를 배우기 위해 머물었던 뒤셀도르프는 독일에서 일본인이 가장 많이 사는 도시로 유명하고, 실제로 주말마다 중앙역 근처의 임머만슈트라세 쪽에 가 보면 이런저런 코스프레나 고스로리 복장을 하고 돌아다니는 독일인들의 모습을 어렵잖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도 일본에서 10000km 넘게 떨어져 있고 풍토와 문화가 상당히 다른 유럽이었던 만큼 한국이나 일본, 대만 등지처럼 '동인 행사' 소식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하물며 '뒤셀도르프 코믹월드' 같은 행사는 아예 생각도 못했다.
그렇게 억눌러온 덕심을 귀국 후 처음 발휘할 수 있었다. 물론 독일 체재 때도 이런저런 물건을 통판으로 질러 한국의 지인 집에 맡긴 뒤 귀국 후 찾아오기도 했지만, 직접 행사에 가본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번에도 가기 전에 동아리 인포 등을 통해 미리 살 물건을 정했고, 계획대로 실천에 옮겼다.
하지만 일부러 좀 늦게 SETEC에 도착했음에도 인파는 많은 편이었고, 게다가 카탈로그도 동이 난 상황이라 돌아다니는데 좀 힘들었다. 게다가 늘 지적받는 행사장 내의 무질서함도 그리 개선되지 않은 상태였고.
판타지라이프 (O15): 마비노기 일러스트 앤솔로지 '판타지 라이프' (가격 기억 안남)
차두리도 우루사 광고 찍으며 간접 홍보했던 온라인 게임 '마비노기' 의 앤솔북. 총 14명의 일러스트레이터가 참가했는데, 여러 그림들 중에 개인적으로는 엠카 화백과 팁 화백, 칩코 화백의 그림에 삘꽂혀 구입했다. 여담이지만, 엠카 화백 그림의 맨 오른쪽에 있던 소녀는 '이국미로의 크로와제' 의 유네를 연상케 해서 이채로웠다.
마이 페어 레이디 (J02): 일러스트북 'My Fair Lady~The girl from in Wonderland' (3500\)
브리스카 화백의 두 번째 개인지. 첫 번째 개인지는 유니폼 앤솔로지와 함께 독일에 있을 적에 통판으로 구입할 수 있었다. 이 작가의 그림은 예전부터 주목하고 있었지만, 책의 형태로 본격적으로 접해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Dusty Toy Box (K13): 일러스트북 'Costume Drama' (3000\)
Esphy 화백과 KCN 화백의 합동지. 서양 시대물 위주의 일러스트였는데, 처음 접하는 작가들의 작품 치고는 퀄리티가 높은 편이라 만족스럽게 볼 수 있었다. 권말의 망상 4컷만화들은 보너스.
하치푸치 (B37/38): 2012 보컬로이드 달력 (8000\)
이번에 지른 물품 중 최고가였는데, 총 15명의 작가가 참가했다. 개인적으로 존잘러로 여기는 세 화백인 엠카 화백과 cocoon 화백, 나르닥 화백 세 사람이 모두 참가한 터라 가격 불문하고 질렀다. 개인적으로는 나르닥 화백이 이번 행사 때 네 번째 일러북을 낸다고 해서 기대했지만, 이런저런 일감에 치이느라 결국 내년으로 미뤄졌다고 해서 좀 아쉬웠지만.
둘 다 음악용어가 제목이라 직업병 때문에 질렀다...고 하면 훼이크고, 각각 cocoon 화백과 엠카 화백의 작품이라 문답무용. 전자의 경우 작년에 나온 일러북의 개정판인데, 몇 가지 일러스트가 추가되거나 기존 일러스트의 수정판, 순서 변경, 표지의 유광 처리 등의 차이점이 있었다. 특히 앤솔북 '미쿠미쿠 체인지' 에 실렸던 하츠네 미쿠 일러스트의 얼굴이 눈에 띄게 개작된 것이 눈에 띄었고.
후자는 그 동안 나온 보컬로이드 관련 상품이나 회지 등의 컬러 일러스트를 모은 것이었는데, 예전에 시도했다가 표지만 나오고 중단된 발렌타인북 일러스트와, 원래 부직포 가방용으로 그려진 일러스트 중 카가미네 렌의 세일러복 앞섶에 있는 음자리표를 실수로 높은음자리표로 그려 렌이 고자라니! 여성화(???)시킨 실수가 수정된 것이 눈에 띄었다.
이렇게 해서 올해 마지막 서코의 지름을 끝냈는데, 다만 로리꾼 화백의 경우 개인 사정 때문인지 이번에 불참한 탓에 독일에서 들고 온 선물을 주지 못해 아쉬웠다. 대신 엠카 화백과 cocoon 화백에게는 예정대로 바움쿠헨슈피첸(Baumkuchenspitzen. 바움쿠헨을 한입 크기로 잘라 초콜릿을 입힌 케이크) 두 상자와 헤이즐넛이 통으로 잔뜩 박혀 있는 초콜릿 두 개를 공물(??)로 바치고 왔다.
이 행사 이후 이런저런 온리전이나 2월 서코 등이 계획되어 있다지만, TestDaF 성적 결과가 1월에나 이 쪽으로 발송될 예정이고 그에 따라 다음 출국 일정이나 대학 응시 계획 등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에 참가 가능성은 미지수다. 물론 음악과 덕질 중 뭐가 더 중요하냐고 물으면 당연히 음악 쪽에 손을 들어주겠지만, 지속 가능한 덕질을 어떻게 할 것이냐도 내게는 중요한 명제다.
당장 집에서는 만화책이고 동인 물품이고 좀 처분하면 안되냐고 압박을 주고 있는 상황이고, 이 많은 물품들을 다 독일로 싸갖고 가기도 매우 힘든 탓에 앞으로 한국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느냐, 아니면 독일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느냐에 따라 내 덕질의 운명도 갈릴 듯 하다.